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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주 Jul 08. 2022

침잠mania

사색을 통해 삶을 통찰하는 자전적 에세이

#1. 17방미인     


주변 사람들은 내게 종종 얘기하곤 한다. 나는 부모님께 큰절을 올려야 한다고. 맞는 얘기다. 부모님은 나를 어려서부터 풍족한 환경에서 남부럽지 않게 키워주셨다. 수려한 외모의 두 분 덕분에, 첫 직장에서 학생들이 붙여준 나의 별명은 ‘미스코리아 선생님’이었다. 대학생 때는 길을 가다가 모델학원 관계자들로부터 여러 번 제의도 받았다. 지금의 건강한 나를 있게 한 건 팔 할이 부모님이시다.      


그리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영혼의 단짝으로 나를 지켜주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연년생 친언니다. 유년기 시절 우리 언니는 세상 순둥한 나를 지켜준답시고 온 골목을 호령하였다. 충천한 기개를 뽐내며 용맹하게 모든 놀이를 이끄는 골목대장 언니는 동생인 나를 졸병처럼 거느렸다. 언니의 안전망은 든든했으나, 나는 점점 겁쟁이 바보가 되었다.      


한 살 터울인 우리는 같은 유치원에 다녔다. 규정상 언니는 닭반, 나는 병아리반 소속이었다. 그러나 언니와 떨어지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던 나는 닭반에서 언제나 언니와 함께 지냈다. 언니가 유치원을 졸업하고 나 혼자 유치원에 간 첫날, 홀로서기의 대가는 혹독했다. 언니 안전망을 벗어난 꼬맹이는 응가를 그만 팬티에 한가득 지르고 말았다. 원장님의 커다란 팬티를 입고 집에 돌아온 그날은 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수치심이란 감정을 느낀 날이다.     


그날의 기분은 어린아이의 여리고 잔잔한 바다에 끊임없는 파장을 일으켰다. 팬티사건 이후에 혼자 조용히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언니는 학교에 갔고, 유치원에서 일찍 돌아온 나는 정원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마당의 작은 연못에 사는 금붕어에게 먹이를 준답시고 열심히 파리채를 휘두르며 파리를 잡았다. 파리가 완전히 짜부가 되지 않게 살짝 기절할 정도로만 내려치는 힘 조절 스킬을 터득했다. 포획한 파리를 연못에 넣어주면 얌전하던 금붕어는 금세 야수처럼 변해 달려들었다. 조그만 금붕어 입이 커다란 동굴처럼 변하여 한입에 꿀꺽 파리를 삼키는 모습이 소름 돋게 징그러웠지만, 나는 열심히 금붕어에게 밥을 먹였고, 내 담력도 살을 찌웠다.

      

우리 집 마당은 꽤 넓었다. 암석으로 단을 높인 정원에는 장미, 수련, 야자나무 등 다양한 수목이 자랐다. 연못과 대문 사이에는 개집을 마련해 진돗개를 키웠다. 애완견 재롱이는 나보다 몸집이 훨씬 컸지만 웬일인지 무섭지는 않았다. 몸을 가득 덮은 털은 햇살처럼 윤이 났고, 얼굴은 언제나 웃는 모습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일부러 언니와 따로 등교하였다. 언니는 늦잠꾸러기였고, 등교시각에 임박해서 집을 나서는 스릴을 즐겼다. 학교에 지각하여 선생님께 혼난다는 건, 내게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부지런히 일찍 집을 나섰고, 그 뒤를 졸래졸래 따라온 건 우리 재롱이였다. 30여 분을 걸어 문방구 앞 학교 후문에 도착하면 그제야 재롱이는 나의 수행을 멈추고 발길을 돌렸다. 절대 교문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던 재롱이는 정말 영민한 개였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묵묵히 따라와 주는 재롱이가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우리들은 1학년’수업시간 내내 깊이깊이 생각하며 눈이 뜨거워졌다.     


초등학교 공부는 꽤 재미있었다. 등교부터 하교까지 학교에 거하는 모든 시간들이 질서와 규칙으로 꽉 차 있는 ‘약속세상’이었다. ‘학생답기’ 위해서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런데 그것들이 스트레스라기보다는 너무나 흥미로웠다. 널브러진 퍼즐 조각들을 판에 딱딱 맞추어서 작품을 완성하듯이,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온갖 것들은 세상을 속속들이 착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마법 주문 같았다. 나는 성실한 학생이고 싶었고, 유능한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멋진 학교에서 배운 신비로운 학습 내용을 머리에 새기고 마음에 담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마법 수련은 계속되었다. 나는 스스로 책상에 앉아, 백화점에서 본 것처럼 교과서를 진열했다. 국어, 수학, 바생, 슬생, 즐생을 가지런히 펼친 다음, 각 교과마다 공책을 따로 세팅했다. 필통 속 학용품 군단의 채비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성스러운 학습이 시작되었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써서 오늘의 공부를 마치면 내 안에 ‘지식의 성’이 반짝였다.      


집에서는 아무도 내게 공부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니까 할 뿐이었다. 부모님은 한 살 터울인 언니와 내가 서로 샘내고 다툴까봐, 간식이며 장난감을 항상 넉넉하게 마련해주셨다. 우리는 키도 체중도 비슷했지만, 나는 일 년 후에 언니 옷을 물려 입지 않았다. 엄마는 언니와 내게 백화점에서 똑같은 옷을 함께 사주셨다. 매일 옷과 어울리는 모자까지 맞춰 쓰고 등교하면 완성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꽤 좋았다. 담임뿐 아니라 다른 반 선생님들도 복도에서 가끔 내게 여동생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없다고 말씀드리면 나중에 옷을 줄 수 있냐는 농담을 얹곤 하셨다. 선생님들의 관심과 믿음을 담뿍 받는 나를 향한 친구들의 시선은 항상 다정했다.     


4학년이 되던 해 가을, 등교해서 교실에 들어서니 여학생들이 예닐곱 명 떼로 모여서 웅성대고 있었다. 뭐 하고 있냐 물으니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자기들끼리 세고 있었단다. 그들이 말하는 ‘나’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그것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한참 동안 장점을 줄줄이 늘어놓다가 마지막에는 무릎을 탁 치면서 외친다. 팔방미인이 아니라 십칠방미인이라면서 다들 깔깔거렸다. 순간 기쁘기도 했지만 다소 충격이었다. 평소에 친구들이 나를 무척 따르고 좋아해 주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과분한 인정에 나는 짐짓 두려웠다. 집에서의 나는 학교에서처럼 마냥 의젓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서의 수행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상당한 에너지를 썼다. 나와 선생님과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심적 부담감과 육체적 피로감은 집에서의 응석으로 환원되었다. 피곤한 나는 엄마에게 투덜거리거나 화를 냈고, 만만한 언니에게는 욕도 해가면서 다투었다. 이렇게 학교와 집에서 치환과 환원을 반복하며 내 나름의 균형을 잡아나갔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내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나는 선생님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새기고 철저하게 실천했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총애하셨고, 그 모습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전염되었다. 완벽한 모범생을 자처한 나는 친구들의 부탁을 뭐든지 다 들어주었다. 내 입이 거절을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날은 선생님이 선행상을 뽑아야 한다며, 무슨 용지를 가져오셨다. 착한 행동 사례에 대한 질문 대신, 아이들에게 누가 받으면 좋겠냐고 대뜸 물으셨다. 어떤 아이가 내 이름을 말하니, 선생님은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 하셨다. 대부분 아이들이 손을 들었고, 나는 선행상을 받았다. 상은 물론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날 내 기분은 무척이나 찜찜했다. 인기상을 가장한 선행상인지, 내가 정말 착한 사람인지, 과연 나는 친구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모범생이라는 완벽한 역할을 수행하기로 결심한 것은 순수한 나의 의지다. 의지의 발로는 성실한 노력이었고, 그 노력의 결실은 칭찬과 인정이었다. 결실은 너무나 달콤해서 어린이의 의지에 더욱 불을 지폈다. 화염처럼 달아오른 자신감은 이상적인 자아상을 만들고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았다. 스스로 세운 결심에 따른 책임감의 무게를 순수한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설렘으로 시작해 기쁨을 누렸지만, 기쁨은 욕심을 생성하고 욕심은 나를 매섭게 다스렸다.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은 너무나 당연했지만, 동시에 가혹한 것이기도 했다. 스스로 초래한 혼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생각 구렁텅이에 풍덩 빠졌다. 우리 집 정원에 흐드러진 꽃나무들을 조용히 바라보며,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내 마음의 깊은 물 속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꼬마 사회인으로 최선을 다하던 ‘열심초딩’은 침잠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 걸며 사색한 끝에, 두 개의 자아를 인정하게 되었다.      








