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1,400년의 대서사: 제2부

제2부: 우마이야왕조시대(A.D. 661-750)

by 장유철

1. 우마이야왕조의 성립과 세습왕조의 확립


(1) 무아위야 1세와 세습왕조의 서막


A.D. 661년에 알리(Ali)의 암살로 정통 칼리프시대가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자, 당시 시리아 총독이었던 무아위야 1세(Mu'awiya I)가 이슬람제국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즉, 무아위야 1세는 그의 정치적 요충지인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Damascus)를 근거지로 삼아 우마이야왕조(Umayyad Dynasty)를 개창하였습니다.


이는 정통 칼리프시대의 상징이었던 “슈라(Shura: 합의)에 의한 칼리프의 선출” 방식이 “가문에 의한 세습”방식으로 바뀌는 역사적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즉, 무아위야 1세는 비록 초기 이슬람 움마(Ummah)의 평등정신을 희석시켰으나, 강력한 카리스마와 정치적 술수로 흩어진 이슬람제국을 하나로 결집하는 세습왕조의 기틀을 단단히 다졌습니다.


(2) 다마스쿠스시대와 중앙집권화의 기틀


우마이야왕조는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이를 위한 파격적인 행정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우선 이슬람제국 전역의 조세행정과 공문서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하여, 아랍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채택하여 언어적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비잔틴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화폐를 사용하는 대신, 이슬람제국의 고유한 화폐인 디나르(Dinar)와 디르함(Dirham)을 발행함으로써, 경제적 주권을 확립하고 독자적인 재정기반을 구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 다마스쿠스는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하는 화려한 국제도시로 변모하였습니다. 즉, 이곳에 세워진 우마이야 대사원(Umayyad Mosque)은 이슬람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이슬람제국의 위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시각적 상징물이자 이슬람문명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2. 이슬람제국의 영토팽창


(1) 영토팽창의 세 가지 동인


우마이야왕조가 전격적인 영토팽창이 가능했던 것은 강력한 내적 동력과 유리한 대외적 요인이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부연하면, 우마이야왕조의 광활한 영토팽창의 구체적 동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군국주의체제로 전환한 우마이야제국의 군대는 사막에서 단련된 특유의 기동력과 종교적 결속력을 바탕으로 우마이야제국 건설의 거대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둘째, 당시 중동의 패권국이었던 비잔틴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오랜 소모전으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던 대외적 상황입니다. 셋째, 우마이야제국에 편입된 두 제국 하에서, 가혹한 세금과 종교적 박해에 신음하던 피정복민들이 이슬람제국을 새로운 대안으로 받아들인 점도 영토가 급격히 확대되는 데 한 몫을 하였습니다.


(2) 3대륙에 걸친 대제국


우마이야왕조가 이슬람사에서 이룩한 가장 독보적인 업적은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격적인 영토팽창에 있었습니다. 즉, 우마이야왕조시대에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험준한 지형을 돌파하여 인더스강 유역을 넘어섰고, 파미르고원을 지나 당나라의 영향권과 맞닿는 지점까지 그 판도를 확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광활한 지중해연안을 휩쓴 뒤,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유럽의 관문인 이베리아반도까지 영토가 확장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마이야왕조시대의 영토팽창은 과거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이룩했던 영토보다 질적, 양적으로 능가하는 규모였으며, 이는 지중해를 이슬람의 내해로 변모시킨 거대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마이야제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개 대륙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며, 명실상부한 의미의 이슬람제국을 건설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3. 예루살렘의 바위돔(황금돔) 사원


우마이야왕조는 종교적 정통성을 확고히 수립하기 위해 찬란한 건축물들을 건립하였습니다. 그 정점은 바로 성지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세워진 바위돔(황금돔) 사원이었습니다. 본래 솔로몬 성전이 있던 이곳은 기독교가 국교인 비잔틴제국이 유대교를 모욕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오물과 쓰레기를 내다 버리던 폐허이자 조롱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A.D. 691년(헤지라 72년), 제5대 칼리프 압둘말리크는 이 굴욕의 쓰레기더미를 정화하고, 그 위에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찬란한 바위돔(황금돔) 사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이는 외부적으로 기독교세력에 대한 이슬람세력의 문명적 우위를 선포하는 승전보였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당시 메카의 반대세력에 맞서 예루살렘을 새로운 이슬람의 구심점으로 삼으려 했던 우마이야왕조의 고도의 통치전략이라고 하겠습니다.


