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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기루 Sep 24. 2022

사람은 학대를 받으면 바보가 되거든요



아무리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도 쉽게 바보가 될 수 있다는 걸 독자분들은 아시나요?


한 번쯤은 사랑 앞에서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바보가 되는 기분을 경험했을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요조차 안 하던 똑똑한 사람들도 어느새 내 사람이라는 바운더리 안에 갑자기 들어오면 배려와 기대부터 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 배려를 감사하는 사람과 당연시 여기는 사람으로 나뉘게 되는데 우린 후자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에게 더 아픈 상처를 받곤 한다.

내가 이만큼 주면 너도 이만큼을 내게 줬으면 하는, 쿨한 척하고 싶지만 마음은 서운하다 말하고 있는, 나도 모르게 유치한 감정이 쌓여 울분을 토로하게 되면 속이 좁은 것과 같은 얄상한 마음과 나도 모르게 말을 툭툭 내뱉으며 마음이 온전치 못하게 된다.

마음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내 속을 다 들어낸다 해도 온전한 내 마음을 올곧이 전할 수 없다. 물론 진심은 통하겠지만 나를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런 노력도 이젠 안 하는 쪽을 선택하고 싶단 말을 하고 싶다.

내 할 일을 열심히 하고 누군가에게 기대하지 말라는 말들을 어디서 봐온 바 있지만 내 행동은 정반대로 하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를 내 보인다.

내 마음을 나조차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의미부여와 합리화를 하며 희로애락의 하루하루를 보낸 적이 꽤나 있으니 말이다.


제3자들은 쉽게 말한다. 하지만 그게 맞는 말인 건 누구보다 우리는 잘 안다. 제3자는 우리의 상황을 누구보다 멀리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게 포괄적으로 인간관계로 들어가면서 우린 인간관계에 지친다는 표현을 적지 않게 하고 있다.

자아 정체성은 어릴 때와 성인이 되었을 때 비교적 자리 잡았다고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누군가에 의해 바보가 됐던 순간들이 있다.  

어른 아이들의 무논리 감정을 들여다봤을 때 자기가 바라보던 세상에 혼란이 오면 자신을 쉽게 잃어버리곤 한다. 한없이 작아지고 어리숙한 존재로 나를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흔들리는 바보가 되어버린다.

감출 수 없는 감정의 영역에서 특히 보이는데 이를테면 대표적으로 사랑이란 감정이다.

사랑이 무엇일까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난 조심스러운 답변을 할 것 같다. 그리고 난 사랑에 대해 묻지 않을 것 같다.

보이지도 않는 사랑이란 감정에 나도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들을 보았기 때문에 고작 몇 문장과 몇 개의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순간을 기억하면 비교적 나와 다른 마음을 가진 상대방의 거친 말이나 행동 또는 내가 이해 못 하는 영역으로 끝없이 나를 밑으로 끌어내려버린다.

난 이런 감정이 무섭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을 때는 하고 싶은 대로 감정적으로 이끌리기 마련이고 같은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는 감정의 악순환을 불러일으킨다.


지금도 물론 힘이 들지만 나는 사랑의 감정을 과함보다는 절제의 영역에 놓기로 했다.

가족, 친구, 신뢰가 충분한 연인,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에서의 절제가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갈 한 사람과 나를 무시하는 사람, 확신이 없는 사람 또는 나의 감정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절제의 영역에 둘 수 있는 연습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사람, 말 몇 마디를 해 봤는데 마음이 불편한 사람, 결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도 이해해보려 하고 맞춰가면 된다는 바보 같은 마음의 소리의 절제가 아니다.


구분해내는 게 어렵고 맺고 끊음이 어려운 사람이라면 사랑이란 감정에 과함보단 절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덜 사랑하라는 말이 맞다.

나만큼 나를 생각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끔 나의 지인들을 보면 상처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감정에 휘둘리면 '자신'의 자신이 없다.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고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한다.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방어기제가 생겼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절제의 영역이라 엄연히 다르다. 조금 덜 사랑하고 그 덜한 사랑 자신에게 좀 더 주란 말을 곱씹으며 절제의 영역 하나를 여유 주머니에 집어넣으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여유와 성숙함으로 우리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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