#2. 미션파서블     


우리나라의 의무교육은 중학교까지의 교육을 이른다. 초6에서 중1로 넘어가는 때가 아마 학생의 삶에서는 가장 큰 전환기일 것이다. 나는 중입 근거리 배정 원칙에 따라 우리 동네 남녀공학 공립중학교로 가게 되었다. 예비소집일 날, 우리 집을 기준으로 초등학교와는 정반대 편에 있는 중학교는 가는 데만 걸어서 40분이 넘게 걸렸다. 초등학교에 비하면 거의 두 배이다. 중학교로 가는 길은 너무나 생경했다. 매일 다니던 동네 시장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골목길로 가는 건데도, 낯선 나라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온몸을 휘감는 이질감에 걷는 내내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한겨울인데도 내 이마는 기어이 식은땀을 쥐어 짜냈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고인 땀을 스치면 뒷덜미가 미칠 듯이 서늘해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장면은 죄다 회색 빛깔이었다. 걷고 또 걸어서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눈앞의 잿빛 아스팔트 길은 노랬다가 다시 회색 되기를 반복했다. 먹은 것도 그다지 없는데 당장이라도 토할듯했다. 어질어질한 머리통을 겨우 부여잡고 교문에 도착하니 하교하는 중학생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전신을 휘감은 짙은 교복과 두꺼운 흰 양말 위를 점령한 검정 단화는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키와 얼굴은 제각각 다른데 입은 옷과 신은 놀랍게도 다 똑같았다. 중학생 언니들은 모두 다 귀밑 3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똑 단발로 얼굴 크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학생 선도를 표방한 복장 규정은 세상의 어떤 예쁨도 못남으로 바꾸는 술책이 분명했다. 못남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무서운 선배 무리를 피해 슬금슬금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중학교 운동장에는 그 흔한 철봉도 없었다. 미끄럼틀, 정글짐, 시소, 그네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휑한 운동장 가운데에는 어깨가 한껏 움츠러든 신입생들만 도열하였다.     


대머리 남자 선생님은 한동안 꽥꽥대며 큰 소리로 훈계하셨다. 이 추운 날씨에 머리가 얼마나 추우실까 걱정을 하다 보니,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예비 신입생들은 1층 교실로 들어가 반편성고사를 보았다. 중학교 1학년 학급을 편성하기 위한 진단평가였고, 시험 범위는 초등 6학년 교육과정 내용이었다. 다행히 교실은 참 따뜻했고, 책상 앞에 앉으니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험지의 글자들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두려움을 떨친 뇌는 릴레이 선수처럼 손으로 바통을 전달했다. 답안을 채우는 연필 소리로 꽉 찼던 두 시간이 끝나고, 도망치듯 부리나케 집에 돌아왔다. 다음날부터 2월 말까지, 나는 매일마다 꿈에서 중학교에 갔다.      


입학식 날은 옷깃이 빳빳한 교복을 갖춰 입었다. 눈물 한 바가지와 맞바꾼 짧은 단발머리와 검정 스타킹에 흰 양말 등 못생김으로 완전무장하였다. 입학식이 시작되고 신입생 선서 때 갑자기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운동장 구령대로 올라갔다. 처음 본 사회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또박또박 선서문을 읽고 마지막에 내 이름을 말했다. 내가 신입생 대표라니. 반편성고사에서 전체 1등을 해버린 나는 관심을 갖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3월 첫 주 동안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꼭 한 번씩 물어보셨다.

“여기 여현주가 누구니?”

그때마다 내 얼굴은 빨강을 넘어 자주색이 될 만큼 달아올랐다. 제발 이번 과목은 그냥 넘어가길 기도하면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신학기도 보름이 흘렀다. 중1 수학 첫 단원은 늘 그렇듯이 ‘집합’이다. 합집합과 교집합을 배운 다음에 차집합, 여집합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서 사건은 터져버렸다.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 수학 선생님은 그날도 작은 궁서체로 칠판을 가득 채운 다음, 소리 높여 개념을 가르쳐주셨다.

“여러분~ 여집합은 여현주 집합이죠, 허허허!”

순간 제트기가 미사일로 가격한 듯, 뒤통수가 아찔했다. 교실이 떠나갈 듯 호쾌하게 지르는 친구들의 웃음 폭격은 내 이마를 한 번 더 강타했다. 어질어질한 정신 줄을 겨우 붙잡고 나니, 불현듯 원망이 치솟았다. 연로한 선생님의 고리타분한 구식 농담이 야속했고, 답정너 농담에 응답해준 친구들의 어쭙잖은 공경심이 미웠다. 나의 이름이 회자될 때마다 내 안의 부끄럼둥이 아기는 온몸을 떨며 울었다.     

 

원치 않는 관심이 너무 싫었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부담으로 남겨졌다. 가슴에 송곳처럼 박힌 부담감이 나를 더 깊이 찌르지 않도록 방어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이미 받아버린 그들의 기대를 현실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나는 더욱더 학습에 매진했고, 점점 더 공부 기계가 되어갔다. 전교 1등이라는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아야 했다. 그래야 어떤 상대든, 어떤 상황이든, 그 어떤 변수에서도 안전하게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내 밖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것들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서 모든 전쟁을 치러야 했다. 예측한 상황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고, 문제 해결에 필요한 역량을 갖추기 위해 나는 007(더블오 세븐) 요원으로 화했다. 지독하게 나를 몰아붙이고, 혹독하게 나를 단련시켜야 겨우 제임스 본드 시늉이라도 할 수 있으므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좋아하지 않는 과목의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심신의 에너지를 더 많이 쏟아야 했다. 체육 농구 수행평가에서 만점을 받기 위해, 깜깜한 새벽 다섯 시에 혼자 마을 운동장에 나가 자유투를 연습했다. 모두가 잠든 어둠 속 무서움 따위는 느껴서는 안 될 사치였다. 첫날 한 골도 넣지 못했던 내 비루한 손은 일주일간 미친 연습을 거치고, 시험 날 농구공 열 개를 연속으로 골대에 넣어버렸다. 지지리 싫어했던 한문과 세계사는 단기 기억으로 압살해야 했기에, 시험 전날 밤샘 암기가 절대적이었다. 아침 해가 뜨기 시작하면, 급박해지는 마음과 함께 어김없이 새빨간 코피가 쏟아졌다. 한자책 위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시뻘건 피보다 더 무서운 건 시험에서 한 문제라도 틀리는 거였다.      


중입 선서문을 낭독한 열네 살 소녀는 특급 노력을 불사한 끝에 명 받은 미션을 완수했다. 중학교 3년간 학기마다 치르는 총 열두 번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전교 1등의 자리를 사수하였다. 에이전트의 수행 영역은 비단 학교 안만이 아니었다. 다니던 학원은 성적순대로 A1~A5, B1~B5, C1~C5 체계의 총 15개 반이었는데, 지역 내 내로라하는 전교 1등 학생들은 나와 같은 A1반이었다. 분기별로 학원 내 자체 모의고사를 쳐서 클래스를 조정하고, 상금을 주기도 했다. 내가 학원 모의고사에서 1등 상금을 받은 날, 엄마는 우리 딸이 돈을 벌어왔다며 무척 기뻐하셨다. 중2를 마치고, 아버지 사업으로 창원에서 부산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내가 떠날 때 친구들은 무척 놀라며 아쉬워했지만, 웃음 섞인 농담도 흘렸다.

“앞으로 우리 학교 애들은 전교 등수 하나씩 올라가고 거긴 내려가겠네!”

친구들의 웃는 얼굴과 잘 가라는 다정한 인사에 나도 환한 미소로 작별했지만, 이 말은 두고두고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친구들은 내가 이사한 후에도 분기별로 손편지를 써서 보내주었다. 내 소식을 물었고, 그들의 안부를 전했다. 나는 친구들이 예상했던 1등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 안도했지만, 한편으론 무척 서글펐다. 전학 간 학교에서 곧장 적응해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급요원인 나에게도 절대 만만치 않은 미션이었다. 더구나 중3은 질풍노도의 시기가 아니던가. 나는 힘든 여건을 뚫고, 결국 해낸 나 자신이 참 대견하였다. 그러나 이런 나를 바라보는 양가적인 친구들의 마음을 생각할 때면 심장 한쪽이 저릿하게 아팠다. 내가 떠난 학교의 친구들은 기뻐했고, 내가 찾은 학교의 친구들은 나를 경계했다. 나는 어딜 가나 친구들에게 순수하게 반가운 존재일 수 없었다. 이걸 깨달은 후 밀려오는 서글픔은 시리고 또 아팠다. 공부하는 것도 넘치게 고달픈데, 겨우 해낸 내가 떠안아야 할 외로움의 무게가 무참히도 가혹했다.      


사춘기 소녀에게 사춘기는 없었다. 이차 성징에 따른 심신의 기복도 비켜 갈 만큼 치열하게 공부에 매달렸던 십 대 소녀의 의식을 장악한 것은 학습의 희열과 세속에의 환멸이었다. 의지의 숭고함, 노력의 처절함, 성취의 이중성이 차례차례 인식의 바다에 밀물처럼 밀려들어, 세차게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기쁘고 외로울수록, 벅차고 억울할수록 마음속 깊은 바다 밑을 들여다보았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바라보면 어떠한 물결도 일지 않는 차분한 그곳에 내가 있었다. 침잠하면 내가 보였다. 내 여린 영혼이 무사히 잘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뭍으로 올라와 미움받을 용기를 내었다.      








#3. 꿈나무     


어렸을 적 누구나 한 번씩 들어본 노래가 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막연히 선망했던 그 순간이 나도 모르게 찾아왔다. 중2 봄날, 학교 선생님께서 나와 몇몇 친구들을 다급하게 불렀다. 과학영재교육원 입학 지원서를 주시며, 한번 도전해보라고 하셨다. 영재교육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내용에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주말에 응시 시험을 보러 대학교로 갔다.     


