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서생(書生)으로의 회귀
읽고 쓰는 자아를 찾아가는 길
태생이 서생(書生)이었다.
어릴 적부터 활자 하나, 문장 한 줄에 관심이 많았다.
아무도 내게 글 읽는 것이 무엇인지와 그 기쁨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지만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나는 글을 읽고 쓰고 있었다. 본능이라 해야 하나.. 아무 이문 없는 그 행위에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중학생 시절 썼던 그 글들이 나름 읽혀 내 결혼의 주례를 봐주셨던 은사님께서는 으레 내가 '소설가쯤은 되었겠지' 하고 생각하셨다 한다. 소설가는커녕 현실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필부가 되었음에 놀라 하셨던 기억이 있다.
어릴 적 나는 만날 지각을 일삼는 알 수 없는 '국민학생'이었다.
나는 학교 가는 그 길에서 유독 '개미'와 주변 미물들에 집착했다. 몇 시간 씩.
개미들을 보며, 흙이며 돌들과 풀들을 보며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엮다 보면 학교에 가는 일은 아련하게 잊히곤 했다.
1학년 1학기를 마쳤을 때 '배울 거 대충 배웠으니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 선언하여 가족들을 아연실색하게 하기도 하고, 집 떠난 지 두어 시간이 지나도 학교에 도착하지 않는 '걱정이 앞서는', 손이 많이 가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등교한 나는 동화책 하나 읽어도 단어 하나, 궁금증 하나하나를 선생님께 여쭤보고 내 생각을 말하기에 바빴다. 어렴풋한 그 기억 속 그 선생님은 잘 안 듣고 계셨다.(지금은 안다.)
누굴 때리거나 하는 비행이 없었음에도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는 일이 간간히 있었는데, 2학년 때 담임선생님(잘 안 듣던 그분이다.)이 하셨던 말씀을 귀 너머로 듣고 아직 기억하고 있다. "어머님, 애가 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지금 다시 떠올리니 새삼 열 받는다.
어머니는 가만히 듣고 계시다 약간의 '돌려 까기 폭언'을 선생님께 하시곤 자리를 쿨하게 뜨셨다. 자꾸 불려 가시니 태도가 달라지긴 하셨지만..
4학년쯤 되었을 땐 개뿔 아는 것도 없으면서 담임선생님과 사회현상과 과학에 대해 토론하길 즐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개소리'를 일삼던 국민학생을 어여삐 봐주셨던 주문진 출신 선생님께 배꼽인사라도 해야 할 판으로 부끄럽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그 선생님께서는 끝까지 다 들어주시는 것은 물론 방과 후까지 말이 길어지면 돈가스도 사주시는 열의를 보여 주셨다.
그런데 커가며 보니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행위'가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성공한 삶과는 관계가 없어 보였다. 간혹 이문열 선생이나 박경리 선생처럼 성공한 작가들이 눈에 들긴 했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집안은 가난하고,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즈음 큰 실수를 하게 되었는데, 고등학생 시절 내가 '이과'를 선택하게 된 일이 그것이다.
수학보다 문학을, 과학보다 역사를 즐기는 내가 그즈음 남학생들이 으레 선택하는 이과를 택했다. 모르고 한 것은 아니고 이과를 가야, 공대를 가야 취직도 하고 돈을 벌기도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과는 문과 전과. 이과반에서 완전히 문과반으로 옮기는 것이 안되어 내 성적표에는 항상 반에서 '1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과반에 속해 있으나 문과였고, 그 반에는 문과가 없으니 당연히 1등. 1/1이다.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대학에 진학했다. 서울 소재 00대 국사학과.
이름이 왜 사학과가 아니고 국사학과 인지도 모른 채 지냈다. 술 먹으며. 아주 진탕으로.
먹다 보니 불안해졌다. '아.. 뭐 먹고사나..'
뒤늦게 사관학교를 갔다. 4년제 사관학교에 가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영천에 있는 2년제 편입학 사관학교인 육군 3사관학교를 갔다. 군인으로 임관하면 먹고사는 것은 걱정 없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사관학교 생활 참 더럽게 나와 맞지 않았지만 버텼다. 그 2년, 없던 인내심도 생기고 애국심 약간 얻고 졸업했다.
포병으로 임관했는데, 하루하루 참.. 어이없는(적어도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두어 가지만 소개하자면..
