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하는 日>
시작됐다.
청춘이 제법 살이 찌더니
몸 안에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려 넣었다.
국가방위라는 거창한 수식어는
발가벗겨진 채 제 색깔을 잃어버렸다.
내가 한 일은
하루하루 날짜를 세는 것.
달력을 찢는 일이었다.
일자로 깔린 보도블록을 보면
강박증이 돋아 하나씩 걷는 일을 즐겨했다.
머리에 비좁은 틈이 생겼다.
대뜸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졸부가
입가에 생크림을 묻히고 들어오더니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월세 계약서에
시뻘건 도장을 찍었다.
비 내리는 밤길
비에 젖는다며 필사적으로
휴지를 몸에 칭칭 두르는 사람들과
한 손에 차키를 쥐고선
집까지 허겁지겁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았고
종일 휘슬만 불던 심판은
갑자기 서서 레드카드 챙기는 일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내가 한 일은 오로지
하루하루 날짜를 세는 것.
달력을 찢는 일이었다.
종착역을 알리는 방송이 울리자
집 잃은 사람들이 내쫓겼고 나는
가만히
가만히 앉아
문 닫히는 일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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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화자 본인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렵게 지어진 시들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하지만, 이 시는 이 시가 담고 있는 무거운 뜻을 보여주기 위해 어렵게 지었다. 그래서 이제껏 지었던 시들 중 설명이 필요할 만큼 가장 난해한 시다.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20대 초반의 내가 처음 느꼈던 군대와 우리 사회에 대한 회의감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느꼈던 '일부 군인들'의 모습이며, 밤낮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이 땅의 모든 군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우선, 제목의 日부터 살펴보자. 흔히 알고 있는 '날 일'이란 한자다. 뜻으로는 어떤 날일 테고, 발음으로는 일이니 '어떤 일을 하다' 할 때의 그 일과 동음이다. 즉, 전역하는 날임과 동시에 전역하는 것조차 일이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첫 연의 '시작됐다'는 전역한다는 것은 군생활이 '끝난 것'인데 시작됐다는 모순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이해될 것이다.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려 넣었다'는 나무의 나이테를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군생활이 2년 지났음을 뜻한다. 3연의 '달력을 찢는 일'은 매일 반복되는 업무가 단순하고 부질없었다는 뜻이고, 그 뒤에 '보도블록을 걷는 일을 즐겨했다'에서 반어법으로 그 의미를 더 강조하였다. 4연의 '졸부'는 개인의 노력보단 뜻하지 않게 갑자기 부자가 됐단 뜻으로, 이 시에서는 본인의 노력이 아닌 그저 장교로 들어온 것만으로 사병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행태를 비꼬고 싶었다. 4연은 입영으로 머리에 틈을 내고선 그곳에 강제로 '임차인' 졸부가 들어와 '임대인' 과의 월세 계약서에 일방적인 도장을 찍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묘사했다. 여기서 월세는 사병들의 작고 소중한 월급이다.
5연에서는 개인적으로 느꼈던 군대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휴지와 우산은 물을 닦거나 막는 데에 그 쓰임이 비슷하나 엄연히 용도가 다르다. 그렇기에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한다. 하지만, 내가 느꼈던 군대에서는 문제 해결에 있어 적합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또 그다음, 차가 있는데 비를 맞으며 집까지 뛰어가는 모습도 효율적이지 않은 문제 해결 방식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심판은 규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예방하고 적절한 징벌을 내려야 하지만 그저 '앉아서' 방관하듯 휘슬만 불고 있다. 전체적으로 5연은 비합리적, 비효율적, 불공정한 군대 사회를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6연에서 한 번 더 군생활이 무료하고 가치를 찾기 힘든 시간이었음을 고백했다. '종착역을 알리는 방송'은 전역을 뜻하고, '집 잃은 사람들이 내쫓겼고'는 임대인이 쫓겨나는 모습을 모순적으로 표현해 강제로 들어오고 나가게 되는 슬픔을 드러내고자 했다. 군생활이 끝날 즈음, 내게 닥치게 될 사회도 군대와 별반 다를 게 없음을 느꼈다. 사회에도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한 일들이 오히려 군대보다 더 만연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에 좌절하고 '가만히 앉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문 닫히는 것조차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일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했고, '기다렸다'는 반어법으로 무기력하게 사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결국 열차는 사회로 연장운행하였고, 내가 군대에서 겪었던 일들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위 해설을 잘 읽고 다시금 시를 천천히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