1998년 교육과학기술부는 영재교육 진흥법에 따라 국가 과학영재의 조기 발굴과 체계적 육성을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서울대, 경남대 등 전국 다섯 권역의 국립대가 국가 공인 영재교육기관으로 지정되었고, 미래 창조적 과학자를 육성한다는 일념으로 대학 부설 과학영재교육원을 설립하여 입학생을 모집하였다.     


처음 가 본 대학교는 위용이 대단했다. 더구나 어른들 인솔 없이 친구들끼리 이렇게 먼 곳에 시험을 보러 왔다는 자체가 무척 설레고 근사했다. 우리는 각기 다른 고사실에서 필기와 면접시험을 보았다. 오전 필기시험이 끝나고 면접실에 들어가니, 여러 교수님이 앉아 계셨다. 그중 가운데 있던 심사위원이 내가 쓴 탐구 답안지를 내려다보더니, 의아해하며 대뜸 입을 열었다.

“서체를 봤을 땐, 남학생인 줄 알았구먼.”

옆의 교수님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내 글씨는 크고 힘찼으며, 가로획은 일관되게 살짝 우상향으로 솟았다. 교수님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고, 나는 특유의 차분함으로 답변을 이어갔다. 마지막 질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수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오래 고민을 해본 경험이 있나요?”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동안 풀었던 수많은 수학 문제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 갔다. 오랜 기간 답답했던 물음표가 명쾌하게 느낌표가 되던 순간이 기억났다. 지난해 나를 삼일이나 고민에 빠뜨렸던 함수 문제 해결 스토리를 말씀드렸다. 면접 평가까지 마치고 시험장을 나오는 발바닥에는 날개가 달렸다. 진솔하게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함으로 가슴이 웅장해졌다. 비록 15살이지만, 친구들과 대학교 정문을 의기양양 빠져나올 때는 마치 대학생이 된 듯한 달콤한 착각에 잠시 취했다.      


캠퍼스를 벗어나자, 오 남매의 막둥이였던 한 친구가 우리들의 손을 잡아끌고 작은 식당에 데려갔다. 냄비에 온갖 재료를 넣고 테이블에서 보글보글 끓여 먹는 ‘즉석 떡볶이’를 난생처음 접한 나는 무척 흥분되었다. 압권은 마지막에 할머니 사장님이 직접 만들어주시는 볶음밥이었다. 불판에서 주걱으로 현란하게 밥을 비비다가 마지막에 김 가루를 한가득 팍팍 뿌려 내어 주시는데, 마치 내가 진짜 대학생이 된 듯했다. 이렇게 멋진 경험을 해보다니! 집에 돌아와서도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시험이 어땠냐는 부모님의 질문도 뒤로하고, 즉석 떡볶이를 박살 낸 나의 무용담을 목이 아프도록 자랑스레 떠들어 댔다. ‘어른의 맛’을 본 이날은 중학생이 된 이래로 가장 짜릿하고 행복한 하루였다.      


한 달 뒤, 저녁에 학원에서 돌아오니 우리 집 전화통에 불이 났다. 뉴스에서 나를 보았다는 친척들과 부모님 지인들의 전화였다. 동네 사람들도 나를 마주치면 뉴스에서 보았다고 반갑게 말해주었다. 그해 여름, 나는 대학 부설 과학영재교육센터 중등부 제1기 신입생으로 최종 선발되었고,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한 내 모습이 관련 뉴스 보도에 잠깐 나왔던 것이었다. 정작 나는 그 방송분을 보지 못했지만, 내가 공중파 텔레비전에 나온 첫 경험이었다. 시험에 응시하러 같이 간 친구들은 모두 떨어지고 나만 혼자 합격해서 미안했으나, 나는 과학꿈나무로서 첫발을 디뎠다.     


열일곱 살의 봄은 찬란했다. 중학교 3년간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나는 높은 내신 백분율과 경시대회 입상 실적으로 과학고(현, 한국과학영재학교)에 입학했다. 당감동 백양산 자락에 위치한 우리 학교는 웬만한 대학교보다 월등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교복과 체육복이 따로 있었지만, 사복을 입고 공부했고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중학생 시절 두발 및 복장 규정에 예속되었던 우리에겐 크나큰 자유였다. 교복은 보통 매주 월요일 등교할 때와 토요일 하교할 때, 딱 두 번만 착용했다.      


입학식 날, 신입생들의 얼굴에는 개선장군처럼 호방한 미소가 흘러넘쳤다. 그동안의 고생을 한꺼번에 보상받듯이 다들 입학의 영광과 기쁨을 누렸다. 식이 거행된 2층 대강당은 축하하러 온 가족들로 금세 꽉 찼다. 한 반에 스무 명씩, 총 다섯 학급인 1학년 전교생은 백 명 남짓이었다. 식이 끝나자, 입학생들은 각자의 교실로 이동했고 가족들은 자랑스러운 자녀를 응원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집과 부모님을 떠나 홀로서기를 하게 된 우리는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이었다. 다들 쟁쟁한 경쟁을 뚫고 입학한 진짜 실력자들인 만큼, 모든 활동에 자신감이 넘쳤고 인품과 배려심도 특출났다. 어떻게 다들 이다지도 착할 수 있을까 하며 놀랄 정도로 친구들의 선함에 나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경쟁상대는 서울과고라며 단단히 일러주셨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러한 기대에 틀림없이 부응할 것이라고 확신에 찬 우리였다.      


모두가 방긋 웃던 입학식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3월 첫 주 수학 시간, 1단원 형성평가를 10문제 쪽지 시험 형식으로 보았다. 난도가 너무 높아서 다 맞은 학생은 우리 반에 단 한 명이었다. 한 문제만 맞은 애들이 수두룩했고, 나는 겨우 세 문제를 맞혔다. 그날 밤 여학생 기숙사는 눈물바다였다. 다수의 전교 1등 학생들도 합격하지 못한 이곳에 온 우리인데, 어찌 이런 일이……. 충격적인 결과에 다들 기가 찰 노릇이었다. 패닉 상태에 빠진 아이들은 서로 울음을 달래주며 괴로운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 날, 옆반 한 여학생이 전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젯밤 가장 많이 울고 실의에 빠졌던 그 친구였다.      


여기 온 학생 대부분은 자라면서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 감정을 절대로 느끼지 않기 위해서, 아니 느끼고 싶지 않아서 몸부림치며 자신의 위치를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스를 달리는 자들이 다 나와 같은 프로라면, 그동안 자신의 실력에 자찬하며 흐뭇했던 시선을 미련 없이 거둬야 한다. 비록 수시로 밀려오는 열등감은 뼈 때리게 아프지만, 훌륭한 모범사례를 직관하고 배울 수 있는 건 이 리그의 독보적인 장점이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똑똑한 사람은 현실을 빨리 인정하고 자신의 주제를 파악한다. 내 바로 옆 친구의 놀라운 실력에 감동하고 인정한 다음에 할 일은, 그 강점을 잘 분석해서 나의 전략을 수립하고 실력을 디벨롭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이 리그의 도의이자 공존을 위한 지혜였다. 빈 수레는 요란하고 찬 수레는 묵직하다. 이곳에 요란한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언제나 조용해서 평온했지만, 너무나 고요해서 무섭기도 했다. 가끔 학교의 완벽하게 차분한 공기가 섬찟할 때는 백양산 약수터를 걸어보았다. 우거진 침잠의 숲속에서 내 영혼의 강녕을 차분하게 살피고 돌아왔다. 처음 내 영혼을 폭격했던 생경한 열등감은 성숙한 겸손함으로 전환되었다. 변화 노력이 거듭될수록 내 안의 자아는 무럭무럭 자랐다. 우리는 겸손한 과학도로서 학문과 우정을 갈고 닦으며 십 대의 끝을 향해 달려 나갔다.    



  





#4. 꿈동산     


우리나라 고3의 공부 행군이 얼마나 힘겨운지는 전 국민이 다 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씁쓸한 어느 날, 고3이었던 나는 살 떨리는 디데이 카운트를 하며 동네 이마트를 향했다. 독서실에 가져갈 커피를 잔뜩 살 요량이었다. 1층 식품매장만 들러서 사도 될 것을, 굳이 2층 서점 코너도 슬쩍 한번 가 본다. 새로 나온 모의고사 문제집을 살펴보다가, 바로 옆 실내놀이터에서 꼬맹이들이 까르르 자지러지게 웃고 떠들며 노니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산 깊은 사찰의 풍경소리처럼 아스라이 마음이 편안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이 이다지도 맑고 기분 좋은 소리였다니! 순수한 이들이 마음껏 내어 지르는 동심의 멜로디는 철창 속에 갇힌 내 영혼을 구원해주는 듯했다.     


매서운 수능시험을 치른 시린 겨울이 가고, 입시 결과가 나왔다. 내 수능 성적은 수학, 과학탐구, 영어는 만점이지만, 사회탐구와 언어영역은 다소 아쉬웠다. 당시 2004년은 뜨거운 교대 붐이 일었던 해다. 여자에게는 안정적인 직업이 좋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참 많이들 했다. 나는 부산에 있는 교육대학과 대구에 있는 의과대학에 원서를 넣었고, 두 군데 다 합격 통보를 받았다. 수능 끝난 직후 엄마와 철학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점을 봐주신 분이 내 사주에는 칼이 없다고 한 말씀이 떠올랐다. 여러 가지 핑계가 점점 더해졌다. 집에서 먼 지방의대는 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솔직한 마음은 6년은 기본, 10년까지 피 말리는 공부와 피를 보는 수술 수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거다. 무서웠고, 잘할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래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이제는 살벌한 공부 전쟁에서 좀 해방되고 싶기도 했다. 마음을 비우니, 지난여름 이마트 실내놀이터에서의 감흥이 밀려왔다. 그때 들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나를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머리가 가벼워지고, 가슴이 간질거렸다. 나는 집에서 불과 3킬로미터 거리인 부산교대에 갈 것을 결심했다.     


