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1,400년의 대서사: 제3부

제3부 아바스왕조시대(A.D. 750-1258)

by 장유철

제1장 아바스혁명과 보편적 이슬람의 실현


1. 우마이야의 폐쇄적 혈통주의


이슬람 공동체(Ummah)는 본래 모든 무슬림의 평등을 지향하며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한 우마이야왕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랍인 제일주의라는 폐쇄적인 혈통주의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비록 우마이야왕조가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는 비약적으로 팽창되었으나, 이슬람제국의 경영철학은 보편적 가치가 아닌 아랍민족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 속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인 비아랍계 개종자들인 마왈리(Mawali)들은 극심한 소외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들은 무슬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한 2등시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들의 억눌린 분노와 실망감은 이슬람제국 내부의 깊은 균열을 야기하였고, 이슬람이 약속했던 평등이 아랍계혈통의 특권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고조되었습니다.


2. 혁명의 기치: 정통성과 평등의 결합


A.D. 750년, 이러한 시대적 갈망을 예리하게 포착한 새로운 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습니다. 무함마드의 숙부 아바스의 후손들은 “무함마드의 가문으로 권력을 되돌리자”라는 명분과 함께, 차별을 받던 모든 이들에게 “모든 무슬림은 평등하다”라는 이슬람 초심의 회복을 약속하였습니다. 이들의 외침은 정통성을 향한 갈구와 평등을 향한 열망을 하나로 묶어내는 강력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치는 차별에 신음하던 페르시아인과 중앙아시아인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A.D. 750년, 자브강(Zab River) 전투에서의 승리는 단순히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억압적인 혈통의 시대를 끝내고, 이슬람 본연의 보편적 교리로 회귀하겠다는 문명사적 선언이자 거대한 혁명의 완성이었습니다.


3. 보편적 이슬람제국의 탄생


아바스왕조의 성립과 함께 이슬람제국의 풍경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 이상 아랍계혈통은 권력을 독점하는 유일한 열쇠가 아니었습니다. 행정과 군사 요직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페르시아인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며, 혈통이 아닌 능력과 이슬람이 중심이 되는 합리적인 관료체계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또한, 아랍인들에게만 주어졌던 특권적인 면세혜택이 폐지되고, 만민평등의 조세원칙이 확립되었습니다. 이로써 이슬람제국은 아라비아반도의 아랍민족종교라는 좁은 틀을 완전히 벗어나서,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진정한 의미의 “보편 종교”이자 “범이슬람제국”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아바스왕조가 5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던 강력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4.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의 천도


제2대 칼리프 만수르는 다마스쿠스를 떠나 티그리스강 기슭에 새로운 원형도시 바그다드(Baghdad)를 건설하며 이슬람제국의 수도를 옮겼습니다. “평화의 도시(마디낫 알 살람)”라고 명명된 이 계획도시는 단순히 행정중심지를 옮긴 것을 넘어, 아랍 혈통 중심의 폐쇄성을 탈피하고 이슬람제국의 지향점을 동방의 열린 세계로 확장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바그다드는 곧 전 세계의 상인과 학자들이 모여드는 지구촌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습니다. 즉,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인재들이 모여들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이제 아바스왕조는 이 평등의 토대 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황금기인 “지혜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제2장 아바스왕조의 황금기


1. 탈라스전투: 문명의 격돌과 지식의 전래


(1) 동서양의 거대한 충돌과 고선지 장군


아바스왕조의 황금기를 연 결정적 도화선은 A.D. 751년에 중앙아시아 탈라스강 유역에서 벌어진 대격돌이었습니다. 이 탈라스전투에서 아바스군대는 동양의 패권국인 당나라의 대군과 운명적으로 맞붙었습니다. 당시 당의 원정군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은 고구려 유민출신의 불세출의 명장 고선지 장군이었습니다.


