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1,400년의 대서사: 제1부

제1부: 이슬람 태동과 정통 칼리프시대(A.D. 622-661)

by 장유철

1. 이슬람의 태동(A.D. 622-632)


1) 비단길의 봉쇄와 메카의 부상


A.D. 7세기 초, 당시 서구와 중동 세계의 두 거대 세력이었던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는 수백 년간 이어진 소모전으로 인해 공멸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 장기간의 전쟁은 유라시아 대륙의 대동맥이었던 비단길(실크로드)이 차단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동방의 향신료와 비단을 서방으로 운송하던 상단들은 아라비아반도 서부 해안을 따라 홍해로 이어지는 우회로를 개척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무역로의 이동은 척박한 사막도시였던 메카를 단숨에 국제상업의 허브이자, 막대한 부가 모이는 번영의 중심지로 밀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정학적으로 비잔틴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사이에 놓여 있던 아라비아반도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문명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산실이 되었습니다.


2) 부의 독점과 공동체 위기


메카에 유입된 막대한 부는 지배계급인 쿠라이시(Quraysh) 부족 내에서도 특정 유력 가문들에게만 집중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부의 편중으로 인해, 과거 유목사회의 미덕이었던 부족공동체의 상부상조정신은 자본의 탐욕 앞에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부자들은 더 이상 가난한 일족을 돌보지 않았고, 고아와 과부들은 사회적 보호망 밖으로 내몰렸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윤리의 붕괴와 극심한 빈부격차는 기존의 혈연중심의 부족체계를 탈피한 새로운 보편적 윤리와 공동체 체제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3) 무함마드의 평등사상과 움마탄생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서, 무함마드는 “유일신 앞의 인간평등(쿠란 49:13)”을 새로운 사회질서의 근본원리로 천명하였습니다. 이는 타락한 물질주의와 부족 이기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기존의 혈연중심의 부족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A.D. 622년 헤지라(Hijra: 성천)를 단행한 이후 무함마드는 이러한 평등사상을 실현할 조직체로서 메디나에 움마(Ummah)를 창설하였습니다. 이러한 움마는 혈연과 계급적 위계를 타파하고, 오직 이슬람의 교리로 결속된 인류사적 초기 국가형태였습니다. 즉, 무함마드는 자카트(희사)와 같은 제도를 통해 부의 재분배를 실현하며,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실질적인 평등사상을 구현하였습니다.


4) 아라비아반도의 최초 통일


A.D. 632년, 무함마드는 거대한 아라비아반도 전역을 평등의 기치 아래 최초로 통일하였습니다. 즉, 무함마드는 각기 흩어져 투쟁하던 유목부족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킴으로써, 아라비아반도의 역량을 한데 모았습니다. 결국 무함마드가 완수한 이 역사적 아라비아반도의 통일은 이슬람이 국경을 넘어 세계사의 전면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2. 정통 칼리프시대(A.D. 632-661)


1) 제1대 아부 바크르(Abu Bakr)


(1) 칼리프 추대와 공동체 결속


A.D. 632년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함으로써, 이슬람공동체는 구심점을 잃고 와해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해 메카를 탈출할 당시에 유일하게 단둘이 동행하여 사우르동굴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아부 바크르가 부각되었습니다. 당시 무함마드가 절박한 위기 속에서, 아부 바크르에게 “슬퍼하지 마라, 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며 건넸던 절대적 신뢰의 일화는 그가 무함마드의 가장 가까운 영적 동반자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슬람공동체는 이러한 아부 바크르의 헌신을 인정하여서, 격렬한 논쟁 끝에 그를 첫 칼리프(Khalifah)로 추대하고 이슬람공동체의 혼란을 수습하였습니다.


(2) 재위기간의 주요 업적


아부 바크르는 칼리프에 즉위하자마자, 이슬람공동체를 이탈하려던 부족들의 “배교의 난(리다 전쟁)”을 단호히 진압하였습니다. 즉, 무함마드의 사망을 틈타 과거의 부족중심체제로 회귀하려던 세력들을 단일질서 아래 묶어낸 것은 아부 바크르의 강인한 신념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부 바크르는 비록 2년의 짧은 재위를 하였으나, 그는 내부 에너지를 결집하여 시리아와 이라크 접경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는 이슬람이 아라비아반도의 로컬 종교를 넘어 세계로 비상하기 위한 전격적인 활주로를 구축한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3)생애의 종결과 역사적 유산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 제국의 기틀을 닦은 후, 무함마드의 곁을 지키던 그 소박하고 충직한 모습 그대로 A.D. 634년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의 전 재산을 이슬람공동체에 환원하며, 마지막까지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무함마드의 고결한 가르침을 실천했습니다. 아부 바크르의 죽음은 이슬람공동체의 큰 슬픔이었으나, 그가 남긴 안정된 토대는 이슬람의 황금기를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2) 제2대 오마르(Omar)


(1) 칼리프 추대와 공동체 결속


아부 바크르의 유언과 공동체의 합의로 추대된 오마르는 인류사상 가장 경이로운 영토확장을 이룬 칼리프였습니다. 오마르는 무함마드 생전에도 날카로운 통찰력과 강직한 성품으로 공동체의 기강을 바로 잡는 데 기여했던 준비된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오마르는 A.D. 622년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헤지라를 원년으로 삼아 이슬람 고유의 역법인 “헤지라력”을 제정하였습니다.


