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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림 May 30. 2022

예술가의 자화상(自畫像)

서정주와 윤동주 그리고……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날마다 각종 매체를 통해서 글과 그림, 새로운 작업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호기심을 일으키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시선을 끕니다. 장점이라면 빠르게 지나가는 트렌드와 오늘의 이슈를 신속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일 테고, 아쉬운 점이라면 쉽게 사라 진달 까요.


일회성 소비를 위한 단순 작업물은 수명이 짧아 몇 시간 만에 헌 것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겠지만 남 보기에도 이쁘게 꾸미는 게 쉽진 않은 일이니까요.


반면 오랫동안 사랑받는 작업물들은 클래식, 고전, 예술 작품으로 불리며 두고두고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니 상대적으로 수명이 깁니다. 앞선 <자화상>이란 시도 90년대 중반에 쓰여서 백 년을 바라봅니다.


 저는 <자화상>이란 작품을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로 처음 접했습니다. 그땐 감동이고 뭐고 시험에 쫓겨 밑줄 쫙, 해설만 달달 외웠는데요. 얼마 전 오랜만에 읽다 보니 외웠던 기억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오히려 처음 읽는 것같이 접할 수 있어서 더 좋았어요. 특히 저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는 구절은 저의 센치했던 시절을 떠오르게 해서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 쉽지 않았습니다.


저의 소감을 표현하자면요. 아주 오랜만에 고급 한정식집에서 양질의 식사를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포만감이랄까요. 정말 감동했습니다. 한 편의 뮤지컬을 봤을 때 느낄 수 있는 진한 여운을 몇 줄 안 되는 글귀로 그려내는 것을 보니 작가 역시 언어의 귀재단 생각이 절로 들었죠. 저도 누군가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작업물을 남기고 싶단 생각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반 고흐는 자화상을 정말 많이 그린 작가예요



이런 아름다운 시를 쓴 작가는 서정주 시인입니다.


아시겠지만 당시 당시 뛰어난 재능만큼 대표적인 친일행각으로 유명했습니다. 살아생전의 반민족, 독재 옹호 행위로 인해 현재도 기회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논란의 소지가 되는 부분은 사람 됨됨이를 떠나 그가 남긴 문학적 성취를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현대 문학에 조명할만한 작품들을 많이 남기기도 했구요. 아래 <마쓰이 오장 송가>는 자살 특공대로 끌려간 조선인 중 첫 희생자인 마쓰이 히데오(인재웅)를 칭송하고 시입니다. 그 중 일부입니다.



「마쓰이 오장 송가」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伍長(오장)。우리의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사람。

印氏(인씨)의 둘째아들 스물한살 먹은사내。


(중략)

우리의 同胞(동포)들이 밤과 낫으로 정성껏 만드러보낸 飛行機(비행기)한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엇다간 네리는 곳,

소리잇시 네리는 고흔 꼿처럼

오히려 기쁜 몸즛하며 네리는 곳,

쪼각 쪼각 부서지는 山(산)덤이 가튼 米國軍艦(미국군함)!


수백척의 飛行機(비행기)와,

大砲(대포)와, 爆發彈(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가튼 兵丁(병정)을실코

우리의 땅과 목숨을 빼스러 온

원수英米國(영미국)의 航空母艦(항공모함)을,

그대

몸둥이로 네려쳐서 깨엿는가?

깨트리며 깨트리며 자네도 깨젓는가!


(중략)



자살 특공대로 유명한 가미카제 특공대가 처음 시작되었던 지역이 라이테 만이라고 합니다. 가미카제 활동을 찬양하는 시로 일제에 협력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친일 외에 군사정부 옹호를 위해서도 사용했는데요. 아래는 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일 축하를 위해 쓴 시의 일부입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중략)




 그런데 여기 동일한 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시인의 <자화상>이 있습니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가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저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 우물물에서 어렵사리 비춰본 자신의 모습은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켰나 봅니다. 내가 참 밉기도 하고 때론 가엾기도 하고요. 그러다 또 미워졌는데 다시 그립습니다.


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윤동주 시인의 글입니다. 작가가 자신을 바라보며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시라 생각합니다. 20대의 젊은 날 윤동주 청년은 일제 강점 치하에서 주권을 잃고 고아처럼 헤매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했습니다. 하지만 마냥 앞장서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과 선택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결국 일본 유학 중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해방을 앞두고 옥중에서 사망합니다.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1992년 월간 <시와 시학> 대담 중)

“적어도 일제 치하에 몇백 년은 더 있을 줄 알았다.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반미 특위 조사 중)


서정주 시인의 답변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서정주 시인의 시를 논하는 자리에는 항상 그의 살아생전 행적들이 꼬리표가 되어 따라다니지 않을까 싶어요. 앞서 제가 시 <자화상>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이 거짓은 아닐 테지만, 힘껏 반감이 된 것은 사실이에요. 저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예술가가 예술이 가진 힘과 자신의 재능을 국가와 민족에 해가 되는 데 사용하는 것에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살아생전 그의 행적으로 인해 작품들이 꾸준히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글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작품 안에 그의 가치관과 인생사가 녹아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술가들의 자화상은 단순 자화상을 주제로 한 작품만이 아닌 인생사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자화상은 나의 얼굴과 모습을 그려내는 것뿐 아니라, 지향점을 담아내는 것이라 작품과 함께 작가의 행적도 함께 논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일반 모든 사람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예술가라 생각됩니다. 훗날 제 삶의 자화상을 돌아봤을 때도 부끄럽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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