비록 고선지 장군은 이 전투에서 동맹군이었던 카를루크족의 배신으로 패배하였으나, 그의 행보는 단순히 한 전쟁의 승패를 넘어 동서양 문명사가 교차하는 거대한 통로를 열었습니다. 고구려의 혈통을 지닌 고선지 장군이 이슬람군대와 맞붙은 이 탈라스전투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넘어, 아시아와 중동이라는 두 거대 문명이 직접적으로 충돌하며 서로의 실체를 확인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제지술의 전파와 기록의 혁명


고선지 장군의 원정군에 포함되어 있던 숙련된 제지기술자들이 포로로 잡혀 바그다드로 압송되면서, 인류사의 물줄기는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을 통해 전해진 중국의 제지술(후한의 채륜)은 당시 지식의 매체였던 값비싼 양피지와 파피루스를 빠르게 대체하며 기록의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값싸고 질 좋은 종이의 보급은 지식의 대량적 복제와 영구적 보존을 가능케 하였고, 이는 곧 소수 특권층이 독점하던 정보를 대중의 영역으로 확산시키는 지식의 대중화를 촉진하였습니다. 고선지라는 인물을 매개로 한 이 탈라스전투는 역설적으로 아바스왕조를 인류사 유례없는 책의 제국으로 만드는 위대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2. 평화의 도시 바그다드 건설


(1) 원형도시 바그다드의 설계와 상징성


탈라스전투 이후 아바스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제2대 칼리프 만수르는 A.D. 762년에 티그리스강 기슭에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Baghdad)를 건설하였습니다. “평화의 도시(Madinat al-Salam)”라고 불린 바그다드는 완벽한 동심원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이는 칼리프를 정점으로 한 우주적 질서와 이슬람제국의 완결성을 상징하는 건축학적 걸작이었습니다.


바그다드의 중심부에는 칼리프의 궁전과 거대한 이슬람사원이 자리를 잡았으며, 사방으로 뻗은 성문은 단순히 방어용을 넘어 전 세계의 인재와 물자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흡입구와 같았습니다. 이러한 기하학적 설계는 아바스왕조가 특정부족의 이익을 넘어서, 능력중심의 보편제국으로 나아가겠다는 통치철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2) 동서교역의 교차로와 경제적 번영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바그다드는 실크로드의 육상교역로와 인도양의 해상무역로를 하나로 묶는 지구촌의 경제적 중심지로 급부상하였습니다.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인도의 향료와 보석, 아프리카의 금이 바그다드시장으로 모여들며 이슬람제국은 유례없는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칼리프들은 이 막대한 부를 단순히 권력의 과시에 소모하지 않고, 학문을 장려하고 도서관을 세우는 데 아낌없이 투자하는 혜안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는 장차 인류 지성사의 정점을 찍게 될 “이슬람의 황금기”를 견인하는 가장 든든하고 확실한 물적 동력이 되었습니다.


3. 지혜의 집과 대번역 운동


(1) 지혜의 집 건립과 학문적 개방성


9세기에 이르러 제7대 칼리프 마문은 바그다드에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학술기관인 “지혜의 집(Bayt al-Hikma)”을 세웠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도서관을 넘어, 인종과 민족, 종교의 벽을 허물고 오직 진리탐구라는 일념 아래 전 세계의 석학들이 모여 토론하고 연구하는 지식의 전당이었습니다.


마문 칼리프는 번역된 책의 무게만큼 황금을 하사할 정도로 학자들을 극진히 예우하며, 국가의 명운을 건 지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개방성은 이슬람문명이 타 문명의 정수를 편견 없이 수용하고 토착화할 수 있게 만든 핵심적인 힘이었으며, 바그다드를 지상에서 가장 지적인 도시로 탈바꿈시켰습니다.