교대 생활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내가 그 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학교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롭게 걸어갔고,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들러 철학서를 깊이 탐독했다. 십 대 때는 이과 관련 책들만 잔뜩 보았던 나는, 철학과 인문학에 늦바람이 든 것처럼 흠뻑 빠져들며 균형을 맞춰갔다. 수업이 없는 주말에도 집에서 악보를 잔뜩 챙겨서 교대 별관인 음악관까지 걸어갔다. 음악관 1층에는 혼자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는 개인 연습실이 열 실 가량 있었다. 햇살이 잘 드는 조용한 방에 들어가 캐논 변주곡부터 쳤다. 암보가 될 때까지 계속 연습하다가, 가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쨍쨍한 노란색 봄 햇살이 흠뻑 밀려왔다. 음악관 마당 정원에는 장미꽃이 가득했고, 나비가 유유히 팔랑거릴 뿐 사람의 기척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화사하고 고요한 시간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니! 내가 대학생이라는 현실이 참으로 기뻤다. 이따금 우리 학교 바로 옆 아파트가 본가인 중학교 친구 서진이가 나를 찾아왔다. 당시 본과생이던 친구는 많이 야위고 지쳐 보였다. 밥을 먹으면서 힘없는 목소리로 내가 부럽다고 재차 얘기하는 친구에게, 나는 왠지 많이 미안했다. 친구가 고생하는 모습이 마음 아팠지만, 한편으로 나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었다.    

 

걷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학교에 갈 때도 과외를 갈 때도 놀러 갈 때도 항상 걸었다. 부산 서면이나 연산 로터리를 지날 때, 에이전시 매니저라는 분들께 명함을 몇 번 건네받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무심결에 그냥 흘렸는데, 앞으로 초등학생들을 가르칠 내가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건 아이들 진로지도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달라졌다. 우연히 다가온 세 번째 제안은 참 감사했다. 서면 롯데백화점 앞에서 내게 명함을 준 매니저 언니를 따라 모델학원이란 곳을 다니게 되었다. 당시 나는 22살로 키는 170 정도였는데, 학원에서는 내가 가장 나이가 많고 키는 제일 작았다. 다른 애들은 대부분 17~19살 정도의 고등학생이었고, 키는 평균 180이었다. 처음에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예쁜 여자애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놀라움은 금세 압박감으로 변했다. 나도 어떻게든 노력해서 키를 늘려야 했다.      


기초 자세 트레이닝 시간에 그 힘든 벽타기를 악착같이 하고, 집에 와서는 다이어트 서적을 탐독하며 세상에 모든 음식의 칼로리를 외웠다. 무더위에도 과외를 하러 왕복 세 시간 거리를 걸었고, 하루에 허락된 음식이라곤 아오리사과 8개가 전부였다. 몸은 하루하루 말라가며 46킬로그램이 되었고, 어깨뼈가 더욱 앙상하게 드러났다. 집에서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으면, 아빠는 너무 놀라 당장 모델학원을 그만두라고 다그치셨다. 밥을 안 먹겠다고 고집부리며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는 딸을 보며 부모님 마음은 타들어만 갔다. 그렇게 힘들게 체중을 감량하고 벽타기를 했는데, 키는 두 달간 겨우 1센티미터만 자랐다. 스무 살이 넘어서 키가 컸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만, 나는 속상했다. 거울방에서 워킹 연습을 할 때 가장 속상했다. 내 양옆으로 여자 동생들이 섰다. 그들의 어깨에 내 이마가 닿았다. 동생들은 정확히 얼굴 하나만큼 나보다 더 컸다. 그 모습을 사방에서 보며 연습하는 시간은 정말 괴로웠다. 매니저 언니는 내가 충분히 개성 있고 좋다고 살을 그만 빼라 했지만,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외모에서 오는 열등감을 난생처음 뼈저리게 느꼈다.     


마음이 많이 쭈그러들었지만, 이왕 시작한 것이므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학원을 마치고 모델 동생들과 근처 카페에 갔다. 나 혼자 대학생이고 과외로 용돈을 벌었기에, 빙수랑 커피 등을 샀다. 더운데 땀까지 함빡 쏟은 몸에 달고 시원한 게 들어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피지컬이 뛰어나서 내심 부러웠던 현진이가 내게 물었다.

“언니, 언니는 이미 평생 직업이 정해져서 너무 좋겠어요.”

“아니야, 꼭 그렇지도 않아. 나름의 고충이 있지. 현진이는 꿈이 뭐니?”

나의 질문에 동생은 아이스티를 한 모금 쭉 들이켜더니,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저는 중동 항공사에 취직해서, 중동 부자의 첩으로 살고 싶어요.”

순간 댕 하고 머릿속을 종으로 맞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고, 혼란스러웠지만 그 자리에서는 절대 티를 낼 수 없었다. 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왔다. 속절없는 환멸감이 밀려왔다. 물론 화자는 나름의 이유와 입장이 있었을 거다. 그러나 더는 깊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동안 노력했던 벽타기와 워킹연습, 다이어트에 신물이 났다. 3개월이면 경험으론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학원을 그만뒀다. 한동안 미(美)의 덧없음에 허망해하며 염세주의자로 살았다.     


여유로운 생활 속에서도, 특수목적대학교인 교대에서 학과 성적은 여전히 중요했다. 우리는 예비교사였지만, 임용고시를 반드시 통과해야 정교사로서 교단에 설 수 있었다. 4년간의 학부 성적은 임용시험 점수와 합산해서 총점으로 반영되기에, 내신도 잘 관리해야 했다. 나는 학기별 중간·기말고사 기간에는 모든 것을 끊고 시험에 몰입했다. 1학년 첫 중간고사 때 과탑을 한 이후로, 말 못 할 부담과 책임감이 그렇게 만들었다. 5월에 열리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1학기 중간고사 기간이라, 10월에 하는 부산국제영화제 자원봉사도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라 참가하지 못했다. 기간이 겹치지만 않았더라면 하는 야속함이 대학 생활 내내 사무쳤다. 한 번쯤 눈 질끈 감고 도전하거나, 휴학을 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정해진 진로에서 조금이라도 우회하거나 늦기는 싫었다. 한눈팔지 않고 최대한 충실하게 임한 결과, 교대 학사과정 내신 1등급으로 2월 졸업 후 3월에 바로 발령을 받았다.     


나의 초임교는 창작동요제 대상 수상 곡인 ‘노을’이 탄생한 시골 마을의 작은 학교였다. 발령일 당일, 새벽 세 시쯤 나는 정장을 차려입고 아버지 차에 올라탔다. 옷가지와 책, 노트북 등 짐꾸러미를 대강 챙겨 싣고 부모님과 함께 나의 첫 직장으로 출발했다. 홀로서기를 할 새집에 도착하니, 이미 8시경이었다. 나는 곧장 학교로 향했다. 부모님 배웅을 받으며 첫 출근을 하는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웠고,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부모님은 집에 계시면서, 하루 종일 침대며 책상, 세탁기, 텔레비전 등 살림을 장만하고 집을 정돈하셨다. 경황없이 교무실에 도착해 교감, 교장 선생님께 차례로 인사를 드리자마자, 아침 애국 조회가 시작되었고 모두들 운동장으로 나갔다. 전교생 친구들이 운동장에 줄을 선 모습을 보니 심장은 더욱 터질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이 끝나고, 새로 부임한 선생님 소개를 할 순서였다. 새하얘진 머리에서 쥐어짠 인사말을 즉흥적으로 쏟아내는 내 목소리가 동네방네 울려 퍼졌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도 들으셨다고 했다. 다 큰 딸의 뒷바라지를 하러 이 먼 곳까지 오셔서 고생하는 부모님께 너무 죄송하고 감사했다.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 이후 처음으로 부모님 슬하를 떠나 독립하는 딸이 얼마나 걱정되고 애달프실지 나는 짐작하고 또 짐작했다. 그날 저녁 엄마 아빠가 부산 본가로 다시 내려가시자마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 홀로 남은 집에 꽉 채워진 세간들을 보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고 또 느꼈다. 엄마는 내게 퇴근 후 집에 오면 텔레비전을 그냥 틀어놓으라고 하셨다. 딸이 외롭고 무서울까 봐 티브이 소리로라도 적막을 깨 주고 싶은 마음이셨던 게다.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도록 나는 더욱더 씩씩하게 생활했고, 학교에서 열심히 일했고, 아이들은 나를 무척이나 따랐다.     