4. 우마이야제국의 멸망의 씨앗


(1) 아랍인의 우월주의와 마왈리의 불만


우마이야제국의 화려한 번영 뒤에는 치명적인 멸망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즉, 우마이야제국의 지배계층은 혈통중심의 아랍인의 우월주의를 고수하며, 비아랍인의 개종자인 마왈리(Mawali)를 이등시민으로 간주하여 철저히 차별하였습니다. 이러한 마왈리에 대한 차별은 우마이야제국의 광활한 영토를 하나로 묶어주던 이슬람 공동체의 결속력을 근본부터 와해시키며, 우마이야제국 내부의 균열을 야기하는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하였습니다.


부연하면, 마왈리는 이슬람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과 달리 여전히 무거운 인두세(Jizya)와 지세(Kharaj)를 부담해야 했고, 고위 관직등용에서도 원천적으로 배제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왈리에 대한 차별은 “모든 무슬림은 형제이며 평등하다”라는 이슬람의 근본정신을 저버린 것으로서, 우마이야제국 곳곳에서 마왈리를 비롯한 피지배계층의 분노를 자극하며 저항의 불씨를 지피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2) 종파갈등의 심화와 카르발라의 참극


우마이야제국 몰락의 또 다른 중대 요인은 이슬람제국 내부의 뿌리 깊은 시아파(Shia)와 수니파(Sunni)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었습니다. 알리의 혈통을 계승하려는 시아파는 수니파인 우마이야제국을 무함마드 가문을 배신하고 권력을 찬탈한 불의한 집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수니파에 대한 시아파의 적대감은 A.D. 680년,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우마이야군대에 의해 처참히 학살당한 “카르발라의 참극”을 기점으로 되돌릴 수 없는 원한으로 고착화되었습니다. 즉, 이러한 후세인의 순교는 시아파에게 강력한 저항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우마이야제국의 도덕적 정당성을 부정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심한 갈등은 차별을 받던 마왈리의 사회적 분노와 결합하며, 우마이야제국을 뒤흔들 거대한 폭발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외된 이들의 울분은 단순히 분노에 그치지 않고 조직적인 저항세력으로 응집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슬람의 평등교리를 재건하고 무함마드 가문의 권위를 회복하겠다는 아바스가문의 기치 아래 모든 저항세력이 결집하였고, 마침내 우마이야제국은 A.D. 750년 89년 만에 장엄한 막을 내렸습니다.


5. 안달루스로 이어진 우마이야제국


비록 우마이야제국은 다마스쿠스에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으나, 그 불꽃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습니다. 아바스가문의 삼엄한 포위망 속에서, 홀로 사선을 넘나들며 살아남은 우마이야제국의 왕자 아브드알라흐만 1세는 6년에 걸친 처절한 도망 끝에, 드디어 이베리아반도에 당도하여 후우마이야왕조를 개창했습니다.


이러한 후우마이야왕조는 아바스왕조에 맞서, 우마이야제국의 영광을 안달루스에서 275년 동안 재현하며 독자적인 위대한 문명을 일구어냈습니다. 즉, 안달루스로 이어진 이 후우마이야왕조의 번영은 이슬람문명이 유럽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는 결정적 토대를 마련한 새로운 서막이 되었습니다.


초기 일슬람제국의 영토확장
우마이야제국의 칼리프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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