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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Oct 02. 2024

뒤로 걷는 여자의 변

나는 뒤로 걷는 여자다 날마다 점점 더 뒤로

 네가 앞으로 가는 동안

그래서 점점 더 앞서가는 동안

점점 더 뒤로 더 갈 뒤가 없을 때까지  

뒤로 걸을 예정이다  

 (그러니까 넌 이제 충분히 마음을 놓아도 된다)


그러니까 그때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너처럼 앞으로 나아간다고 여겼던 그 길 위에서

어느 날 나는 길을 잃었다

천둥이 치고 빗물이 쏟아졌다

흠뻑 젖었고 오래 누웠다

소용돌이치는 까만 어둠 속에서 오래

까만 어둠이 고요해질 때까지 가만히 오래

관 속에 오래      


그러자 오래된 것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묵은 것들이 내려앉았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쉽게 버려지지 않고

거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어둠과 고요와 친숙하게 노는 장님들과

앉은뱅이들의 기적에 대한 수다와

지는 노을의 이야기와

오래 묵은 것들 위로 내리는 햇살의 빛나는 품과

함께, 오래 웃는 법을    


그러자 키득,  

바람이 딸깍 문을 두드렸고

뱅그르르 문이 열리고               

다시 소용돌이가 치고 천둥이 치고

흐르르 빗물이 쏟아졌다      

홀연히 누운 내가 일어나 처음 하늘을 보았다


그렇게 나는 뒤로 걸었고

뒤로 걷는 동안  앞으로 걷는 시간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미안하게도) 앞으로 걷는 너의 환호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마 지금 너는                           

반짝이는 현란한 문장과 사물들에 취한 너는

뒤를 돌아볼 겨를도 필요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오래 묵은 것과 친숙한 시간을 보내온 나를 알 길 없을 테고

그러니까 지금은

뒤로 걷는 기쁨에 대해선 나만 알기로 하고

그러니까 지금은 (미안하게도) 혼자 웃지만   


문득

어느 날 네게도 소용돌이가 치고 천둥이 치면

그땐 같이 뒤로 걸으며 키득

같이 웃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우리들의 기적을 함께 노래할지도 모르겠다고

키득,      










여자는 분명 뒤로 걸었고, 자신이 뒤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밝혔다. 그런데 여자를 좀 안다는 한 남자가 주장했다. 내가 아는 한 그 여자는 결코 뒤로 걷는 여자가 아니다. 그녀가 앞으로 걷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남자는 그렇게 증언했다. 그렇다면 여자는 거짓말을 한 것일까. 여자는 자신이 뒤로 걷고 있다는 사실이 참임을 입증해야 할 난처한 상황에 놓인 것처럼 갑자기 당혹스러웠다.

사실 남자의 증언은 단지 문자 그대로 자신이 본 사실에 대해, 그 이상의 어떤 의미 부여도 하지 않은, 담백한 증언일 뿐이었지만, 여자에게 이 증언은 뜻밖의 사건으로 다가왔다. 여자는 누구도 자신이 뒤로 걷는 것을 의심치 않을 거라 여겼다. 분명 자신은 뒤로 걷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그렇다면 자신이 뒤로 걸어온 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일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그랬다. 분명 뒤로 걸었다. 그러나 길은 한 방향으로만 향해있는 직선이 아니었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뱅그르르 도는 곡선이었다. 늦가을 나무가 잎을 떨군 채 겨울을 보낸 후 새봄을 맞아 싹을 틔우듯 여자의 뒤로 걷기는 변곡점을 지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누군가에겐 뒤로 걷는 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로 보일 수도 있었다. 문득 여자는 '뒤로 걷는다'는 말속에 숨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온 자신의 오랜 버릇을 읽었다. 그랬다. 읽는 일은 풀려나는 길이기도 했다. 이젠 어떻게 읽혀도 좋다.

다만 여자는 자신이 뒤로 걷는 여자이고, 뒤로 걷는 기쁨 대해 오래 말할 수 있길 바랐다. 뒤로 걷기는 여자에게 가장 익숙한 삶의 방식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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