(2) 대번역 운동과 인류지식의 집대성


이 시기 주도된 “대번역 운동”을 통해 그리스의 철학(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인도의 수학(아라비어숫자, 대수)과 천문학, 페르시아의 문학이 대대적으로 아랍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당시 아랍어는 종교의 언어를 넘어 인류의 모든 지식을 담아내는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학문 공용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기독교와 봉건제로 대변되는 중세시대의 유럽이 학문의 단절 속에서 암흑기를 지나고 있을 때, 아바스왕국의 학자들은 고대 문명의 정수를 보존하고 체계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인류 지성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수호하였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번역작업이 없었다면, 고대 서구의 지적 유산의 상당수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4. 지식의 폭발


(1) 학문의 비약적 발전


고대학문의 수용과 번역으로 축적된 지식은 전 학문 분야에서 폭발적인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수학자 알콰리즈미는 대수학(Algebra)을 체계화하여 현대 디지털 문명의 근간인 “알고리즘”의 기틀을 닦았으며, “의학의 왕” 아비센나(이븐 시나)는 “의학정전”을 통해, 이후 수백 년간 동서양 의학의 표준이 될 의학서를 편찬하였습니다.


아바스왕조시대의 학자들은 이슬람과 합리적 이성이 완벽하게 조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쿠란의 교리를 따르는 것만큼이나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이러한 태도는 근대적 과학방법론이 싹틀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2) 이슬람 황금기가 남긴 세계사적 유산


바그다드의 거리는 책을 사고파는 상점과 날 선 토론에 몰두하는 지식인들로 불야성을 이루었습니다. 이곳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과학과 철학의 유산은 훗날 안달루시아와 시칠리아를 거쳐 서구로 전해졌으며, 이는 잠자고 있던 유럽을 깨워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결정적인 지적 자양이 되었습니다.


아바스왕조의 황금기는 단순히 한 시대의 번영을 넘어서, 인류문명이 공유하는 거대한 지혜의 보고입니다. 그것은 열린 마음과 평화로운 공존이 인간의 지성을 어디까지 고양시킬 수 있는지를 증명한 인류사의 가장 영광스럽고 소중한 유산이라 하겠습니다.


제3장 권력의 이동과 기생세력의 등장


1. 맘루크(Mamluk)의 등장(A.D. 861-945)


아바스 왕조의 찬란했던 황금기의 이면에서는 권력의 중심축이 서서히 무너지는 전조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제8대 칼리프 무타심시대에 이르러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강인한 튀르크계 노예군인인 맘루크(Mamluk)들이 아바스왕조의 근위대로 대거 등용되었습니다. 본래 맘루크들은 칼리프의 신변을 보호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채용이 되었으며, 이들은 뛰어난 전투력을 바탕으로 이슬람제국의 핵심적 무력집단으로 급부상하였습니다.


결국, 칼리프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할 맘루크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칼리프의 목을 겨누는 위협적인 존재로 변질되었습니다. A.D. 861년, 칼리프 무타와킬이 자신의 맘루크들에게 암살당한 사건은 권력의 향방이 아랍인혈통의 칼리프에서, 맘루크로 이동했음을 알리는 비극적인 신호탄이었습니다. 이후 바그다드는 맘루크들이 칼리프를 마음대로 세우고 폐위시키는 혼란스러운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아바스왕조의 정통성은 허울뿐인 껍데기로 남게 되었습니다.


2. 페르시아계 부와이(Buyid)왕조(A.D. 945-1055)


맘루크들의 전횡으로 이슬람제국이 분열된 틈을 타서, A.D. 945년에 페르시아계 시아파세력인 부와이왕조가 바그다드를 점령하였습니다. 이들은 수니파 칼리프의 종교적 정통성은 인정하지만, 실질적인 정치와 행정권은 자신들이 행사하는 독특한 통치형태를 구축하였습니다. 이는 이슬람제국이라는 거대한 나무에 기생하며, 그 자양분을 빨아먹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었습니다.


