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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 Apr 24. 2022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었던 것, 엄마

스리랑카에서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보다

코로나 19의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꽤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던 목욕탕에 갔다. 우리 식구만 6명. 그리고 아버지와 남동생까지 하니 도합 8명이다. 어른 4명, 아이 4명이 저녁에 우르르 몰려가 목욕도 하고 찜질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코로나 여파인지 찜질방은 폐업해서 목욕만 가능하다고 하여 여자 셋, 남자 다섯으로 쪼개져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서둘러 목욕을 하러 간다고 저녁조차 챙기지 못한 남편과 남동생. 얼른 가서 생선이라도 구워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때마침 감자탕집을 지나게 되어 외식까지 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신이 난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노래를 부르며 감자탕집으로 줄줄이 들어가는데 친정 엄마가 생각났다. 안산에 사는 큰고모가 인천에 사는 작은 할머니를 뵈러 간다고 오신다는 연락에 갑자기 엄마도 함께 가게 되었다. 평소 같으면 잠깐 얼굴만 비치고 가족들 저녁 챙기러 오실만한데 아빠가 하룻밤 자고 오라고 하여 목욕도, 외식도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목욕하러 오기 전에도 남편 밥을 챙길 것이냐, 안달볶달 하는 애들을 챙길 것이냐. 저울질하며 친정엄마에게 전화했었다.


"엄마! 이럴 때 외박을 하면 어떻게 해. 나는 외박해도 되지만 엄마는 안 되지."라고 했더니 엄마는 해가 져서 더 눅눅해지기 전에 밖에 내다 건 빨래부터 걷어두고 목욕하러 가라고 하셨다. 나 또한 엄마의 부재가 못 마땅해서 전화했다기보다는 갑작스러운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 괜히 시샘하는 투가 되었던 거 같다. 감자탕집에 들어가기 전에도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엄마가 없으니까 애들이 더 시끄럽게 구는데 얼른 집에 와."라고 했더니 너 애들이 원래 그런 건데 뭘 그러냐고 하신다.




워킹맘으로 아이 넷을 엄마에게 맡긴 지 11년. 참 오랜 세월을 엄마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결혼하면 몸도 마음도 부모로부터 독립이라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엄마를 살뜰히 챙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엄마에게 하나, 둘 늘어나는 아이들과 육아, 가사까지 모두 부탁했으니 말이다. 제대로 밥 한 번 지어본 적 없고, 제대로 빨래나 청소 한 번 해본 적 없으니 사실상 엄마에게 자식은 나와 동생뿐 아니라 손주 넷까지 도합 여섯 명일 것이다.


늘 불평하지 않고, 당연히 자신이 품어줘야 한다는 넓은 마음에 기대어 살아왔지만 내게도 위기는 있었다. 바로 스리랑카에서의 1년 7개월의 삶이다. 고작 1년 7개월이었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엄마'가 되었었다. 워킹맘을 핑계 댈 수 없는 상황. 오로지 집에서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해야 하는 전업주부가 되었던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아이들을 유치원에 잠시 보내 놓고 1시간 만에 장을 봐오는 일 외에는 늘 집에만 있었다. 시댁에 얹혀사는 상황이었으니 육아는 시누이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생전 처음 하는 가사는 정말 힘들었다. 매일 도시락을 싸야 하고, 장을 봐야 하고, 삼시 세 끼를 챙겨 먹어야 했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반찬은 늘 오이김치 또는 무김치였고, 국은 미역국, 북엇국, 감잣국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는 삶은 닭과 죽, 볶음밥 정도가 주식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니 참 못난 엄마였다.


친정 부모님과 막내

그때는 아이가 셋이었고, 막내는 시누이들이 키워주다시피 했고, 큰 아이 둘도 자기 앞가림은 하는 유치원생들이었지만 나에게 '엄마'로서의 역할은 너무 컸다. 이미 한국에서 엄마의 도움을 받아가며 예비엄마, 초보 엄마 딱지를 떼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깨달았었다. 그러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넷째를 낳고 키우면서 또다시 워킹맘이 되었고, 5년이 흐른 지금. 나는 여전히 초보 엄마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갑작스러운 친정엄마의 부재는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목욕과 외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친정엄마 집을 정리하고, 우리 집을 정리하고 청소하다 보니 12시가 지났다. 모두가 잠든 밤. 투덜투덜 거리며 밤늦은 일거리에 몸살을 앓는 세탁기 소리만이 들려온다.


우리 엄마는 자식이 집에 오지 않으면 몇 시까지고 앉아서 기다리고, 아버지의 새벽 출근 때문에 매일 4~5시에 일어나며, 세 아이를 초등학교에, 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들어온다. 그때부터 쉬는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집안을 치우고, 여유가 생기면 우리 집의 빨래까지 가져다가 세탁하고, 뒷마당에 널고, 빨래를 개고. 어질러진 우리 집을 청소해주기도 한다. 너무 당연해서 고마움조차 잊었다가 비로소 깨닫게 되는 밤이다.


나는 스리랑카에 돌아가면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할 '엄마'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막막했었는데 나도 우리 엄마처럼 살아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처럼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엄마'로서의 삶이 버겁게 느껴져 포기하고 싶어질 때, 그때마다 나는 나의 엄마를 되새기면 된다. 우리 엄마는 나보다도 훨씬 강하고 자애로우며 인내하고 사랑하는 엄마니까. 나도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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