어느 날 행정반에서 '국방일보'를 읽고 있었는데, 한 선배 장교가 지나가며 "야 요즘은 소위 새끼도 신문을 보네.." 하길래 농담인 줄 알고 피식 웃었다. 그랬더니 그 선배가 "웃어?"라며 차갑게 굳었고, 뭘 잘 못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또 어느 날은 연대 체육대회를 맞아 계주 선수로 뛸 준비를(더럽게 못 뛰는 나를 왜 선발해야만 했는가..) 하고 있는데, 또 어떤 선배가 다가와 '어쭈 발목 양말 신었네?' 하며 개념의 유무에 대해 내게 심각하게 묻기도 했다. 암튼 참 안 맞았다. 나에게 그 생활은.
그렇게 지내다 어느 날 포상(포병에서 포를 계류해 놓는 곳)에서 빈 포를 쏘는 훈련을 하다 하늘을 보니 헬기가 주기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아.. 저렇게 비행하는 조종사가 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적어도 가슴 답답할 일은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무심코 결심해 버렸다.
'비록 <문송>한 나지만 저 '조종사'라는 것 한 번 되어야겠다.'라고.
그날부터 늦게 퇴근을 해도 항상 새벽까지 공부했다.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
육군항공학교 조종사 양성과정에 지원한다고 했을 때, 연대장님은 나에게 "기회는 올 때 잡는 게 맞지. 자네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하네. 잘해보게"라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다. 용기를 잠시 얻었다.
우리 포대장님이 연대장님께 불려 가 박살 나고 나오기 전까지 잠시 동안.
포대장이 씩씩거리며 "연대장님이 너 시험 떨어지면 어디 한직으로 보내버리란다~!"라고 말했고, 다시금 나의 개념의 유무에 대해 물었다.
과하게 공부해서 육군항공학교 조종사 양성반에 1등으로 붙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적게 공부하고 놀건대, 아쉬웠다. 그렇게 조종사 생활이 시작되었고, 장교인지라 비행도 했지만 많은 시간 참모업무며 각종 문서 보고 등 야근의 요정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참 이것도 더럽게 안 맞았지만 버텼다.
그 기간 동안 인정받은 한 가지는 '비행을 참 잘하는 조종사야~'가 아니고 '보고서는 깔끔하게 잘 만드네'였다.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속 빈 강정 같은' 현상을 그럴듯하게 엮어내는 '스토리 텔링'의 재능이 있었다. 보고서도 이야기처럼 썼으니까.
그리 살다 적정 진급시기가 지나버린 고참 소령이 되어버렸다. 중령이 끝끝내 되지 못하고, 이제 전역 후의 삶을 준비해야 할 시기를 맞게 되었다. 보고서 잘 쓴다고 진급시켜 주는 게 아니었나보다.
(진급이 왜 안되었는가는 다음에 쓰도록 하겠다. 이것도 꽤 텔링이 되는 이야기다.)
이리저리 어렵고 힘든 과정 '버티고 버티다' 보니 여기까지 다다랐고, 돌아보니 참.. 허무했다.
'왜 참고 살았나?', '무슨 영화를 보려고 그랬던가?' 하는 회환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다 내려놓고 다시금 '말단의 조종사'로 돌아와 출근하던 첫날 나무며, 출렁이는 바다(여기는 동해안이다), 풀꽃들이 눈에 띄었다.
책장에 켜켜이 먼지 쌓인 내 책들(그간에도 책을 간간히 읽었으나, 한 5년 내에는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을 다시 꺼내 읽고, 생각하며 지내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읽는 기쁨, 쓰는 기쁨을 다시 느끼게 되었고 더 이상 무언가 꾸역꾸역 참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읽고, 느끼고 그것을 쓰는 일이 행복함을 먼 길 어리석게 돌고 돌아 이제야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 순간도 읽고, 쓰고 있는 참이다.
어릴 적 글 읽고, 쓰는 것에 재능이 있었을지 아닐지 모르지만 참 미련하게도 너무 돌고 돌고 쓸데없는 인내심 발휘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이리 좋은 '책 내음'을 잊고 지내다니..
다시, 책 읽고 쓰는 서생(書生)으로 돌아가려 한다. 쓰려고 마음먹으니 돌부리 하나 풀꽃 하나 새롭다.
내 글이 얼마나 읽히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이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하나, 읽고 또 쓰려한다.
중학생 때 'XT 컴퓨터'와 '도트 프린터'로 쓰던 그 글들의 오래된 연장선으로 오늘, 다시 한 자 한 자 마음에 새겨 간다.
서생(書生)의 삶은 날 때부터 정해지는 거다. 이리 돌고 저리 돌아도 사람 참 안 변한다. //F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