110년 동안 지속된 부와이왕조의 지배 아래에서, 아바스왕조의 칼리프들은 자신의 궁전조차 마음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황금 감옥”에 갇힌 처지가 되었습니다. 비록 이 시기에 사산조 페르시아(수도: 크테시폰)의 선진적인 문화와 행정기법이 이슬람 제국에 깊이 스며드는 부수적인 성과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아바스왕조의 중앙집권적 힘은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약화되었습니다.


3. 셀주크튀르크(Seljuk Turks)의 발흥(A.D. 1055-1258)


(1) 용병에서 이슬람제국의 주인으로: 술탄시대의 개막


부와이왕조의 뒤를 이어 이슬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주인공은 바로 셀주크튀르크였습니다. A.D. 1055년, 토으릴 베크가 이끄는 셀주크군대는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시아파 부와이왕조를 몰아내고 수니파 칼리프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세웠습니다. 이에 감격한 칼리프는 토으릴 베크에게 “동방과 서방의 왕”이라는 뜻의 술탄(Sultan)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그에게 실질적인 통치권을 위임하였습니다.


이는 이슬람제국에서 종교적 권위인 “칼리프”와 세속적인 정치·군사권인 “술탄”이 공식적으로 분리되는 역사적 대전환점이었습니다. 이제 이슬람제국의 실질적인 중심축은 아랍인혈통에서 강인한 유목민족의 기상을 지닌 튀르크인에게로 완전히 이동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슬람문명이 새로운 물리적 동력을 얻어 세계사적 팽창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만지케르트전투와 아나톨리아의 개방


셀주크튀르크의 위세는 A.D. 1071년에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그 정점에 달하였습니다. 즉, 셀주크튀르크는 비잔틴제국의 대군을 격파하고 황제 로마누스 4세를 포로로 잡는 경이로운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 셀주크튀르크의 승리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던 아나톨리아(현재의 튀르키예) 지역을 이슬람의 영역으로 활짝 열어젖힌 문명사적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의 보루였던 비잔틴제국은 존립의 위기를 느꼈고, 이는 서구 유럽에 거대한 공포와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셀주크튀르크인들의 거침없는 서진은 결국 서구 기독교국가들이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 아래 결집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며, 인류사의 비극인 십자군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3) 성지 예루살렘의 위기와 십자군전쟁


셀주크튀르크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비잔틴제국을 강하게 압박하자, 유럽 전역에서는 기독교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A.D.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선포를 시작으로, 수많은 기사와 군중이 가슴에 십자가를 달고 동방으로 향하였습니다. 이것이 향후 8차에 걸친 200여 년 동안에 이슬람문명권과 기독교문명권을 피로 물들인 십자군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A.D.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성내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참혹하게 학살하는 참극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참상은 이슬람문명권의 가슴에 서방에 대한 깊은 적개심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아로새겼으며, 훗날 이슬람문명권이 내부적으로 더욱 강력하게 단결하여 서구 유럽의 침략에 맞서게 되는 반작용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4) 살라딘의 부상과 문명교류의 역설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문명권은 위대한 영웅 살라딘(Saladin)의 등장으로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지략과 관용의 리더십으로 흩어진 부족들을 결속시켰고, A.D. 1187년에 예루살렘을 재탈환하며 이슬람의 자존심을 회복하였습니다. 살라딘은 정복자로서 과거 십자군의 살육을 되풀이하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적군이었던 사자심왕 리처드를 감복시킨 고귀한 기사도 정신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참혹한 십자군전쟁은 동서양 문명이 격렬하게 교차하며, 서로의 선진학문을 배우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이슬람문명권의 앞선 과학, 의학, 철학을 접하며, 중세의 암흑기에서 벗어날 지적 자산을 얻었습니다. 결국 십자군전쟁은 이슬람문명권이 외부의 충격을 견뎌내며 더욱 단단해지는 과정이었으며, 그 상처 위에서 새로운 질서가 싹트는 인류사의 거대한 진통이었습니다.


