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Y Jun 27. 2022

누구처럼이 아니라 나처럼

2022.1.7

회사의 일을 두고 묵상하는 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콘텐츠를 만들면 생명의말씀사처럼 큰 기독교 회사로 성장시키는 게 목표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왜?'이다. 우리는 회사를 설립할 때에 롤모델을 정한다. 핸드폰 제조업이라면 삼성, 애플을 떠올리며 '우리 회사는 삼성처럼!'이라는 꿈을 꾼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기 때문에 충분히 꿈꿔볼 만한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분야든 세계적으로 1, 2위를 다투는 회사는 존재한다. 회사의 경쟁력이 곧 나라의 경쟁력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한 기업이 갖는 위력과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꿈은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왜? 굳이!'라는 단서를 붙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세상에 하나 뿐인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은 60억 명의 사람을 지으시면서 단 한 명도 같게 짓지 않았다. 생김새가 비슷하고, 성격과 성향, 입맛과 취향이 비슷할 수는 있지만 나노 단위의 유전자까지 같게 하지는 않으셨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복제인간'이 탄생할 수도 있겠지만 '크론'으로 만들어진 세상이 오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란 믿음도 있다.
나는 중직자 24를 기획하면서 시작은 롤모델을 찾는 것부터였다. 임직식을 준비하며 목사님께서도 성경 속에서, 역사 속에서, 교회 안에서 롤모델을 찾아보라고 하셨기 때문에 책을 집필할 때에도 근거 자료로 충분히 검증된 롤모델의 이야기를 엮는 게 수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존재가치와 동기부여는 '롤모델'에 있지 않았다. 후루카와 다케시의 저서 <인생을 지배하는 습관>에서는 '동기에 자극을 주는 포인트는 저마다 다르다. 동기가 생기는 과정을 알면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의욕을 일으킬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불을 지피는 방법을 알면 의욕은 금세 올라간다. 나를 깨우면 자연히 의욕에 불이 붙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깨우는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아침형 인간을 예로 들어보자. 아침형 인간이 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에서는 이와 같이 말한다. 새벽공부가 아침형 인간의 정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새벽공부에 의욕을 내는 것은 아니다. 조기 품절되는 빵집이 의욕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버스를 좋아했다. 답답한 지하의  컴컴한 창문을 바라보는 것보다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을 보는 게 좋았기 때문에 시간만 여유롭다면 일부러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러나 회사를 옮기면서 매일 4번이나 지하철을 환승해 편도 2시간을 길에서 보내게 되었다. 참으로 긴 시간이다. 서서 가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다. 책을 읽었고, 드라마를 봤다. 멍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묵상을 하고 글을 쓴다. 일부러 공항철도 3대를 보내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는데 원하는 시간대의 지하철을 탈 때까지 줄을 서서 묵상을 한다. 그리고 주제가 떠오르면 9호선 완행을 타고 1시간 동안 글을 쓴다. 일부러 만드려고 한 건 아니다. 출근을 해보니 루틴이 생겼다. 어느 시간대에 지하철을 갈아타야 10시에 맞춰 출근이 가능한지를 가늠하게 된 것이다. 계산해보니 집에서 7시 45분에는 나서면 되겠다 싶어 그때부터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강단 말씀을 묵상하며 글을 쓰는 행복을 맛본 뒤에는 지하철 서밋 타임을 즐기게 되었다.
사람마다 동기부여가 다르고, 습관을 바꾸는 스위치를 켜는 방식이 다르다. 나에게는 중직자 24라는 프로젝트를 지속해야 할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사람들과 팀을 이룬다고 지속하지는 않는다. 천성이 혼자가 편한 사람이다. 그러나 팀을 꾸린 것은 내게 담겨진 은혜들을 흘려보낼 창구가 있어야 나 또한 성장하고 지속하기 때문이었다. 나와는 성격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 모험이었다. 때로는 내 생각에 비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런 환경을 통해 지속할 외적 동기를 갖추게 된 것이다.
하드웨어적인 구속력을 갖춘 팀을 얻고 나니 중직자 24의 방향에 대해 더 깊이있게 고민해볼 수 있게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누구처럼'을 말하는 중직자 24를 쓰고 싶었던 걸까. 아니다. 나는 내 존재가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다. 중직자로서도 마찬가지다. 직함과 직책, 직분의 이름은 같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부여받은 '나'는 여전히 유일무이하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나만을 통해 세상에 말하고자 하시는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일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에 '중직자'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에서 찾아내고 누리고 전달할 '나의 것'을 찾는 기록을 정리하려는 것이다.
나의 24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찾아 누리는 것이다. 이미 받은 것이다. 창세 전, 영세 전에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내게만 주신 것이다. 그것을 중직자로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과 역사와 교회의 롤모델을 닮아갈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롤모델의 인생을 걸어가면 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모델이 되자'는 건 아니다. 역사 속의 그들이 스스로 모델이 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남겨둔 흔적을 되짚어 보니 배울 점이 충분하고, 후대에게 물려주어도 될만한 모습이 있었기에 연구하고 전달하는 게 아닌가.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하루의 삶을 누렸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찾고 누리고 전했을 뿐이다. 기록으로 남겼을 뿐이다. 그게 성경이고, 역사이다. 나 또한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처럼' 살기 바라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어떤 부분에 나처럼 살아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린 결론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평안하고 행복한 삶'이다. 짧은 생이지만 살아보니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자유하고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겠더라. 세상의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던 공허가 그리스도만으로 채워지더라. 그래서 말할 게 이것밖에 없는데 이게 전부라는 것이다.