나의 첫 학교 운동장은 굉장히 넓었다. 전체 10학급의 농촌 시골 학교였지만, 승진점수가 있는 경합지역이었기에 쟁쟁한 선생님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막내인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신규교사 취임식 날에는 교장 선생님 포함 선배 선생님들이 직접 오케스트라 연주를 해주셨고, 이대 성악과를 나온 특수학급 찬미 선생님은 아리아로 축하 무대를 채워주셨다. 이날 취임식에 참석하러, 아버지가 부산에서 한 번 더 올라오셨고, 행사가 끝나자 교감 선생님께서 아버지를 기차역까지 모셔다 드렸다. 낯선 타지에 발령받아 홀로 사회인으로 살아내야 하는 내게, 직장 분들은 기꺼이 가족의 빈자리에 들어와 주셨다. 그때 나는 모든 게 다 처음이라, 이런 성대한 취임식이 기본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란 것을 깨달은 건 내 연차가 쌓여 후배들의 입직을 지켜보면서였다. 그때 이후 나는 지금껏 이 정도의 신규취임식은 보지 못했다. 새내기 교사인 나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받아주신 그분들은 내 인생의 은인이셨다.     


교직 첫해 내가 맡은 분장은 4학년 담임과 6개의 업무였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학창 시절이 4학년이었기에, 이건 운명이라 생각됐다. 우리 반 학생들은 나를 바다처럼 품어줬다. 초임 교사의 혈기와 패기를 학급 운영 전반에 담았고, 아이들은 호기로이 응답하며 따라왔다. 당시 내가 정했던, 우리 반 교수학습 약속 구호는 무려 13종에 달했다. 아이들은 유치하다는 볼멘소리도 하나 없이 그 모든 걸 익혀서 나와 함께 소통해주었다. 멜로디를 얹은 메시지에 귀엽고 깜찍한 손 제스처를 더한 구호 만들기에 내 모든 창의력을 갈아 넣었다. 귀여운 우리 친구들이 이 깜찍한 구호를 활기차게 외치면 얼마나 더 빛날까를 미친 듯이 고민했다. 교사와 학생들이 합의 케미를 발하면 우리 반의 연대가 얼마나 더 고양될지를 생각하니 몹시 흥분되었다. 돌이켜보면 굳이 이런 걸 치열하게 고민했던 나의 발상이 가장 귀여웠으리라. 우리가 함께 우렁차게 외치는 교학상장 구호는 이후 5년 동안 계속되었다. 신규교사 첫해 4학년 이후 이듬해부터 4년간은 연속 6학년 담임이었다. 13종 구호가 막을 내린 건 1학년을 맡고 나서였다. 유치원에 다니다 갓 입학한 1학년 병아리들은 복잡다단한 13종을 소화할 수 없었다. 이후로는 짧고 간결한 3가지 구호만 살아남았다.    

  

시간이 흐르면 그때가 더 잘 보인다. 시간이 쌓은 경험의 힘으로 기억은 객관화된다. 사춘기 고학년 학생들의 오글거림을 무마한 건 순전히 담임에 대한 지지였으리라. 이토록 귀한 마음을 내어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참 많이 감사했다. 그리고 나 역시 순수함으로 빚은 온 마음을 다해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우리 학급 반가 동영상을 만드느라 밤새기 일쑤였고, 학급 환경 미화를 위한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서 꾸몄다. 대학생 때 배워둔 피오피 실력으로 아이들 이름을 일일이 다 페인팅 붓으로 써서, 작품란과 파일철 표지를 만들었다. 앞뒤 게시판 타이틀뿐 아니라 배경에 붙이는 꽃송이들도 직접 만들었다. 종이를 오리고 말아서 꽃잎을 구현하고, 작은 스티로폼 공을 쪼개서 색을 입혀 꽃망울을 만들었다. 거기다 반짝이 실을 오린 암술 수술을 글루건으로 붙이면 완성되는데, 한 송이에 대략 7분이 걸렸다. 이걸 수십 개 만들고 나면 이미 밖은 어두웠고, 내 손은 딱풀과 본드가 묻어서 굳은 시커먼 때 범벅이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저녁까지 이 짓을 하고 또 했다. 아무도 시킨 사람은 없었다. 그저 아이들이 좋아할 걸 생각하면서 나 스스로 고생을 사서 했다. 컬러 프린트 및 플로터도 다 있는 학교에서, 나는 자체 가내수공업 공장을 풀가동했다. 나의 갸륵한 정성이 아이들에게 학습 동기가 되어주길 바라며, 공을 들여 탑을 쌓고 또 쌓았다. 그리고 매해 3월마다 몸살을 앓았다.     


나의 교육 꿈동산은 아마존처럼 날로 무성해졌다. 하루가 다르게 싱그럽게 자라나는 아이들은 그 어떤 나무보다 파릇파릇 눈이 부셨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중자애(自重自愛)’와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쉽게 풀어서 자주 얘기해줬다. 교단에 서서 아이들과 호흡하다 보니 나름의 교육관도 정립되었다. 내가 생각한 교육의 목표는 아름답고 존엄한 ‘사람 꽃’을 피우는 거였다. 이를 위해 교사와 학생이 함께 가르치고 배우며 성장하는 정성스러운 활동과 시간이 바로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꽃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다채로운 지니고 있다. 나는 내 영혼의 열망과 육신의 열정을 쏟아부은 이 꿈동산에서 학생 한 명 한 명이 모두 각자의 고유한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기를 소망하였다. 이 숲의 주인공인 나의 학생이 꽃을 만개하는 나무가 될 수 있도록, 나는 그들이 비빌 땅이자 거름이 되어주고자 부단히도 애썼다. 신록으로 무성해지는 꿈동산에서 나의 청춘도 그렇게 흘러 지나갔다.      









#5. 일도사     


교직에 10년 이상을 몸담아오면서 나는 여러 별명을 득했다. 그 변천을 훑어보면, 삶의 국면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발령 직후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날 더러 미코샘이라 불렀다. 복도를 지나가는 다른 반 혹은 다른 학년 아이들이 우리 반 학급안내판을 보고서, 여기가 모델샘 반이라고 떠들며 지나가는 걸 교실 안에서 듣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나를‘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해왔다. 특별한 노력이 특별한 사람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기에, 내게 먼저 관심을 주는 아이들이 여하튼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6학년 담임을 하던 해, 방과 후에 교무실에서 선배 선생님이 우스갯소리로 이런 얘기를 하셨다.

“선생님, 우리 반 예성이 사물함을 열어보니, 문짝에 아이유랑 선생님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더라고요, 호호호. ”

그분은 1학년 담임이었기에, 의외였고 더욱 놀랐다. 아마 언니나 오빠가 우리 반일 수도 있겠다고 짐작했다.

     

나의 매일 아침은 모닝커피 이전에 모닝레터로 시작되었다. 출근해서 교실에 도착하면 내 책상에는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적은 아이들 편지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아이들은 정성이 가득 서린 글과 그림을 선물로 주었다. 수업을 모두 마친 후 청소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자기 자리 정리를 얼른 끝내고 득달같이 내게로 달려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책상 밑을 쓸어준다고 미니 빗자루를 들고 서로 난리였다. 한술 더 떠, 몇몇 아이는 내 신발까지 기어코 찾아와서 그걸 물티슈로 닦으려고 하길래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귀하디 귀한 고사리손으로 이러면 안 된다며 혼을 내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아이들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먹먹했다. 이렇게 맑고 선한 아이들 마음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들을 짝사랑하는 것이었다.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나를 행복으로 벅차게 했다.      


신규교사 시절의 여름방학은 잔인한 나날이었다. 방학 2주가 넘어가면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진저리가 났다. 개학 날만 바라고 또 바랬다. 아이들이 없으니 내 존재 의미가 상실된 듯했다. 그들이 내게 선사한 기쁨과 사랑에 비하면, 내 사랑은 아무리 커도 초라할 뿐이었다. 내 얘기를 신처럼 받들며, 충성스럽게 이행하는 아이들을 보며 내 언행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했다. 아이들의 대단한 사랑이 나를 대단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나는‘전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님’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초등학생은 1분 전에 좋은 일로 칭찬을 들었다가도, 곧바로 혼날 행동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종잡을 수 없이 변화난측하고 순진무구한 것이 어린이들의 특성이다. 보드랍고 다정하게 백날을 얘기해도 개선이 없는 친구의 경우, 엄하고 단호하게 반성을 촉구해야 겨우 시정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담임교사는 엄부자모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우리 반 아이들이 착하고 바르게 성장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만큼, 위악을 가장한 호랑이 호령도 주저하지 않았다. 나의 눈짓 하나에도 일사불란하게 활동하는 반 친구들 모습을 보고, 주변 선생님들은 그림 같다고도 말씀하셨다. 그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더 아팠다. 아이들이 잘 해내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학기 말, 아이들을 진급시키는 종업 날이 되면 언제나 펑펑 눈물이 났다. 내 진심을 이해해준 아이들이 한없이 고마운 만큼, 따끔하게 혼낸 시간이 너무나 미안했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매서웠던 나를 아이들은 너른 호수처럼 품고 온전히 이해해줬다.      