제4장 다원화된 세계와 분열된 권위 (A.D. 756-1258)


1. 세 명의 칼리프 시대


아바스왕조의 중앙집권력이 약화되면서 이슬람제국은 단일 공동체(Ummah)의 틀을 벗어나 세 명의 칼리프가 공존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즉, 바그다드의 아바스왕조에 맞서,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우마이야왕조의 후예가 세운 후우마이야왕조(코르도바)가 A.D. 929년에 칼리프를 선포하였고, 이집트에서는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카이로)가 스스로를 칼리프로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이슬람제국이 지중해전역으로 확산되고 각 지역의 거점이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바그다드, 코르도바, 카이로는 각각 수니파와 시아파, 그리고 지역적 특성을 바탕으로 정치와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며, 이슬람문명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2. 서방 이슬람의 정점, 후우마이야 왕조


이베리아반도에 자리 잡은 후우마이야왕조는 수도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일구었습니다. 특히, 압드 알 라만 3세 시대에 이르러 코르도바는 인구 5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하였으며, 거리마다 가로등이 켜지고 도서관에는 수십만 권의 장서가 보관될 만큼 번영하였습니다.


이러한 코르도바의 번영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학자들이 이슬람의 학자들과 함께 그리스철학을 아랍어로 연구하고, 이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훗날 유럽 문명을 깨우는 지적 자양분이 되었으며, 분열된 이슬람제국에서도 학문의 불꽃이 가장 화려하게 타오른 지점이었습니다.


3. 시아파의 비상과 파티마왕조


북아프리카에서 시작해 A.D. 969년에 이집트를 정복한 파티마왕조는 새로운 수도 카이로를 건설하며, 아바스왕조의 강력한 대항마로 부상하였습니다. 파티마왕조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시아파 이슬람의 정통성을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파티마왕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알 아즈하르 대학을 설립하여 학문적 권위를 세우는 동시에, 인도양과 지중해를 잇는 홍해교역로를 장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이집트는 아바스왕조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4. 정치적 분열과 문화적 연대


정치적 권력은 비록 세 갈래로 나뉘어 칼리프 간의 경쟁이 치열하였으나, 무슬림들의 일상과 학문의 흐름은 단일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순례(Hajj)와 공용어인 아랍어는 코르도바의 학자가 카이로를 거쳐 바그다드까지 여행하며 지식을 나누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비록 자신이 속한 왕조가 다르더라도 학문적 성과를 공유하였으며, 이는 정치적 분열이 오히려 지식의 경쟁과 전파를 촉진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통일된 이슬람제국은 사라졌을지언정, 이슬람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인 거대한 문명공동체가 지중해 전역에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제5장 몽골의 침공과 아바스왕조의 종말


1. 훌라구의 몽골군대의 서진


13세기 중반,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던 몽골제국의 기세는 이슬람제국의 중심부로 향하였습니다. 즉,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Hulagu)는 서남아시아 원정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진격하며 바그다드를 압박하였습니다. 당시 아바스왕조는 내부적인 권력약화와 군사적 무력감에 빠져 있었으며, 몽골이 보여준 압도적인 기동력과 공성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저항하는 세력을 철저히 궤멸시키며 공포를 확산시켰습니다. 몽골군의 서진은 단순히 영토의 점령을 넘어서, 수 세기 동안 유지되어 온 중동지역의 질서와 문명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거대한 물리적 파동이었습니다. 바그다드는 인류사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 중 하나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2. 바그다드의 508년 영화의 소멸


A.D. 1258년 2월, 훌라구의 몽골군대는 바그다드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심으로 진입하였습니다. 아바스왕조의 37대 칼리프이자 마지막 통치자인 무스타심은 결국 항복을 선언하였으나, 몽골군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칼리프 무스타심은 몽골의 관습에 따라 처형당하였으며, 이로써 A.D. 750년부터 508년간 이어져 온 아바스왕조시대는 공식적인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아바스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며칠간에 걸친 몽골군의 약탈과 방화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즉, 바그다드의 화려한 궁전과 사원, 공공시설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가 되었으며, 그동안 바그다드가 누려왔던 지구촌의 중심지로서의 명성은 한순간에 소멸하였습니다. 이는 이슬람문명이 쌓아 올린 물질적 성취가 한 아바스왕조시대의 종말과 함께 무너져 내린 비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3. 검푸른 잉크색의 티그리스강물


