정한새
6월 1일, 제8회 동시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어김없이 사전투표를 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한 듯 불편하게 한 주를 보냈다. 불과 몇 달 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때의 경험을 되살려서, 이번 선거 때는 아예 개표사무원 아르바이트를 신청했다. 어차피 개표 방송 보기 시작하면 끝도 없고 밤샐 게 뻔하니, 어차피 밤새울 거 돈이나 벌자는 심보였다. 선거 사무가 예민한 사안이라 그런가, 지자체에서 알음알음 모집하는 모양새였다. 친구 하나를 꼬셔 같이 신청을 넣고 답변을 기다렸다. 다행히 둘 다 접수가 되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빨래를 돌리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주변 사람에게 투표 독려를 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종잡을 수 없어서, 이미 결과를 알고 있고 기대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게 한 명이라도 더 투표장에 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아슬아슬한 표 차로 윤이 당선되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지방 정부를 잘 세워야 한다는 각오, 이 나라는 글렀다는 생각, 박지현 위원장을 응원하는 마음, 박지현 위원장을 초빙해놓고 사람을 끊임없이 후려치는 민주당에 대한 분노, 어쨌든 내일도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슬픔, 차별금지법이 살아생전 제정되기나 할런지에 대한 의문 같은 것들.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심중에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개표사무원 등록을 하고, 어느 부서에 배정받았는지 확인했다. 나는 개함부였고, 친구는 투표지분류기운영부였다. 명찰을 받고, 투표함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개함 선언을 한 뒤 투표함을 뜯을 수 있었다. 함을 뜯으면 개함부 배정 사무원들이 표를 분류별로 나누었다. 도지사 투표지는 도지사 투표지끼리, 시장 투표지는 시장 투표지끼리 나눠서 상자에 담으면 그 상자를 투표지분류기운영부로 가져다준다. 그럼 그곳에 배정된 투표사무원들이 분류기에 투표지를 넣고, 분류기가 투표 종류에 따라 각 후보나 정당별로 나눠주면 같은 후보끼리 혹은 같은 정당끼리 묶는다. 그걸 집계부에 넘기면 집계부는 표를 세는 것이다. 이게 끝나서 선거관리위원들이 최종 확인까지 마치면 개표율이 된다. 이 모든 과정을 각 정당 및 무소속 후보에서 나온 개표참관인들이 열심히 들여다본다.
문제는, 투표함 하나를 뜯어서 분류하고 나면 잠시 쉬는 시간이 생긴다는 거다. 분류된 투표용지를 책임사무원이 분류기운영부에 가져다주고 오는데 이때 스트레칭도 하고 쉴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뭘 했다? 아르바이트를 신청한 게 무색하게 실시간으로 개표 상황을 알려주는 트위터와 웹사이트를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일까요, 한새 씨?
나의 가장 큰 궁금증은 경기도지사 개표 현황이었다. 각 개함상마다 주어지는 투표함이 달라서 내가 속한 개함상에서는 광역비례와 기초비례, 시도의회 의원과 구시군의회의원 투표함이 배당됐다. 그래서 시도지사, 구시군장, 교육감 표는 사전투표함을 개함했을 때만 볼 수 있었는데 투표지를 분류하면서 대충 보니 아무래도 내가 찍은 후보의 표가 적은 것 같았다. 대충 내가 찍은 사람 표가 2표 나올 동안, 상대 후보 표가 3표에서 4표 정도의 비율로 나오는 느낌?
개함을 하는 약 5시간 동안, 경기도지사 득표수는 계속 접전이었다. 다른 시도지사들이 유력이나 확실 딱지가 붙는 동안 경기도지사 선거에만 아무런 표기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득표 차가 크지도 않았고, 투표율이 유달리 낮은 선거임에도 남은 표는 득표 차를 엎어버릴 정도로 많았다. 그 와중에 경기도 교육감이 내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유력이 떠서 아, 경기도지사도 이렇게 가는구나 생각했다. 같은 사람들이 경기도지사와 경기도 교육감 투표를 했을 텐데, 아무래도 대충 예상이 가지 않느냐 말이다.
