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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 Jun 27. 2022

서밋의 하루

2022.1.13

교회 24를 누리며 렘넌트성인식을 두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그들에게 증인으로 선다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앞서 간 자로 무엇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인가.
세상적으로 특출난 학벌도, 인맥도, 지식도, 자격증도 없으니 그들 앞에 설 자격이나 있는 걸까. 자문할 때마다 위축되고 부끄러워졌다. 그러니 스펙 좋으면서 믿음도 좋은 전문인, 렘넌트 선배들이 잘 하도록 배경이나 되자며 한 발 물러서 있었다. 학부모가 되었으니 우리 아이들을 위탁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영적 서밋, 기능 서밋, 문화 서밋이라는 것이다. 남의 거 아니고 내거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거라 하시니 나 자신부터 설득할 근거가 필요했다. 
전도자의 삶을 살면서 발견하게 되는 건 하나님의 말씀은 진행형인듯 보이지만 이미 완성형이라는 것이다. '증인이 되리라'이지만 이미 나를 증인으로 내정해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밋도 마찬가지 아닐까. 서밋이 되라가 아니라 되리라이며 이미 서밋이라고 말씀하신 건 아닐까. 그러니 나는 이미 서밋인 것이다. 

나는 이미 영적 서밋이다. 이 세상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만유이시며 누구보다 높으신 서밋이다. 만유는 헬라어로 파스라고 하며, 직역하면 '모든 것'이다. 우주만물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인간이 경쟁하며 서밋의 자리에 올랐다한들 이 작은 지구의 어느 한 나라의 한 지역의 한 회사 수준의 서밋인 것이다. 그러니 영적 서밋의 개념을 크게 봐야 한다. 성경 읽고 정시예배하고 훈련 잘 받는 사람이 영적 서밋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된 자가 이미 서밋이다. 그러니 영적 서밋이 되라고 할게 아니라 '정체성'을 찾아줘야 한다. 만유이신 하나님의 자녀인 영적 서밋의 정체성을 찾아줘야 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26~30)'
모든 것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창조된 우리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 번성, 충만, 정복을 주셨다. 이미 우리는 이 세상의 서밋이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 세상에 말하는 서밋에 기준을 두어 쟁취하려 한다. 대기업이나 국가기관 등 유명한 자리에 오르지 않으면 실패한 줄 착각한다. 서울권 대학에 가면 성공이고 지방 대학 가면 실패라고 여기며 나태해지기도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영적 서밋이기에 주신 것을 찾아 누리는 것이다. 어떻게 찾느냐. 매주 강단을 통해 찾는 것이다. 갈보리산 그리스도, 감람산 하나님 나라의 일, 마가다락방 성령의 역사를 내 것으로 누리는 것이다. 이미 확정된 약속을 붙잡고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미 확정된 미래를 비전으로 확인하고 다시 언약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작이 자신으로 맞춰지는 순간, 세상과 똑같이 물질, 성공을 위해 아둥바둥거리게 된다. 우리의 모든 순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어야 한다. 