첫 임지에서 3년 반을 근무한 다음, 서울로 이사했다. 나의 두 번째 임지는 혁신학교로 개교한 50학급 이상의 큰 학교였다. 2학년을 맡게 되었고, 여느 때처럼 모든 열정을 불살라 손수 교실을 화사하게 꾸몄다. 그 모습을 인상적으로 본 당시 교무부장은 가을 학교 축제 포스터를 부탁했고, 아이들과 협업해서 의미 있는 그림 작품을 완성했다. 그리고선, 다음 해 부장 인선에 나를 추천했다. 그때 난 아직 신규인 2급 정교사였지만, 기꺼이 제안을 수락했다. 20대에 부장 보직을 맡는 건 상당히 두렵고 부담된 일이었다. 그러나 내 안의 나는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쾌재를 외치고 있었다. 발령 이후 몇 년간 아이들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은 결과, 수업과 생활지도 면에서는 이미 완성의 고지에 도달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학급운영에서는 어떤 상황도 두려울 것 없이 안정적이었기에, 살짝 권태로움이 스며들던 시기였다. 그래서 업무적인 부분에서 성장 욕구가 컸었고,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업무추진에 열을 올렸다.      


내가 몸담은 이 필드는 정년이 보장된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자칫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음을 나는 일찍 감지했다. 권태에 몸부림치는 나 자신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그 상황을 예방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학교에서 수업도 업무도 더더욱 잘하고 싶은 욕망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부장이 된 그해 여름방학 때, 나는 1정 연수를 받고 드디어 1급 정교사가 되었다. 본청에서 통보된 시험성적을 확인한 교감 선생님은 깜짝 놀라셨고, 만점 가까운 점수를 득한 나를 교무실 식구들과 함께 박수로 축하해주셨다. 남 앞에 서는 것을 너무 싫어하는 내가, 자원하여 연수생 전체 대표단도 맡고, 연수를 운영하는 연구사님도 돕고, 임용고시 이후 공부에 손 놨던 몸뚱이를 부단히도 혹사하며 치열하게 공부한 결과였다.      


예체능부장을 하던 2년간 내 별명은 행사의 여왕이었다. 체육과 문화예술 관련 교육 활동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대부분의 학교행사와 시설관리도 내 몫이었다. 특히, 가을 학교 축제를 앞두고는 3개월간 밤 10시까지 홀로 남아 야근을 했다. 50학급의 전교 학생 수는 천 명이 넘었고, 그 수에 육박하는 학부모님 천 명, 교직원 백여 명까지 동참하는 일주일간의 축제 운영을 총괄해야 했다. 신설 학교로 개교한 이래 첫 축제였고, 관련 사례가 전무한 것이 난제였다. 광활한 흰 도화지를 2천여 명 교육 가족의 연대로 채우는 것이 내게 주어진 미션이었다. 축제 네이밍부터 슬로건과 비전 제시, 세부 계획 수립부터 구체적인 운영방안 모색, 지원인력 섭외까지 모든 것이 내 머리에서 나와야 했고, 내 손과 발로 실현해야 했다. 나는 매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교 밖 사람들과 릴레이 미팅을 했다. MOU를 맺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을 함께 기획했다. 정말 많은 외부인들을 만났고, 대화를 나눴고, 행사를 준비했다. 간혹 내가 교사가 맞는지 정체성에 의문이 생길 정도였으니, 새로운 도전임은 분명했다. 퇴근시각까지는 협의를 했고, 이후에는 수렴한 내용을 담아 계획서를 만들었다. 고생하는 나를 위해 가끔 선배들이 우리 교실에 들러 간식을 건네거나, 저녁을 사줬다. 뒤에서 독려해준 그 언니들이 없었다면, 나는 중간에 주저앉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피와 살을 갈아 넣은 최종계획서를 교장 선생님께 드리니 이런 계획서는 처음 봤다고 극찬하셨다. 그리고 축제 기간 동안 모든 교육 가족이 다 함께 힘을 모아, 아이들의 배움에 연대했고,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해줬다. 그걸로 충분했다. 해냄의 희열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고통까지 마취시켰다. 그동안의 고생은 전혀 고생이 아니었고, 맨땅에 헤딩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난제가 닥쳐도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만 열심히 하면 다 될 거라는 확신에 몸이 전율했다. 해냈다는 기쁨은 나를 더욱 채찍질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받고 일을 했다. 혹여 우리 부서 계원이 병가나 휴직으로 공백이 발생하면 그 업무까지도 내가 다 백업했다. 나날이 일도사로 거듭났고 마냥 즐거웠다. 일을 척척 해내는 나 자신이 멋있다고 느꼈고, 권태가 전혀 생기지 않는 현재가 짜릿했다. 그러나 시간은 유한했다. 내가 할 일을 아무리 잽싸기 잘 처리해도, 업무는 화수분처럼 몸집을 더욱 불려 나갔다. 워낙 업무량이 많았기에 칼퇴근은 있을 수 없었다. 돌봄 업무까지 겸한 후에는, 저녁 돌봄이 끝나는 9시까지 남아서 관리 업무를 했다. 그런 내가 딱했는지, 친한 친구 수정이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

“쥬야, 우리 일급 6만 원이야. 몸 좀 사려.”

맞는 말이었다. 당시 신규교사 초봉은 180만 원 정도였다. 주 5일제 시행 전이라, 토요일도 등교를 하던 시절이었다. 한 달을 30일로 보고 나누면, 일급은 6만 원, 시급은 7500원인 셈이었다. 참 감사하게도, 친구의 단순한 그 한마디는 열정페이로 급발진 일변도였던 나를 잠깐 멈추게 했다. 그리고 현실을 반추하게 했다.      


나는 대학생 때 틈틈이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니즈가 높은 학생의 경우 하루 2시간 과외비로 30만 원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를 단순히 비교하면 차이가 무려 20배나 된다. 계산이 끝난 순간 마음 한 곳에서 씁쓸한 물이 밀려 올라왔다. 그러나 쓰라림도 잠시, 이미지 한 컷이 불현듯 떠오르며 마음이 이내 편안해졌다. 졸업식 날 곱게 단장하고 학사모를 쓴 채 찍은 독사진이었다. 교대 교정 가운데 ‘스승의 길’이라 새겨진 상징석 앞에서, 오른손을 힘껏 쥐고 파이팅을 외치던 나였다. 아련한 추억에 휩싸이면서 아까 잠깐 굳었던 마음은 마시멜로처럼 말캉해졌다. 마시멜로 위로 달달한 설탕도 서걱서걱 흩날렸다. 초임교 인사발령통지서를 받으러 간 교육청에서 낭독했던 ‘사도헌장’ 문구들이 설탕처럼 머릿속에 쏟아졌다. 애초에 돈을 바라고 입직한 게 아니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내 영혼이 좋아하는 일, 내 이성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닌 꿈나무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였다. 이곳에 몸담아 일하는 현재의 행복이 과분할 따름이었다. 사랑하는 친구가 쏘아 올렸던 위로의 말은 그 이후에도 가끔 떠올랐다. 번 아웃 위기가 닥칠 때면 자연스레 생각이 났다. 적당히 일하자는 ‘보신주의’ 느낌표가 아니라, 교직에서의 이 행복을 오래 영위하기 위해 건강도 잘 챙기자는 ‘자중자애’의 큰 쉼표가 되어주었다.     








#6. 사이렌     


학교와 지역이 함께하는 마을교육과정을 창의적으로 기획하고 혁신적으로 운영하며 거둔 혁혁한 성과들은 내게 현장 실천가로서 자긍심을 만끽하게 해 줬다. 2년간 예체능부장을 맡아 행사의 여왕으로 발로 뛴 내게 당시 연구부장님은 넌지시 물었다.

“여부장님~ 내년에는 연구부장을 해보면 어때요? 보통 교무부장은 교내 연장자 중에서 맡아도, 연구부장은 학교의 브레인이라서 없으면 밖에서 데려와야 해요. 내가 교무를 할 테니까, 자기가 연구를 해봐요.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요. ”

초임 때부터 선망하던 일이 내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마음으로만 꿈꿨고,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건만……. 너무나 감사하게도 현임 연구부장님이 내게 그 보직을 넘겨주셨다. 그렇게 교직 7년, 부장 3년 차에 나는 대규모 혁신학교의 연구부장이 되었다. 학급, 학년, 학교 교육과정을 총괄 기획하고, 특색 및 역점교육을 브랜딩 하는 일은 머리에서 시작해서 발끝까지 실천하며 다시 마음으로 정착하는 긴 여정이었다. 학교의 비전과 목표는 고유한 빛을 발현해야 하기에, 전체 학생, 교사, 학부모의 실천력을 담보해야 했다. 실천을 통해서만 교육과정은 살아 숨 쉴 수 있다. 생동하는 교육과정을 운영하려면 학교 교육공동체의 생각을 오롯이 담고, 교육청의 정책 철학도 품어야 했다. 학교가 가정, 지역, 교육청과 괴리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잘 나아가기 위해, 학교 안팎의 교육 요구를 잘 파악했고, 교육청 및 교육부의 정책문건도 제대로 해석하고 반영했다. 아울러 매일 교장, 교감, 교무부장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학교 살림을 밀착 케어했다.    

  

학교의 교육과정이 내 머리와 손을 통해 완성되고, 입을 통해 전달하는 기쁨은 매우 컸다. 매년 3월 초, 학부모총회 때 천여 명의 학부모님께 본교 교육과정과 평가 전반을 알려 드리는 자리는 연구부장만의 특권이자 큰 부담이었다. 교육 현장의 장면들이 사실감 넘치도록 정확하게 담겨야 하는 교육과정 문서 작업은 극도의 치밀성을 요구했다. 300페이지가 넘는 학교 교육과정을 완성할라치면 학년 말, 학년 초 수개월 동안 극심한 두통에 숨도 턱턱 막혔다. 그렇게 온몸으로 수개월 간 교육과정을 잉태하고, 3월에 결재를 득하여 수립, 즉 출산했다.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완성하고 운영할 때의 희열이 마약처럼 나를 붙들었다. 도저히 그만둘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일에 중독되었다. 그렇게 지금껏 8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연구부장을 도맡아 했다.

