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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국퀴어 Mar 21. 2022

대선이 끝나고

정한새




원래 오늘 올리려던 글은 전혀 다른 글이었는데,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심란해서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이미 이백만 명이 오천 만개 쯤 글을 썼을 텐데 내가 한두 자 더 보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다. 내 심정이 어떻던, 이미 윤 씨는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고 앞으로의 사회가 어떻게 굴러갈 지는 트럼프 시기의 미국과 이명박근혜 시기의 대한민국으로 충분히 입증 되고도 남았는데 말이다.

20대 대통령 선거 당일인 3월 9일, 나는 생각보다 초조해서 스스로가 좀 신기하기까지 했다. 아무런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달리기를 할 때에나 아주 잠깐 세상 시름을 잊을 수가 있었다. 그 날 우연찮게 만난 초면의 분이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결혼을 왜 안 했는지, 어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야 안정된 가정을 만들 수 있는 거 아니냐는 거의 범죄 수준의 일상 대화를 나누려고 들어서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오후 다섯 시 정도가 되어서야 한 끼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나는, 결국 삼선볶음밥과 군만두와 깐풍새우를 시켰고 개표방송을 보면서 그걸 다 먹어치웠다.


고백하자면 나는 윤이 대통령이 될 거라고 확신했고(그를 인류멸종적으로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이다), 사전 투표를 금요일 새벽 같이 한 뒤라서 이미 정신줄은 깎일 대로 깎인 상태였다. 그래서 개표 방송을 볼 생각도 없었다. 문제는 밥반찬으로 틀어놓을 영상을 찾기 위해 유튜브에 들어갔더니 첫 화면에 MBC에서 개표 방송 라이브 썸네일이 떴다는 것이다. 알고리즘인지 고리타분인지 모를 것에 홀려 그만 그 영상을 눌러버리고 말았고, 그게 이 모든 우울과 고통과 피곤함의 시작이었다.

개표 과정의 감정 기복에 대해서는 부연하지 않겠다. 아무튼 이렇게까지 박빙으로 끝날 줄 몰라서 더 힘들었던 것 같긴 하다. 혼자서 중국 음식 3인분 정도를 해치우면서(물론 소화제도 3인분 먹었다) 끊은 담배를 계속 생각했다. 냉장고에 술도 있었는데 그걸 꺼낼 생각보다는 담배가 너무 피우고 싶었다. 애인이 호흡기가 좋지 않다는 자각만 없었어도 편의점으로 뛰쳐나갔을지 모른다. 새벽 2시 반쯤에 남은 개표 수와 지역구 상황을 보고 표차를 줄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보는 걸 포기하고 잠들었다. 대통령 선거 다음 날은 공휴일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듭 하면서.


결과에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차라리 압도적으로 윤이 이겼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기분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아유 그럼, 나라꼴이 그렇지 뭐 하고 다른 의미로 산뜻했을 것이다. 끝의 끝까지 당선 확정을 짓기가 어려웠던 지난한 시간이 되레 큰 허탈함과 피로감을 남긴 것 같다. 그러나 더러운 기분 끝에 나에게 인류애라는 게 아주 조금이라도 남은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강원도 개표 결과였다. 이번 선거에서 강원도는 총 선거인수 1,333,621명 중에 1,015,458명이 투표했다. 76%가 넘는 수치이다. 2017년에 치러진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74.9%였고, 2018년에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63.2%, 2020년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66%였으니 최근 몇 년 중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인 것이다.

내가 나고 자란 강원도는 골수까지 보수적인 지역이라 오랜 시간 새누리당의 비밀 정원이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강원도가 전부 새빨갰으며(그때는 새누리당이 빨갱이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민주당이 딱 한 자리(원주시을)를 차지했다. 제21대가 되어서야 강원도청이 있는 춘천에서 드디어 더불어민주당의 허영이 차별과 혐오 발언으로 유명한 김진표를 몰아내고 당선되었는데, 그때도 어르신들이 허영 이름이 별로라고 혀를 차는 걸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번 대선에서도 특별히 기대할 게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지역색이 바뀌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고 오래 걸리는 문제인데, 내가 경험하고 기억한 강원도는 꼰대들의 천국이고 노후화 되어가는 지역이며 신천지와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사람을 이웃으로 두는 곳이자 일자리가 없어 청년들이 공무원을 하거나 직장을 찾아 떠나는 지역이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재인 당시 후보가 강원도에서 얻은 득표는 37%였으며, 그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강원도에서 얻은 득표수가 홍준표 후보와 유승민 후보가 얻은 득표수의 합보다 적다.

그런데, 소파에 널브러져서 개표 상황에 한탄하다가 강원도에서 이재명 후보의 득표율이 40%가 넘었다는 걸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원도에서??? 이재명이??? 40%를 넘겼다고??? 어떻게??? 열 명 중에 네 명이 이재명을 찍었다고??? 그런 일이 내 생전에 벌어졌다니??? 믿기지가 않아서 강원도 개표 결과가 뜰 때마다 미간에 힘이 팍 들어갔다. 설마, 다 까면 바뀌겠지, 더 떨어지겠지 하는 숫자는 영원히 40%에 머물렀고 심지어 최종 결과는 그냥 40도 아니고 41.7%였다. 그 순간 내가 강원도 여성에게 느낀 존경과 위대함은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이 선거 결과가 나올 때마다 강원도를 욕한다. 그건 그 사람들이 강원도에 안 살아봐서 그렇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강원도에서 왔다고 하면 출장여비를 가산해서 주었다. 강원도는 감자 외에 사람들이 알만 한 게 하나도 없었고, 그나마 춘천 정도가 겨울연가 특수로 몇 년 밥 한 끼 해먹을 수 있었다. 행정 구역이 도와 시 다음에 무조건 면이나 읍이 아니라 구라는 게 있다는 것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알게 됐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읍면동의 차이를 알까? 강원도의 인구 감소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급속하며, 많은 지역이 빠르게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죽어가는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내일은커녕, 오늘에 투자하는 것조차 힘겹다.

미안하게도 내가 이 선거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것은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디지털성범죄근절특별위원장도 아니고, 권인숙 국회의원도 아니고, 이대녀도 아니다. 그들을 보고 감동 받았기 때문이건, 강원도의 환경이 지긋지긋해서건, 윤이 너무 싫어서건, 이유와 별개로 어쨌든 이재명에게 투표한 강원도의 아무개 여성들이다. 나고 자란 나조차 믿지 못한 강원도가 구석에서 열심히 힘냈다는 사실이 윤이 당선된 이후의 나를 살게 했다. 언젠가 강원도에 돌아가면 열 명 중에 네 명은 그래도 나랑 대충 비슷한 방향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나를 숨 쉬게 했다. 그러니 어쩌면 다음은 나아질지 모른다. 바뀔 지도 모른다. 살아생전에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여성 국회의원이 나올지도 모른다. 퀴어 도지사가 나올지도 모른다. 나와, 그리고 당신이 바라고 또 그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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