이러한 파괴의 현장에서 가장 뼈아픈 손실은 인류의 지적 자산이었습니다. 몽골군은 “지혜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 그리고 이슬람의 고서와 필사본들을 티그리스강에 수장시켰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인류 지성의 결정체들이 가교가 되어 기병들이 건너갈 정도로 강물을 메웠다는 기록은 당시의 참상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연하면, 이븐 알 아티르(Ibn al-Athir)의 완전한 역사(Al-Kamil fi al-Tarikh)에 따르면, 티그리스강물은 책에서 흘러나온 잉크로 인해 오랫동안 검푸른 색을 띠며 흘렀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종이 뭉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식이 대를 이어 전달되는 문명의 혈맥이 끊긴 것을 의미합니다. 바그다드가 지켜온 학문의 등불은 그렇게 물리적 파괴 앞에서 잠시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4. 일칸국(Ilkhanate)과 문명의 전이


아바스왕조를 멸망시킨 몽골의 훌라구는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 지역에 몽골의 분국인 일칸국(Ilkhanate)을 세워 새로운 통치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비록 아바스왕조는 사라졌으나, 살아남은 학자들과 기술자들은 이집트의 맘루크왕조나 북방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들이 옮겨간 지식의 불씨는 훗날 다른 지역에서 이슬람문명이 다시 꽃피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정복자인 몽골인들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문명의 세련미와 종교적 깊이에 동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칸국의 지배층이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아바스왕조시대의 종언은 이슬람문명의 완전한 소멸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변모와 확장을 예고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주) 아바스왕조 이후의 이슬람과 관련되는 주요 국가의 연대표(A.D. 750-1922)


1. 아바스왕조(Abbasid Caliphate): A.D. 750-1258

A.D. 1258년 바그다드 함락 이후 이집트에서 명목상 존재는 A.D. 1517년까지 이어짐


2. 후우마이야왕조(Umayyad Emirate of Cordoba): A.D. 756-1031

아바스 성립 직후 스페인 안달루시아에 세워진 독자 세력


3. 파티마왕조(Fatimid Caliphate): A.D. 909-1171

북아프리카와 이집트를 중심으로 아바스에 대항한 시아파 칼리프왕조


4. 부와이왕조(Buyid Dynasty): A.D. 934-1055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아바스 칼리프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페르시아계 기생세력


5. 셀주크제국(Seljuk Empire): A.D. 1037-1194

부와이 왕조를 몰아내고 술탄 칭호를 받으며 아바스의 수호자를 자처한 튀르크계 제국


6. 아이유브왕조(Ayyubid Dynasty): A.D. 1171-1250

살라딘이 건국하여 십자군을 격퇴하고 이집트/시리아를 지배


7. 일칸국(Ilkhanate): A.D. 1256-1335

아바스왕조를 멸망시킨 훌라구가 세운 몽골계 이슬람 왕조


8. 맘루크왕조(Mamluk Sultanate): A.D. 1250-1517

이집트에서 아이유브를 밀어내고 건국. 몽골을 저지하고 이슬람 정통성을 250년간 수호


9.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 A.D. 1299-1922

1517년 이집트 맘루크를 병합하며 명실상부한 술탄-칼리프의 시대를 엶


10. 티무르 제국(Timurid Empire): A.D. 1370-1507

중앙아시아를 기반으로 한 거대 정복 제국으로 오스만 성장을 잠시 저지하기도 함


11. 사파비왕조(Safavid Dynasty): A.D. 1501-1736

이란을 중심으로 시아파를 국교화하며 오스만과 경쟁한 페르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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