     

학교를 옮겨서도 나는 항상 연구부장이었고, 교무부장은 매해 바뀌었다. 연구부장 직을 오래 할수록 역량도 높아져서, 학교 간의 지역 교육과정 거버넌싱과 교육청 협력사업 네트워킹을 확장했다. 교육청이나 교육부 연구학교를 공모해서 선정되는 성취도 많이 누렸다. 온몸으로 부딪쳐 행한 다음 페이퍼로 완성한 계획서였기에, 내 손을 거친 공모 신청서는 거의 다 채택되었다. 연구학교 주무로서 사업을 총괄하는 기저에는 피나는 고민과 뼈를 깎는 고통이 항상 있었다. 이러한 노고를 통해, 여러 선생님들이 승진가산점과 전보가산점을 득하고, 학교장이 초빙교원을 받을 수 있는 포문을 연 건도 많은 보람 중 하나였다. 일하면서 가장 기뻤던 때는, 복잡다단한 업무 절차가 나의 고민과 노력을 통해 훨씬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다양한 주체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전달할 때도, 사람들이 나의 말과 글을 통해 즉각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워딩과 표현을 최대한 가다듬고 정제하였다. 공을 들인 세련된 메시지는 즉각적이고 깔끔한 피드백으로 응당 돌아왔다. 내가 좀 더 오래 고민하고 정확하게 해석하면, 복잡한 구조에서 간결한 핵심을 추출할 수 있었다. 에센스가 반영된 메커니즘을 적용했더니, 많은 이들의 불필요한 노고가 확 줄었다. 나의 고민 과정은 비록 거칠고 험준했지만, 결과는 매끄럽고 세련된 소통 프로세스를 창출했다. 업무를 보다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개선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깨어있는 정신과 뜨거운 의지, 치열한 반성으로 현장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0년 넘게 부장을 연임하며 교육 전반에 걸쳐 창의적인 업무 달성에 기여했다. 한 해 한 해 치열하게 나아가다 보니, 바라지 않아도 상은 따라왔다. 매년 교육청 표창장과 위촉장을 여러 건 받다 보니, 100장이 넘는 표창장과 위촉장이 쌓였다. 이른 나이에 교육부 장관 및 사회부총리 표창을 받았을 때는 온 가족이 기뻐했다. 교육 실천의 우수성을 인정받아서, 교육부 연수 강사로 전국의 선생님들께 사례 발표를 했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었다. 이렇게 업무에 쏟은 피, 땀, 눈물은 내게 벅찬 경험을 선물로 주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중책인 연구부장을 맡으면서도 학급 담임을 놓지 않았다. 교직 14년 내내 담임교사로 임하면서 가장 귀한 교육 주체인 학생들을 매일 만났다. 나는 우리 학급 아이들 소속이었고, 그들은 나의 보물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가꾼 화사한 교실에서 우리는 매일 만나 무럭무럭 자랐다. 내가 세상의 지혜 하나를 속삭이면, 아이들은 더 큰 반짝임을 담은 앎으로 우렁차게 화답했다. 격무에 시달려 피폐해진 나는 아이들 덕분에 숨 쉴 수 있었다. 그들의 밝은 웃음이 나를 구원하는 유일한 산소였다. 교학상장의 길에서 함께 웃고 울고 아프면서 나도 아이들만큼이나 무럭무럭 자랐다. 수업과 업무를 오래 많이 할수록 감각은 살아났다. 이 감각은 초 단위로 움직임을 분석하는 프로의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세밀하고 꼼꼼한 그리고 민감하고 정확한 느낌이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은 아카이브의 힘과 본능적인 감각을 타고 모든 일이 물처럼 흘러가는 경지에 이르렀다. 학교 현장에서 내가 접할 수 있는 업무는 거의 다 섭렵하고 나니, 안정감은 다시 이면의 권태로 나를 위협했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내게는 실로 새로운 국면이 필요했다. 본능이 암시한 경종 신호를 민감하게 인지했다. 나는 적극적으로 다음 단계를 모색했다. 그동안 매년 아이들과 가까이에서 만나왔다. 그러나 1년에 내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친구는 기껏해야 학급 내 30명 정도였다. 욕심이 났다. 기존의 교육체제를 개선한다면 더 많은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을 펼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에까지 생각이 도달했다. 나는 교육전문직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수채화 화실에서 수년간 함께 그림을 그리며 나를 예뻐하신 이웃 학교 교장 선생님의 소개로 나는 대단한 멘토를 만나게 되었다. 장학관 출신 퇴임 교장이신 멘토님 덕분에 초중고를 아우르는 훌륭한 부장님들과 학습팀을 꾸렸다. 학습 팀원들은 다들 내로라하는 교육경력을 지닌 분들이었다. 현직에서 오랫동안 교무, 연구, 인권 등 핵심 부장으로 일한 경력은 기본이고, 수년간 정책을 공부해서 내공이 깊은 프로들이었다. 우리는 함께 win-win 해야 하는 운명공동체였기에, 서로의 모든 것을 걸고 시험공부에 매진했다. 나는 팀의 막내였지만, 공동체에 절대 폐가 되기 싫었다.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고, 팀 과제를 완벽하게 완수했다. 내가 공들여 만든 페이퍼를 팀원에게 공유하고, 핵심 내용을 발제했다. 매일매일을 시험 전날처럼 살았고, 학교 근무가 끝나고 퇴근 시각 이후부터가 진짜 살벌한 시간이었다. 퇴근 후 나는 공부전쟁터인 집으로 다시 출근하였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또 줄이고, 학습 시량을 늘이고 또 늘이면서, 몸은 마르고 또 말라 갔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망각한 채, 미친 듯이 나를 공부로 채우고 또 채웠다.     


코로나가 세상을 엄습한 이후로는 온라인에서 팀 학습을 지속했다. 학습공간인 ‘공부방’을 만들고 토요방, 일요방, 화요방, 수요방, 목요방 등 거의 매일 만났다. 학습한 내용을 나누고, 테스트와 피드백을 반복했다. 팀 러닝도 매우 자주 했지만, 그보다 열 배 이상의 시간을 들여 혼자서 공부했다. 내가 많이 알아야 팀원들에게 기여할 수 있고, 또한 결국 혼자만의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흘러 흘러 드디어 시험일에 임박했다. 멘토님께서는 내가 실력, 내공, 명석함 등 모든 면에서 에이스라서 반드시 수석 할 거라고 누누이 호언장담하셨다. 많은 이들의 기대를 등에 업고, 시험장에 앉아 문제지를 받아 들었다. 처음 도전한 전문직 시험지 앞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문제가 기대 이하로 너무 평이하고 쉬웠다. 시험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교육 관련 모든 것을 대비하고 공부했던 터였다. 심지어 해외 교육 논문 및 포럼 원고까지도 섭렵해서 어려운 문제에 대비했던 나였다. 허망한 마음으로 14장의 시험지를 가득 채웠고, 찜찜한 마음으로 고사실을 나왔다. 1차 시험 발표일, 나는 너무나 담담했다. 당연히 합격했을 것이고, 그 뻔한 사실 앞에서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오후 3시, 교육청 홈페이지에 광속으로 접속했다. 그런데 심장이 쿵. 1차 합격자 명단에, 당연히 있어야 할 내 수험 번호가 보이지를 않았다. 진심으로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다시 심기일전해서 두 눈을 부릅뜨고 집중해서 명단을 봤다. 또 보고 또 봐도 내 번호는 없었다. 내 눈앞의 온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느낀 충격 못지않게 가족과 지인들의 당혹감도 컸다. 그러나 타인들의 반응은 내 안중에 없었다. 나는 절체절명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저 혼미할 따름이었다. 밤이 되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내 의식 속 시각은 여전히 오후 3시였다. 새벽 내내 인정할 수 없는 결과를 부인하며 몸서리쳤다. 날이 밝았지만, 내 눈은 여전히 칠흑보다 캄캄한 어둠을 보았다. 출근하는 버스를 탔다. 온 우주가 박살이 나버렸는데, 세상의 아침은 너무나 멀쩡했다. 만원 버스 속 사람들은 다들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내 모든 것이 파괴되고 바스러졌는데, 나를 뺀 세상은 놀랍도록 멀쩡했다. 이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서러웠고, 또다시 극도로 분노했다. 아무리 분개하고 부인해도, 내가 떨어졌다는 현실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눈을 창밖으로 향했다. 시선을 돌리자마자 눈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은 콧물과 함께 온 얼굴을 덮었다. 마스크 안으로 눈물 범벅된 얼굴이 들킬까 봐 소리를 꾹 참으며 계속 울었다. 마스크 덕분에 나의 오열을 버스 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숨어서 목놓아 우는 나 자신이 너무나 참담했다. 눈물을 가려준 마스크가 고마웠다. 마스크가 필수인 코로나라서 다행이라 여기는 나 자신이 견딜 수 없도록 불쌍했다.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은 듯한 냉혹한 참담함은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들었다. 출근길을 가득 채울 만큼 눈부신 5월의 햇살은, 나를 찬란한 슬픔의 봄으로 추락시켰다.     


