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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사과 Aug 07. 2024

이 집에 파출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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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 나서 나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여간 쉽지 않았다. 엄마로서의 삶, 여성으로서의 삶이 이렇게 힘든가, 한국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나만의 시간과 삶을 원해도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의 지지가 없으면, ‘살림이나 똑바로 하지, 밖에서 뭘 한다고’ 같은 따가운 감정 다툼에서 부딪히고 금세 엎어지기 마련이었다. 집안이 점점 어지러워질수록 남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남편이 나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내가 나만의 시간을 보낼수록 남편의 집안일 몫이 늘어난다는 불만이 쌓여갔다. 우리의 대화는 대화라고 할 수 없는 필요에 의한 질의응답뿐이었고, 나는 언제나 남편에게서 핀잔을 들어야 했다. 내가 나의 시간을 쓰는데 애를 쓰는 만큼 남편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져 갔다.



다른 가족이나 친인척의 도움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내 끼니를 챙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루에 한 끼 먹으면 성공인 것이었고, 그 한 끼도 남편을 차려주기 위해 만들다가 덩달아 먹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요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나를 위한 요리는 할 시간이 없었다. 이유식과 저염 유아식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위한 요리만으로도 벅찼다. 고춧가루가 팍팍 들어가거나 청양고추가 듬뿍 들어가 칼칼한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날은 없었다. 아이들이 먹고 남긴 밍밍한 음식을 먹는 것, 남편이 입에 안 맞는다고 남긴 것을 먹어 내 뱃속으로 처리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귀한 유기농 식재료가 아까워서, 재료를 사 오느라 고생한 내 몸과, 주방에서 한두 시간 서서 정성을 다해 요리한 내 마음이 아까워서. 이것들에게서 냉정하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일이었다.



꾹꾹 울분과 서러움을 눌러 참으며 아이들 때문에 버틴다며 때때로 치솟는 화를 억누르고 또 억누르며 지내던 날이었다. 어느 날 결국 또 사달이 났다. 시간에 쫓겨 둘째 유아식을 만들고 먹이는 숙제를 마치자마자, 나는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부리나케 서둘러 나가야 했다. 남편에게 뒤처리와 아이를 부탁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나간 건데, 남편은 밖에 나가있는 나에게 어질러진 식탁과 주방 사진을 찍어 메시지로 떡하니 보내놨다. 사진을 보자마자 '집이 이게 뭔 개판이냐? 너 이딴 식으로 하고 나갈 거냐?'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내 역할과 책임을 똑바로 하지 않고 내팽개치고 나갔냐는 것처럼, 사진 한 장이 나에게 거대한 비하로 다가왔다. 몹시 불쾌했고 분노를 느꼈다. 이렇게 사진을 찍어 보내는 의도가 무엇인지 남편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노는 금세 내 머리끝까지 가득 차올랐다. 나는 이 결심을 더 이상 혼자만의 생각으로 둘게 아니라 대대적인 선전포고 해두겠다는 심사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 동생에게 연락해서 말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나 얘랑 이혼하려고."

"무슨 소리야? 왜."

"애 밥 먹이고 시간 맞춰서 겨우 나갔고, 늦어서 못 치운걸 안 치운다고 저런 식으로 말하니까. 무슨 증거 남기기라도 하듯 사진까지 찍어서 나한테 보내고 할 일이나 똑바로 하라는 게 말이 되냐? 나는 저때라도 안 먹으면 저녁까지 하루종일 굶어야 되는데. 내 밥은 누가 차려주냐고, 아무도 안 차려 주잖아. 우리 나간 다음에 집에서 편하게 느긋하게 밥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본인 밥 안 차려 주고 나간다고 저런 식으로 함부로 대하는 태도는 경우가 아니라고 본다. 내가 무슨 이 집에 파출부냐고. 당장 내 목구멍 풀칠도 못하는데 삼시세끼 다 해다 바쳐야 되냐고. 내가 저 남자한테 가정부로 고용돼서 사는 거냐?"



화가 났다. 무엇보다 정말 화가 났던 것은 내 말 안에 엄마가 나한테 30년 넘게 하던 말이 고스란히 들어있어서였다. ‘내가 이 집에 파출부냐'는 말. 가정부냐는 말. 그래서 엄마가 나는 결혼하지 말고 혼자 룰루랄라 내 인생 즐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 번씩 푸념하며 말했던 걸까. 엄마한테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절대 저런 말은 하지 말고 살아야지라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내 입으로 똑같은 말을 하다니.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직시하게 된 것에 몹시 화가 났고 절망스러웠다. 엄마라는 단어의 무게는 이토록 무거운 건가. 엄마라는 이름을 달기 위해서는 내가 그렇게도 부정하고 멀리했던 삶을 결국에 살아내야 하는 것인가. 아무리 많이 도와주고 애써주는 가정적인 남자를 만났어도 절대적인 건 달라지지 않는 건가. 내가 배우자를 잘 못 만난 건가, 내가 엉망으로 잘 못 살고 있는 건가, 아니면 정말 결혼 자체가 문제인 걸까.

생각에 덫에 걸려들었고, 감정의 골에 빠져들었다.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는 그렇게 끝을 향한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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