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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 Apr 19. 2022

스리랑카 유치원 생활기(1)

스리랑카 유치원을 소개합니다!

2015년 12월 23일. 정식으로 스리랑카 이민생활의 첫 발을 떼었다. 당시 5살이었던 첫째와 3살이었던 둘째는 한국에서도 어린이집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스리랑카 유치원을 보내게 되었다. 집 앞에 있는 한 사람이 통과할만한 작은 샛길을 빠져 나가면 되므로 30초도 걸리지 않는 최단거리에 있었다.


유치원 정문

선생님 집과 맞닿아 있는 작은 건물 한 채. 여기에서 아이들이 함께 공부한다. 한국처럼 연령별로 반을 나누지도 않았고, 고만고만하게 생긴 터라 나이 구별도 잘 안 된다. 교과과정이라는 게 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했지만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선생님 책상

교실 앞 쪽에는 선생님 전용 책상이 있다. 원장 선생님과 보조 선생님 2명으로 구성된 작은 교실. 벽에는 숫자나 싱할라어 아꾸루(알파벳)을 설명하는 단어과 그림과 아이들의 프로필 사진이 붙어 있다.


선생님이 직접 만든 교육 교재로 공부 중.


수업은 기본적인 교재와 선생님이 직접 만든 보조교재를 활용한다. A5 종이에 매직펜으로 직접 숫자, 아꾸루, 미술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 사용한다. 아이들에게 2가지 노트를 준비하게 하는데 하나는 수업용, 하나는 숙제용이다. 노트 겉면을 빨간색 종이, 초록색 종이로 감싼 뒤에 비닐로 코팅을 한다.


학기 초마다 아이들의 책과 노트를 준비할 때 진짜 짜증이 났다. 이유는 코팅을 하려고 구입한 비닐의 사이즈가 항상 애매해서 제대로 포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불만을 표현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언어보다 생활 방식에서 속이 터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유치원 책상과 의자


수업은 아침 8시 30분쯤에 시작해 11시 30분이면 끝났다. 수업 시작과 끝에는 반드시 불경을 외워야 했다. '사두 사두'로 시작하는데 개인의 종교는 상관없이 국가의 교육 방식을 따르게 되어 있다. 원장 선생님과 가족이 크리스천이었는데 불상 옆에 예수님 사진을 같이 붙여두긴 했었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은 부모나 조부모가 데리러 왔다. 원장 선생님은 교문 앞에 서 있는 학부모에게 그날 그날의 특이사항을 전했다. 나는 못 알아들으므로 시누이를 보내기도 했다. 종종 챙겨 가야 할 준비물도 있고, 신문에서 글자를 오려서 가져가야 하는 날도 있었다.


유치원 마당의 그네
그네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


유치원에는 딱히 놀만한 게 없다. 아침에 조금 일찍 가면 바구니에 담긴 조잡한 블럭을 갖고 논다. 종류가 달라 서로 맞지 않는 블럭이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참 즐겁게 갖고 논다. 그 외에 마당에 있는 그네와 시소를 타고 놀기도 한다. 여자 아이들은 선생님의 주도하에 노래를 부르며 손을 맞잡고 빙빙 돌기도 했다.



비록 작은 유치원이지만 유니폼이 있다. 유치원에 갈 때에는 검은 구두와 흰 양말을 신고 가야 한다. 처음 유니폼을 입던 날에는 기분이 한껏 좋아 불편하다고 하지 않더니 며칠 뒤부터는 신기 싫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슬리퍼를 신겨 보냈었다.


생일파티 해주는 선생님과 아이들


선생님들은 반드시 사리를 입어야 한다. 공무원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들은 직업과 상관없이 사리를 즐겨 입지만 젊은 여성이 사리를 입고 가방을 매고 일찍부터 출근을 한다면 대부분 공직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유치원 마당에 있는 선생님 집앞에서 도시락 먹는 중


유치원에 갈 때에는 챙겨가야 하는 준비물이 있는데 도시락, 물병, 손수건이다. 아이들은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다닌다. 유치원에는 정수기가 없다. 세면대도 없다. 큰 물탱크에서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한 번에 3~4명씩 손을 씻고 밥을 먹는다. 화장실은 선생님 집 뒤 쪽에 있는데 쭈그리고 앉아서 용변을 봐야 한다. 교욕 환경이 이렇게 열악한 건 우리 동네가 시골이라 그런걸까, 스리랑카라서 그런걸까. 한국과 비교하면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하루 하루 잘 적응하며 지내는 아이들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다.


스리랑카에 와보니 매일 도시락과 전쟁을 치뤄야 했다. 한국에는 워킹맘이었고, 친정엄마 도움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요리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그런데 스리랑카는 매일 내 밥을 지어 먹어야 하고,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고민해야 했다. 그래서 늘 볶음밥만 싸줬다. 굴소스마저 없었으면 무엇으로 맛을 내야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암담한 분투기였다. 종종 시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바리뿌(렌탈콩요리)를 넣어주기도 했지만 늘 밥과 반찬을 남겨왔다. 이럴거면 하원한 뒤에 집에서 먹고 싶은 걸 먹으라고 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는 상황에 정말 힘들었다.


한국에 돌아와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도시락을 안 싸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군대. 상관없이 맛있는 식사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며 핸드폰을 하는 첫째가 '야~ 오늘 식단은 이거래!'라며 같은 학교에 다니는 둘째, 셋째에게 식단을 읊어준다. 스리랑카에 돌아가면 다시 시작될 도시락 전쟁.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하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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