(2) 재위기간의 주요 업적


오마르는 10년간 재위하는 동안 기마부대를 활용한 신속한 이동능력을 앞세워서, 비잔틴제국의 시리아와 이집트를 점령하고 사산조페르시아를 멸망시킴으로써, 거대한 이슬람제국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마르의 진정한 위대함은 무력이 아닌 관용정책에 있었습니다. 부연하면, 오마르는 정복지의 사람들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낮은 세율의 지즈야(인두세)와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오마르의 관용정책은 당시 수탈에 지쳐 있던 피정복지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슬람군대를 무혈입성하게 함으로써, 제국의 영토가 광활하게 확장되는 결정적 동인이 되었습니다.


(3)생애의 종결과 역사적 유산


오마르는 이슬람제국의 제2대 칼리프로서 광활한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개인적 원한을 품은 페르시아출신 노예에게 새벽 예배 중 암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러한 오마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제국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으나, 그가 남긴 관용정책과 광활한 영토는 이후 수백 년간 이슬람제국을 지탱하는 강력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3) 제3대 우스만(Uthman)


(1) 칼리프 추대와 공동체 결속


우스만은 오마르 사후에 이슬람공동체의 원로들로 구성된 6인위원회의 치열한 논의 끝에 온화한 성품을 인정받아 제3대 칼리프로 선출되었습니다. 우스만은 당시 이슬람에 적대적이었던 메카의 유력한 우마이야가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초기에 전재산을 바쳐 헌신한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우스만은 거대해진 이슬람제국을 안정시키고 이슬람공동체의 결속을 이끌 적임자로 평가받았습니다.


(2) 재위기간의 주요 업적


우스만이 12년의 재위 기간 중에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은 흩어져 있던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들을 하나로 묶어 코란정본을 확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스만은 코란정본의 권위를 절대화하기 위해서, 이에 포함되지 않은 개별 판본과 암송 기록들을 모두 소각했습니다. 이러한 코란의 정전화는 이슬람이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종교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으며, 나아가 이슬람 문명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3)생애의 종결과 역사적 유산


그러나 급격한 이슬람제국의 영토가 확장되는 속에서 부와 권력이 우스만이 속한 우마이야가문에 집중되자, 이슬람 초기에 평등정신을 중시하던 무슬림 공동체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노령의 우스만은 가문 중심의 인사를 단행하며 비판에 직면했고, 결국 A.D. 656년 자신의 집무실에서 코란을 읽던 중 알리를 지지하던 반대파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이러한 우스만의 피살은 합의를 통해 칼리프를 선출하던 전통이 위협받고, 이슬람 공동체 내부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서막이 올랐음을 알리는 비극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4) 제4대 알리(Ali)


(1) 칼리프 추대와 공동체 결속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사촌인 알리는 우스만을 살해한 세력의 지지와 혼란 수습을 갈망하는 민심 속에 제4대 칼리프로 추대되었습니다. 알리는 어린 시절부터 무함마드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또한 그가 가장 신뢰한 용맹한 전사였습니다. 많은 무슬림은 알리를 통해 무함마드 시절의 순수한 움마가 다시 회복되기를 기대했습니다.


(2) 재위기간의 주요 업적


알리는 재위 5년 동안에 부패한 관료를 척결하고 무함마드 시절의 소박하고 평등한 움마를 회복하려 분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비대해진 이슬람 제국의 패권을 노리는 우마이야가문의 무아위야(시리아 총독) 세력과의 처절한 내전(피트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알리는 이러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외형적인 영토확장보다 내부의 기강을 바로잡고, 이슬람의 근본 교리를 원칙대로 실천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3)생애의 종결과 역사적 유산


알리는 무아위야와의 시핀전투에서 “쿠란의 판결에 따르자”라는 상대의 정략적 중재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알리의 강경한 지지세력이었던 카리지파는 인간이 신의 권능인 판결을 중재하는 것은 이슬람교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간주하고 진영을 이탈했으며, 결국 알리는 이들의 칼날에 피살되었습니다. 이러한 알리의 피살은 그동안 합의에 의해 선출되던 정통 칼리프시대가 막을 내렸으며, 이슬람은 권력이 세습되는 체제로 그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이슬람을 수니파(Sunni)와 시아파(Shia)라는 두 거대한 물줄기로 갈라놓았고, 이러한 분열은 이후 1,400년 동안 지속되는 이슬람역사의 깊은 상흔이 되었습니다.


초기 이슬람제국의 영토확장
쿠라이시 부족계보
초기 이슬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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