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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져 죽을 뻔한 고비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초등학교 다닐 즈음 외가 식구들과 시골 강가에 놀러 갔을 때, 또 한 번은 결혼 후 남편과 하와이 바다에서 놀다가. 어린 시절, 나는 수영을 못했지만 발이 닿는 깊이에서 신나게 놀다가 갑자기 깊어진 곳에 빠져 당황하고 허우적거리게 됐다. "살려주세요"를 간절히 외쳤지만, 물을 먹으며 소리치니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리 없었고, 고작 1미터 앞에 있던 이모는 내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이모가 곧바로 구해주지 않아 나는 물속으로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고, 결국 외삼촌이 헤엄쳐와 나를 꺼내주었다. 이때 깨달았다. 아무리 간절히 외쳐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하와이에서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안전요원도 없고,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한적한 해변에서 맨몸으로 스노클링을 했다. (이전에 깊은 바다에서 남편과 단둘이 스노클링을 한 적이 있는데, 그 고요한 맛에 들려 정신이 나가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오리발도 없었다.) 깊지 않은 바다였고,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맨몸으로 수영을 하고 있어서 걱정 없이 들어갔다. 한참 스노클링을 즐기던 중에 갑자기 큰 파도가 쳤고, 스노클링 마스크의 호흡관 쪽으로 바닷물이 들어갔다. 나는 그 물을 삼키며 호흡곤란에 빠졌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순간에 살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바다에서 깨달았다. 나는 파도에 밀리고 다시 헤엄치기를 반복하다 더 이상 힘이 나지 않았다. 해안가로 나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파도와 조류를 이겨낼 힘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돌이켜보면, 많은 경우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선택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든 타인에게든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것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내 등 뒤에서 아무리 밀어줘도, 남편의 몸도 나처럼 파도에 밀렸다. 뒤에서 느껴지는 남편의 간절함과 애절함이 있었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물속에서 두 팔과 다리에 힘이 빠지고, 점차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해안이 아주 가까워 보였지만, 내가 그곳에 발을 딛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때 이미 포기를 선택했었다. 지나간 삶이 필름처럼 스쳐가는 경험을 또 하게 될 줄이야. 죽을 위기를 겪을 때 스쳐가는 필름은 역시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다 갑자기 엄지발끝에 거칠고 까실한 무언가가 닿는 게 느껴졌다. 무엇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내 다리는 잽싸게 그쪽으로 뻗었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던 숨이 이어졌다. 그것은 돌이였다. 커다란 돌 위에 이끼와 산호초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사실 돌이라기보다 바위에 가까웠다. 그 바위에 다리를 올려 다시 숨을 골랐다. 이내 스노클 마스크를 벗고 정신을 차렸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순식간에 퍼졌다.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전력을 다해 해안가로 헤엄쳤다. 필사적으로 헤엄치는 나를 남편도 따라왔다. 그날 발끝에 모래의 감촉을 다시 느낀 순간의 전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 내가 살아있게 만든, 나를 살려준 기적 같은 바위의 존재.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바위였을까? 아니면 원래부터 바로 옆에 있었지만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바다는 나를 살렸다. 때때로 나는 여전히 바다의 품 속을 찾는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물을 찾고, 그렇게 물속에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