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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 May 06. 2022

마흔, 불혹이 준 선물

다이어트를 도전할 용기

불혹, 不惑

마흔을 일컫는 말. 불혹. 아닐 불(不)과 미혹할 혹(惑)이 합쳐져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쉽게 세상 일에 홀리지 않고 또렷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음을 의미한다고 한다고 하는데 인생 절반을 살아보니 많은 것들을 점검하게 되었다.


사실 횟수로는 아직 마흔을 채우지 못했다. 빠른 84년생이라 친구들은 이미 마흔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 39살이다. 그마저도 만 나이가 없어진다면 불혹에 도달하기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에서는 불혹이 된 나이를 계수하며 지나온 40년을 돌이켜보았다. 너무 빠른 인생의 순간들. 특별하게 이룩한 성과는 없지만 무난하게 잘 살아온 결과, 지금의 내가 있으니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남은 시간들을 맞이하려 하니 문득 두렵기도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비친 건 99.5kg의 몸이었다. 갑자기 살이 불었다면 불편해서라도 다이어트를 결심했겠으나 비만을 부르는 세포들은 자연스럽게 한 몸이 되었고 빅사이즈 쇼핑이 일반화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다이어트의 목적조차 상실하게 되었다. 옷이라도 안 맞으면 한 번쯤 더 도전했을 테지만 110 사이즈가 되어도 맞는 옷이 있고, 디자인도 나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빅사이즈 모델들이 더 예뻐 보이기까지 하니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다이어트였다.


그러나 마흔을 앞둔 39살의 어느 날. 나는 '그냥 아플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초등학생 때에는 축농증으로,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갑상선 기능 항진증으로, 대학청년 시절에는 치아 부식과 발치로 고생을 했지만 독감조차 잘 안 걸리는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유 없이 아플 수 있다는 걸 체험하고 나서는 덜컥 겁이 났었다. 내가 중년을 준비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과 장기의 손상이 아니라 혈액에서부터 몸이 나빠질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어 피검사를 한 결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는 진단을 받았다. 콜레스테롤이 높다는 말은 혈액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고, 조만간 당뇨와 고혈압과 기타 질환들이 하나씩 발생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의미가 된다. 비만 체형으로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콜레스테롤은 그런대로 평균치를 맴돌았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망가져버린 것일까.


내 나이 벌써 40인데 남은 인생을 버틸 에너지는 충분한 것인가. 지금이라도 다이어트에 도전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이어트는 단순히 몸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라 여겨 어떤 면에서는 터부시 했다. 이 정도 체형에 이 정도 외형이면 됐다고 생각했다. 살이 빠질 때마다 '다이어트해?'라고 묻는 사람들의 시선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아니더라. 쉽게 세상 일에 홀리지 않고 또렷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나잇값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렷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라. 단순히 쉽게 세상 일에 홀리지 않는 나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혜로워야 하는 나이라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내 몸에 대한 또렷한 판단. 내 삶에 대한 또렷한 판단. 그리고 내린 결정은 '다이어트'였다.


쉽게 도전하고 쉽게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는 인생을 40년이나 살았으면 되었다. 이제는 진득하게 인생에 대하여 도전하여 맞붙어 원하는 바를 이뤄낼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으니 불혹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기대도 되는 마흔에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마흔, 부족이 내게 준 선물, 다이어트.

4월 1일에 시작해 4월 30일까지 6kg를 덜어내고 나니 몸이 참 가볍다. 식사를 조절하고, 전문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으면서 시작한 일이라 쉽게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매 순간 유혹이다.

먹고 싶은 유혹과 먹기 싫은 유혹 사이를 오가며 스스로를 다그쳐야 할 때도 많다. 아무리 좋은 보약이 있어도 먹어야 내 것이 되고, 아무리 좋은 다이어트 방법을 알고 있어도 행하지 않으면 절대 살이 빠질 수 없다.


한 달 동안 6kg라는 기적을 이뤄내고 나니 5월 1일부터는 금세 마음이 바뀌었다. 조급해지기도 했다. 4월보다 빠지는 속도가 느려진 것 같고, '이 정도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타협점이 점점 많아진다. 어젯밤에도 갑자기 남동생이 사 온 KFC 치킨. 살코기만 먹으면 당질 양이 적어서 괜찮지만 시간이 문제다. 애써 참아보지만 결국 껍데기를 발라내고 살짝 양념이 밴 살코기를 한 덩어리 먹어버렸다. 그리고 내일은 하루 종일 두유로만 배를 채워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아침부터 치킨과 모닝빵을 먹었다. 저녁에 외식하러 가는 식구들을 배웅하며 샐러드로 배를 채웠지만 어딘지 모를 죄책감이 밀려온다.


불혹답게 사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인가. 아직 39살이니 불혹이 되지 않았다고 핑계 대고 싶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다이어트다.



‘혹(惑)’자는 ‘或(혹자 혹’)과 뜻이 통용되는데 或은 ‘戈’와 ‘口’, ‘一’로 구성된 한자다. ‘戈’는 고대 사회에서 무기로 쓰인 ‘창’을 표현한 것으로 여기에 ‘성벽’을 뜻하는 ‘口’와 ‘경계’를 뜻하는 ‘一’이 더해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언제나 국방을 강화해야만 했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 이후 ‘或’은 이렇게 성을 경비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혹시 모를 적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의미가 생겼고, 그로 인해 ‘혹시’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게 되자 ‘囗’을 더해 ‘國’으로 분화됐다. -중앙 선데이 기사 중에서 발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언제나 국방을 강화해야만 했던 '나라'를 가리키는 뜻을 품고 있는 혹(惑). 성을 경비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혹시 모를 적의 침입에 대한 의미가 생겼다는 '惑'이라는 어원을 보고 나니 더욱더 마음을 강화해야겠다. 다이어트는 내 인생을 바꾸는 기회다. 그러니 불혹의 다이어트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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