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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림 Mar 07. 2022

예고, 반드시 보내야 하나

yes or no

 한 학생이 수업 중에 제게 이런 질문을 한 적 있습니다. 어릴 적으로 돌아간다면 예고(예술 고등학교)를 다시 다닐 건지에 대한 질문이었어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오늘 드릴 순 없지만, 대신 그간 제가 경험한 바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일찍이 미술로 진로를 결정하고 예고 입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예고에 입학하기 위해선 실기 시험 준비를 했어야했는데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1년 반 동안 학교 마치면 바로 미술학원으로 이동해서 새벽까지 그림을 그렸고, 방학 때도 역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 시간 제외하고 앉아서 시험 준비를 위한 그림만 그렸습니다. 입학 경쟁률이 치열했기 때문에 학업 성적을 위해 틈틈이 일반 과목 성적도 챙겼습니다. 저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입시 미술을 시작한 타입이었기 때문에(중학교 2학년) 수능 준비하는 것처럼 준비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치질과 코피를 달고 살았습니다.



 학원 친구들 사이에서의 경쟁도 치열했죠. 미술 학원에서는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그림 시험을 보고 점수를 매겼습니다. 1등부터 꼴찌까지 등수를 매기다 보니 제가 그린 그림과 친구들의 그림이 상호 간에 비교되며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이런 경쟁심 유발을 통해서 실력 성장을 이루게 하려는 학원 측 의도도 있었지만, 어리고 혈기 넘치는 아이들이 밖에서 놀진 못하고 종일 갇혀 지내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시험이 다가올수록 동기들 사이의 관계도 예민해지고 스트레스 쌓이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저는 1년 반 열심히 준비한 만큼 시험을 무사히 치렀습니다. 기다리던 합격 통지에 부모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입학 후 제가 예고에서 배운 것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세상은 넓었고 보통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잘 그린다고 하는 친구들이 모이니까 어느 정도 그려서는 잘 그린다는 소리는 못 듣거든요. 그리고 두 번째로 시야가 넓어졌죠.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뭘까, 어떤 그림이 정말 좋은 그림일까, 나도 창의적인 생각을 하고 싶은데 내 편협한 사고를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을까?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친구들과 즐거운 추억도 쌓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대학 생활보다 고등학교 3년이 더 재미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입학한 것을 후회하게 된 부분도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선후배들과 동기가 있다면 아마 동감하지 않을까 싶어요. 바로 그건 미술 학도를 꿈꾸는 저희 학생들에게 아무도 미술계의 현실에 대해서 직시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지금은 저희가 예고라는 브랜드와 부모님의 경제적인 지원이라는 안락한 환경을 방패로 온실 속 화초처럼 교육받고 있다는 것을요. 대신에 저희는 세상의 험난함을 모르고 고등학교 3년간 또 다른 입시 미술인 미대 입학이라는 관문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예고는 학교 외부에서 작가 활동을 하는 작가나 입시 미술 학원 강사를 초빙해서 수업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사립학교인 만큼 일반 고등학교와는 다르게 십수 년 담임으로 반을 맡으며 고정적으로 진로 상담을 해주시는 일반 과목 선생님들도 있고요. 그분들은 정말 현실을 몰라서 이야기를 못 해준 걸까요? 아니면 실체를 알려주기 두려웠던 걸까요?

 
 저와 같이 서양화 전공하던 친구가 있습니다. 예고 졸업 후 이름 있다고 하는 4년제 미대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졸업하고 당장에 생활이 어려워 작가의 꿈을 접고 컴퓨터 학원에 들어가 일러스트와 포토샵 프로그램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1년을 취준생으로 포트폴리오 작업을 했지만, 이미 시장에 너무 많은 디자이너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회사에 합격해 출근하기까지 8개월이 더 걸렸습니다. 그 친구가 취업 준비하면서 자주 푸념 삼아 했던 말은 왜 그때 선생님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을까, 왜 말하지 않았을까? 였습니다.


 대학 등록금보다 더 많은 돈과 기부금을 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예고라는 곳에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입학했다는 것을 안다면, 학생들에게 현실을 알려줘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실제적인 1:1 맞춤 교육해야 맞았을 겁니다.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두 번째로 현실적인 부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어쩔 수 없이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학기마다 공식적인 등록금 외에 비공식적인 기부금, 전공별 필요한 재료비(미술과도 서양화, 동양화, 디자인, 조소 등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기본적인 아이들 생활비와 좋은 수능 성적을 위한 과외비나 학원비(선택이지만) 들어갑니다. 저희 부모님은 고등학교 3년간 제게만 1억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약 십수 년 전의 일이니 고려해야 할 부분입니다.

 

 미술 전공을 원하는 자녀가 있으신가요? 그럼 대부분의 학부모님이 물어보십니다. 돈이 얼마나 드냐고.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한다고 상담받으러 오신 분들도 있고, 부모님이 보내고 싶어 아이를 데리고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어느 쪽이든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내가 조금 더 고생해서라도 길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부모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위에 두 가지 깨달음은 학교의 어떤 유명한 선생님을 만나 특별한 수업을 받아서 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환경과 사람인 것 같습니다. 같은 분야에서 재능 있는 친구들과 함께 경쟁하고, 대화하고, 친교 할 수 있었던 환경 덕분에 일어난 시너지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고 보내라는 거 아니냐고 질문하실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맹모삼천지교`처럼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환경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 돌아서서 보니 예고 가는 것만이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주는 길이 아니고, 100% 성공을 보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예고를 가지 않고도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기존 한국 미술계의 엘리트 코스라고 불리는 예중, 예고, 명문 미대라고 하는 곳을 들어가면 우리 아이 100%로  미술로 편하게 살 수 있을까요? 어느 곳에 가나 사람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각 사람에게 맞는 삶과 발전 방향이 있으니 그 가운데 우리 아이 성향상 예중과 예고가 필요하다, 그리고 보낼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싶으시면 기회를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않아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와 같은 교육을 제공할 수 없다면요? 방법을 찾으면 길이 보인다고 합니다. 지금 세상은 입시 학원에 한 발도 내딛지 않았던 분들도 성공합니다. 집에서 홀로 그림 그려오셨던 할머님의 그림을 손자가 SNS에 올렸습니다. 우연히 그 사진 한 장으로 명성을 얻습니다. 이제는 종이와 연필 같은 실물이 없어도 패드로 그림을 그리고 유통합니다. 언제 어떻게 누가 성공 세를 탈지 모릅니다.


 그간 작가 활동과 아동, 입시, 취미 미술 강사를 겸하며 배운 것도 많지만 답답하기도 답답했습니다. 그림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그림을 그리면서 생활하기 위해서 기존의 입시 교육 방식은 이제 필요하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곳에서 원장으로, 담임으로 일하고 계신 내로라하는 선배님들이 뭐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요.


 앞서 제게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예고에 갈 거냐고 질문한 수강생에게 저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예고에 대한 로망이 큰 친구였거든요. 지금의 저라면 다시 다닐까요? 이 부분은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아, 그리고 저는 제 모교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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