개함부가 미친 듯한 속도로 투표용지 분류를 끝냈을 때 시간은 새벽 2시를 넘긴 후였다. 혹시 모를 사건(재분류가 필요한 경우 등)에 대비하여 기다리다가, 새벽 4시가 가까워졌을 때 드디어 선관위에서 개함부는 귀가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친구가 아직 분류기에 잡혀 있잖아요? 그래서 친구의 업무가 끝날 때까지 옆에 붙어 서서 또 개표율을 봤다... 하하... 하하하...!!! 이러지 않으려고 일하겠다고 한 건데(동어반복).
아니, 그런데! 갑자기 경기도지사 득표 차가 줄어드는 거예요!?! 새벽 2시쯤에는 삼만 표 정도의 차이가 났고 계속 그 정도 차이를 유지하다가 새벽 4시 언저리가 되니까 난데없이 이만 팔천표로 줄어들었고, 거기서 십 분 정도 지나니까 이만 오천표로 또 줄었다. 나는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 뛰고 머리는 차가워져 에헤’ 상태가 되어서 아직도 분류 업무를 하는 친구 곁에서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친구가 잠시 쉬는 시간에 ‘너무 기대하지 마라, 대선 때를 생각해봐라’ 하며 나를 타일렀다가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며 멱살 잡히는 순간까지 있었다.
새벽 5시쯤 됐을 때는 경기도지사 득표 차가 만 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고, 분류기도 제 업무를 끝내고 있었다. 집계부에서 다시 세어야 한다고 돌려보낸 투표용지를 다시 분류하는 친구 옆에서 나는 25초에 한 번씩 새로 고침을 했다. 그때쯤이면 어지간한 개표소에서는 개표가 끝났기 때문에 업데이트도 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 5시 30분이 넘어섰을 때!!! 드디어!!! 드디어 역전이 일어났다!!! 나는 투표용지를 백 장씩 묶는 작업을 너무 많이 해서 나가떨어진 친구 곁에서 이거 보라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친구도 나에게 기가 막힌 소식을 전했다. 춘천시장 선거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득표수에서 역전했다는 것이다. 아니이런미친대한민국에서지금무슨일이일어나고있는거죠??? 또 지레 포기한 내 고향이 또 나를 감동을 주고 있는 건가요!??!?! 선관위에서 분류기운영부 개표사무원을 가도 된다고 허락한 6시쯤에는, 춘천시장 후보에 당선 유력 딱지가 붙었다. 친구와 함께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었을 7시 무렵에는 경기도지사도 드디어 당선 확실 딱지가 붙었다.
제기랄.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온갖 곳을 다 빨갱이들한테 내어줬는데도 어쩐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대선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그때 너무 많은 걸 포기해서일까? 모르겠다. 사방이 다 깜깜하고 아귀들이 버티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확실한데, 그래도 들고 있을 촛불 한 자루가 쥐어진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이 드는 스스로가 너무 어이가 없었다.
3시간 정도 기절했다가 일어나니 더불어민주당 소속 차해영 후보가 최초의 성소수자 구의원으로 당선되었다는 소식도 볼 수 있었다. 3월 21일, 여기에 쓴 ‘대선이 끝나고’ 라는 글에서 나는 ‘그러니 어쩌면 다음은 나아질지 모른다. 바뀔 지도 모른다. 살아생전에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여성 국회의원이 나올지도 모른다. 퀴어 도지사가 나올지도 모른다. 나와, 그리고 당신이 바라고 또 그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라는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마포구민들이 그 마무리를 시작으로 만들어놓았다.
한동안 트위터에 ‘나는 내가 죽기 전에 세상이 나아질 거라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기회가 있다면 세상이 나아질 거라고 믿는 사람들을 돕는다. 그 사람들이 결국은 세상을 나아지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자기소개처럼 걸어둔 적이 있다. 우리는 가끔 질 걸 알면서도 싸우러 나간다. 아무리 구호를 외쳐도 당장 바뀌지 않을 걸 알면서도 시위에 나간다. 내가 한 표를 준다고 당선이 되겠냐고 자조하면서도 투표하러 간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세상을 바꿔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는 세상이 나아질 거라고 믿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세상이 나아질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나아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걸 깨닫고 조금 울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도 또 울었다. 여러분이 또 세상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