나는 말주변이 없으니 글을 써서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삶에 행하셨던 기적들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겨울 만큼 긴 글에, 시답잖은 꿈쟁이 같은 나일지라도 괜찮다. 창37:1-11의 말씀처럼 요셉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었던 야곱이 내 주변에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바로가 눈여겨보았던 요셉을 보고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오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41:38-39)'라고 했다. 롤모델은 스스로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다. 타인이 보고 '그가 정말 롤모델이네.'라고 말해야 비로소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최태식 목사님을 정말 롤모델로 삼고 있다. 목회자의 롤모델이며, 인생의 롤모델이다. 왜 그를 롤모델로 보고 있는가. 중직자는 유일하게 목회자와 같이 기름 부음을 받는다. 목사님들이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할 때에 성령이 임하여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 귀한 직분 받은 자이다.
중직자가 되고 보니 할 게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목사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고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나서서 선물을 챙기지도 못하고 웃음을 드리지도 못하는데. 그래서 기도했다.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6:2-4)'
여기에 답이 있었다.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게 해 드리면 된다. 내 행복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오듯이, 목사님의 행복도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다.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시는 일에 힘쓰실 때 그들은 행복하다.


그렇다면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3-5)'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생각하며 쓴 편지에 있다. 사랑하는 디모데를 보는 것으로 바울이 기쁨이 가득해진다고 했다. 목사님도 마찬가지다. 제자를 볼 때에 그의 기쁨이 가득해진다. 강단의 말씀을 따라 응답 24, 나의 24를 누리는 중직자를 볼 때 행복해진다. 그리고 중직자 또한 목사님과 마음이 통할 때에 행복해진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1:13-14)'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성경의 말씀이다. 강단의 말씀이다. 그리고 호산나교회에서는 전도자의 삶이다. 따라서 목사님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가장 깊이 새겨듣고 가장 정확하게 누리고 전해야 할 사명은 중직자에게 있다. 따라서 누구보다 목사님을 닮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가치는, 내 인생의 목표는 '나처럼 너도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해라.'가 되어버렸다. 누가 가장 많이 쓰던 말인가. 목사님이 쓰시던 말이고 지금도 쓰시는 말이고, 돌아가실 때에도 유언으로 남기실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중직자로서 어떤 유일함을 누리며 살 것인가. '오직 그리스도'다. 이거 외에는 할 말이 없다. 나는 참 모자란 사람이다. 스스로 없다, 부족하다 여겼기에 상처밖에 없었다. 성품상 누구를 탓하지도 못하니 '내가 못나서'라는 말을 안고 살던 사람이다. 그러한 내가 '나처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장문의 글을 써서 내 마음을 전하고 있다. 왜?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6)' 이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금 주에 <237 전도를 위한 나의 24(시1:1-6)>를 통해 왜 걸림돌을 제1의 미션으로 주셨는가 자세히 봐야 한다. 우리는 자칫 오해한다. 지금의 내 모습이 과거에서 비롯되었으니 미래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보좌의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형상 가진 하나님의 자녀이다.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하나님의 생기를 가진 자이다. 237 나라의 빛이 될 수 있는 에덴의 축복을 가진 자이다. 이러한 자가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지 알고 그리스도께 맡기고 말씀 안에서 인생을 편집할 때에, 임마누엘을 누릴 때 어떻게 되는가. 주변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보여 답을 주게 된다. 모든 사람이 이해되어 갈등하지 않고 도와줄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이 찾아오는 플랫폼이 되어 전도가 되고 제자가 세워진다.
그러니 누구처럼이 아니라 나처럼 살라고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크고 놀라운 창조주 하나님이 내 입을 빌어 말하시기 때문이다. 나를 파수꾼으로, 영적 대사로, 영적 의사로 사용하시는 주께서 오늘 내 손가락을 빌려 말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중직자가 바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쓴 글을 여러 번 읽고 또 읽으며 치유도 받고 감탄도 하고 눈물도 흘린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물, 콧물 난리가 났다. 왜? 내가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안의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격하고 감동하고 행복하고 기쁘다. 하나님 안에 있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치가 너무 귀하고 빛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33:29)'
중직자 24, 5인 1조 팀은 어디로 가야 할까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늘 점검하고 기억할 것은 '응답 24를 누리고 있는가.'이다. 그리고 그 응답 24가 내 삶에서 확인되는 만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나처럼 긴 글이 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로 전하는 것이 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글보단 그림이 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남기는 중직자 24에는 형식이 없다. '글만 넣어야!' 아니다. '그림도 넣고' '사진도 넣고' 우리의 모든 기록이 작품이다.

작가의 이전글 지하철에서 서밋 타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