기능 서밋도 마찬가지다. 달란트는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찾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에게 주신 고유한 달란트를 찾는 것이다. 성품, 인격, 장점, 단점, 강점, 취약점 모든 것이 달란트이다. 타인과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달란트이다. 무엇을 위한 달란트인가. 먼저는 하나님을 누리는 달란트이다.
나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마16:16~19을 묵상하며 반석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된 나를 찾아 누린다. 음부의 권세가 가득한 세상으로 나가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천국열쇠를 확인한다. 언제든지 기도로 하늘 보좌와 닿을 수 있는 영적 서밋된 나를 찾아 누린다. 그리고 인천1호선, 공항철도를 타는 동안 묵상하고 김포공항역에서 9호선 완행을 타면 1시간 동안 주신 은혜를 기록한다. 신분당선으로 갈아타면 잠시 쉬며 직장에서 할 일을 정리한다. 출근해 주변을 정리하고 업무를 하고 퇴근한다. 퇴근길에는 밀리의 서재로 책을 읽는다. 때론 드라마도 본다. 집에 돌아와 집안일도 하고 개인업무를 하다가 애들을 재우고 하루를 정리하는 서밋타임을 갖는다. 문제, 갈등, 위기들을 강단말씀에 두고 하나님계획을 찾는다.
이러한 내 삶은 글 쓰는 달란트를 통해 기록으로 남겨 둔다. 영적으로 신뢰하는 전도자들에게 보내어 공유한다. 하나님을 누리며 '디자인'이라는 기능으로 전도와 선교에 쓰임 받도록 기도한다. 새로운 일을 맡을 때마다 거듭 갱신하며 기술력도 키워간다. 전도와 선교에 디자인 기능은 반드시 쓰일 것인데 내 실력이 부족하니 학교도 다니고 인터넷 강의도 듣는다. 그리고 행복해한다. 나를 선택해 의뢰해준 고객에게 만족을 주고자 노력하는 모든 순간이 즐겁다. 고객이 고맙다고 할 때, 참 기쁘다.
기능 서밋은 환경에 기준을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게 주신 달란트를 찾아 누리는 이곳에서 기능 서밋인 것이다. 요셉은 언제 어디서나 영적 서밋, 기능 서밋, 문화 서밋이었다. 노예일 때도, 죄수일 때도 서밋이었다.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서밋이라는 게 아니다. 왜 그럴까. 이미 그는 창37장에 자신이 영적 서밋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현장에서 가장 신실하게 성실하게 일하였다. 그는 보디발집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 애굽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종된 자로서 보디발과 바로를 위해 일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다.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일한 것이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3:22~25)'
그러니 가는 현장마다 인정 받고 기능 서밋이 된 것이다. 기능 서밋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를 찾는 것이다.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내 업의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생명 살리기 위해 달란트를 개발하고 그 분야의 전문인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화 서밋은 무엇인가. 싸우지도 않고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세상은 주도권 싸움이다. 누가 얼마나 핵심 기술과 자원과 인력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이것이 많은 나라가 강대국이 되고 세계의 기준이 된다. 경제를 통제하기도 한다. 문화를 주도하기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에 '나혜석'이라는 인물이 소개되었었다. 1920년대의 사람으로 신여성이었다. 당시 세계일주를 했고 최초의 서양화가였다. 모성애, 시월드, 간통죄 등에 대하여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발언으로 경성을 뒤흔든 세기의 여인이다. 세계일주 중에 외도를 하기도 했다. 혼전동거에 대해 거침없이 피력하기도 했다. 이유는 세계에 나가보니 이미 그렇게 여성들이 결혼제도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다. 192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초라한 말년을 보내었지만 그녀가 남긴 그림과 글은 지금도 연구되고 있다. 지금 같이 소수자들의 인권을 내세우는 때에 그녀는 시대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문화를 바꾸는 것은 옳다고 여겨지는 일을 신념 있게 죽기까지 지켜내는 자들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명을 어디에 근거할 것이냐는 것이다.
영국의 국회위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일생을 바쳐 완수해야 할 두 가지 사명을 주셨는데 하나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국 사회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다."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1787년 10월 28일, 그의 나이 27살 때이다. 영국의 수익원의 1/3이 150년간 이어져온 노예수송에 있을 때이다. 이미 정치권이 묵인한 경제의 흐름이었다. 이것을 바꾸고자 한 윌리엄 윌버포스를 사람들이 가만 두었겠는가. 두 번에 걸친 암살시도와 갖은 중상모략과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수많은 뜻있는 목사들과 평신도 리더들의 도움을 받으며 기나긴 싸움을 이어갔다. 왜소한 체격이었던 그는 150번이나 되는 대국회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마침내 1833년 7월 27일. 그가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운지 46년만에 영국 국회는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가 46년이나 싸운 이유가 무엇인가.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데, 노예제도는 분명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하는 일이다.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어두워 노예제도를 용인하고 있다니, 이러고도 오래 살아남은 제국이 역사에 없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한 신념이 맞다고 하면 생을 걸고 개혁하기 위해 도전한다. 흐름을 바꾸는 것이다. 문화는 곧 흐름이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물을 막을 수 없듯이 시대의 흐름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문화 서밋인가. 복음으로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문화 서밋이다. 무엇으로 바꾸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성경을 통하여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237 전도를 위한 교회 24(행2:1~4)>을 통해 근본으로 돌아가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 성령 충만을 누리는 것이다. 이미 영적 서밋, 기능 서밋, 문화 서밋이다. 그러니 미션을 통해 교회와 사명을 이해한 하나님 쓰시는 자로 문제, 갈등, 위기를 통해 그릇을 넓혀가는 것이다. 세상 서밋 앞에 설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들 앞에 우리가 서는 날은 반드시 온다. 그 날에 무엇을 말할 것인가. 지금 준비하는 것이다. 그 날의 응답을 미리 보며 오늘을 사는 것이다. 이 응답의 중심에 선 내가 서밋이다.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41:14~16)'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41: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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