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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국퀴어 Mar 14. 2022

거짓말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기

조재

길 물어볼 때도 ‘학생’ 그러잖아요. 내 나이 또래는 다 학생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근데 이게 학생 아니라고 하면 그때부터 좀 복잡해져요. ‘뭐하냐’, ‘왜 안 갔냐’, 그래서 그냥 학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귀찮아서. 내가 거짓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 간단하죠?

-청춘시대 시즌1 3화, 강이나 대사 중-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여름 속 청량함을 오래도록 곱씹고 싶었다. 알 수 없는 머릿속 알고리즘으로 드라마 ‘청춘시대’를 재생했다. 매 회차마다 마음에 콕 박히는 대사들이 있는데, 이번엔 유난히 강이나의 대사가 와닿았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관통하는 대사이기에 그런지도.


"조재님은 남자 친구 있어요?"

"네, 뭐. 하하."

저에겐 사자 같은 마누라가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상상하기도 싫다. 20대 초반인 한 레즈비언 친구는 ‘남자 친구’가 군대를 왜 안 갔냐는 질문에 당황해 ‘어…. 그냥 안 가…!’라고 대답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원치 않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이 굴레가 지겹다. 그저 제 연애담에 관심을 꺼주시옵소서, 바랄 뿐. (하지만 내 시간의 대부분을 공유하는 짝꿍(사자 같은 마누라) 이야기를 맘 편하게 하고플 때가 많고, 그건 또 그거대로 괴롭다.)


시스젠더 여성, 판 로맨틱 호모 섹슈얼. 길고도 모두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범주다. (조금 다르지만)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나는 여성이고, 레즈비언이다. 그걸 긍정하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다. 20대 중반, 어느 시점을 계기로 더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퀴어문화축제 자원활동가를 신청하고, 내가 사는 지방에 퀴어 동아리를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에 합류하고, 퀴어 페미니즘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사람들을 만나며 숨 쉴 구멍이 생기는 듯했지만, 여전히 나는 거짓말을 한다.


여긴 대한민국이고 강원도니까. 일자리가 많지 않은 강원도에 살고 있는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니까. 거짓말을 하려고 한적은 없다. 먼저 사람들이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묻고 나는 귀찮으니까 으레 있어요, 혹은 없어요 답할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최근 알게된 이 중 사생활을 깊이 파고드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동성애를 응원한다는 웃픈 포지션을 취하기도 한다. , 당신이 응원하는 동성애자가 바로 앞에 앉아 있습니다.


지방, 퀴어, 여성을 키워드로 함께 글을 써보자는 한새님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건 거짓말의 굴레로부터 한 발자국 더 벗어나고 싶어서다. 누군가는 세상 사람들 다 그러고 산다고, 꼭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부아가 치밀 때가 많고, ‘님은 존나 무례합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응원은 됐고, 이성애 중심적인 대화나 자각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마음 넓은 내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거짓말을 하지 않겠으니, 그냥 잘 들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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