시간은 흘렀고, 죽고 싶을 만큼 치욕스러운 나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분노 구렁텅이에 빠진 상태로는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살아야 했고, 살아갈 명분을 찾아야 했다. 감히 날 떨어뜨린 이 시험을 버려버릴까도 수없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죽을 만큼 노력했던 나의 귀한 청춘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긴긴 세월을 고스란히 교직에 바쳤고, 뼈가 부서져라 일하면서 현장에 기여했다. 실전 경험을 기반으로 모든 교육정책을 완벽하게 해석하고 통달하였다. 시험 응시자들 중에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부장 경력 및 표창과 업적 면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월등했던 나였다. 상반기 모범공무원 표창을 위해 작성한 공적조서가 총 41쪽에 달할 정도로 필드에서 탁월했던 나였다. 여기서 그만두는 건 그동안 몸 바쳐 희생한 내 인생에 대한 반역이었다.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내 모든 것을 걸어 보기로 결심하였다.     


세상을 모두 잃은 자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나는 너무나 가난했다. 다시 도전할 전쟁에 내포된 죽음만이 나의 전부였다. 하찮은 인간인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새로운 시간만이 새로운 싸움을 싸워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바탕이었다. 따라서, 가장 먼저 내가 한 일은 나를 하얗게 지우는 것이었다. 알량하게 남아있던 내 모든 자존심을 지구 내핵까지 처박아버렸다. 실패를 초래한 원인을 샅샅이 분석해서, 모든 책임을 내게로 돌렸다. 아무리 쉬운 문제라도, 답안은 가장 빛나고 평범을 뛰어넘게 써야 했었다. 문제의 표면상 내용을 넘어, 본질적 의미를 통찰하는 최고의 답안을, 나의 모든 앎을 농축해서 완벽하고 아름답게 담아냈어야 했다. 시험지를 받아 든 순간 번뜩였던 나의 자만심이 나를 무참히 실패하도록 한 것이었다. 실패자인 나는 이제 사람의 영역을 넘어서는 노력을 통해 실력과 자세를 다시 재건해야 했다.      


그런 나에게 정상적인 의식주는 허락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버리고, 모든 숨에 절제를 불어넣었다. 숨 쉬는 모든 순간을 성찰과 공부로만 채웠다. 밑바닥에서 공부하는 자에게 귀걸이는 말도 안 되는 허영과 사치였다. 화장품, 원피스, 액세서리 따위를 모조리 창고에 집어넣고 가장 미천한 행색으로 일관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내 눈은 정책문건만 보았고, 내 귀는 그것을 녹음한 내 목소리만 들었다. 자면서도 공부했고, 깨어서도 공부했다. 오로지 학습하고 암기하고 반성하고 성찰했다. 300쪽이 넘는 논문을 매일 한편씩 정독해서 답안에 녹여냈고, 근사한 워딩 하나를 건지기 위해 두꺼운 단행본도 하루 만에 독파했다. 공부한 책들은 온 집안에 가득 쌓여만 갔다. 침대 가장자리까지 쌓아 올린 책 무더기를 피해 겨우 쪼그리고 새우잠을 잤다. 등을 펴고 반듯하게 누울 수 없었기에, 잠은 깊이 들지 못했고 두세 시간 만에 바로 깨어나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냥 나는 나이기를 포기했다. 그래야 고통이 덜했다. 내 처지의 참담함에 몰입하면 곧장 죽을 것만 같았기에, 살기 위해 오로지 공부 생각만 했다. 공부하는 나를 공부하는 메타인지만 가동했다. 어떤 난관도 헤치고 나갈 나만의 칼을 갈고 또 갈았다.     


결전의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콜택시를 불러 타고 빈속에 홍삼 진액 두 봉지를 목구멍에 때려 넣었다. 작년 첫 도전 때의 흥분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저 가슴이 웅장할 뿐이었다. 어떤 공격도 맞설 준비가 모두 끝났으므로, 내 인생을 가를 문제를 숙연히 기다렸다. 어떤 문제가 나오더라도 나는 맞출 것이었고, 단 한 명을 뽑더라도 내가 뽑힐 정도로 단단하게 중무장했다. 세상의 어떤 변수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강력한 핵무기를 보유한 채 전쟁터로 향했다. 언제나 상상했었다, 시험장의 공기를. 늘 생각했었다, 시험이 끝났을 때의 나를. 시험이 끝나는 그 시각, 나의 백골은 다 흩어지지 않을지, 내 몸이 모조리 다 부서져서 날아가지 않을지를 상상했다. 내 인생의 모든 시간은 그 순간에 집약되었다. 그 순간이 닥치면, 모든 것을 토해낸 나는 복도에 주저앉아 펑펑 울 것 같았다. 왜냐면 내게 허락된 모든 시간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 너무나 두려운 미래, 언제나 숨 쉬던 미래가 현재가 되었고, 시험이 끝났다. 그렇게 두 번째 나의 도전이 장렬히 막을 내리고, 내 시간은 거기서 멈추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기차를 타고 언니네 집으로 내려갔다. 내 모든 것을 주어도 부족할 만큼 너무나 사랑하는 조카 도은이가 나를 안아줬다. 아기는 내 생명의 신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순수한 존재인 우리 아기를 보면, 절망감이 희망으로 소생했다. 도은이를 보러 가는 건, 무참한 고생을 한 내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아기 공주는 부엌에서 스타벅스 컵에 정수기 물을 받아서 내게 갖다 줬다. 도은이가 말했다.

“이모, 이것 봐. 컵에 이모가 그려져 있네? 이건 이모 컵이야, 이모 컵. ”

스타벅스 컵에는 사이렌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인어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딴 사이렌 얼굴이 나와 닮았다고 느꼈나 보다. 바다를 자유로이 유영하는 사이렌이 부러웠다. 내 심장에서는 계속 사이렌이 울렸다.


시험이 끝나고 발표일까지,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내가 있는 세상에서 나는 살지 못했다. 이승인지 저승인지,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직 신의 뜻을 기다릴 뿐이었다. 발표 전날, 이미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퇴근 후, 억수로 내리는 비를 뚫고, 예술의 전당 챔버홀로 향했다. 이날 연주회는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의 ‘소음과 음향’이라는 ‘세상의 모든 소리 프로젝트’ 공연이었다. 혼미한 내 정신을 돌려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불협화음이었다. 첼리스트가 선보인 이 날의 연주는 또다시 재연하기란 절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선율은 너무나 괴이했지만, 신기하게도 무질서 속에서 질서가 느껴졌고, 효란했던 내 마음도 눌러주었다.


최종 발표 당일, 전날의 연주회 덕분에 영혼의 격앙된 흥분을 겨우 잠재우고 담담한 마음으로 학교에 출근했다. 머릿속에서 지난 세월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한없이 내려갔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사력으로 버티고 버티다 못해, 끝내 나를 내려놓고 싶을 땐 살려달라고 몸부림쳤고, 구해달라고 신께 빌었다. 온몸으로 부딪친 나는 산산조각이 났다. 어느 한순간도 절대 쉽지 않았다. 그냥 혼자서 꺽꺽대며 눈물이 흐르는 순간은 심장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고행의 대장정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대천명의 시간……. 이승도 저승도 아닌, 현세도 내세도 아닌,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죄의식이 항상 나를 지배했었다. 상실된 나의 정체성을 제발 찾고 싶었다. 내가 갈 곳이 교육청인지 한강물인지를 판결받는 기로에 서서, 나의 목숨이 달린 발표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내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음을,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음을 오직 신만은 아실 거라고 믿고 또 믿었다. 처절할 만큼 가여운 나를 부디 굽어살펴 주시기를 애원했다. 나를 구해주시면, 나를 살려주시면, 내가 세상을 구하겠다고, 간절하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기도했다.     


오전 내내 수업을 하였다. 아이들과 교실에 함께 있으니 그나마 마음이 든든했다. 분주하게 국어를 가르치다가, 쉬는 시간에 잠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업무 메신저 팝업을 알리는 주황색 불이 깜박였다. 왠지 모를 싸한 기분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철근처럼 가라앉았다. 메시지를 여는 찰나가 영겁처럼 느껴졌다. 이웃 학교 교감 선생님께서 보낸 쪽지를 보자마자, 나는 교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부장님, 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

교장 선생님들과 본청 장학사님도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우리 여부장이 최연소 합격자네요, 대단해요. 축하합니다! ”

드디어 응답을 받았다. 내가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다. 순간 기쁘지 않았다. 감히 기쁠 수 없었다. 그저 너무나도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이젠 나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아, 너무나 감사했고 안도했다. 암담함, 참혹함, 비정함, 슬픔과 연민으로만 가득 찼었던 고통의 세상에서 탈출해, 이제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모두 다 느껴볼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우리 딸,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서 편히 좀 쉬어라. ”

아빠가 보내신 카톡 메시지를 보고 또 보았다. 두 눈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심장에서 쿵쿵 울려 퍼지면서, 니체의 글이 떠올랐다.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

기존의 자신을 죽이고 극복할 수 있을 때만이 새로운 자기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한강으로 갔다.      


강물을 바라본다.

물결이 잔잔하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렇게 자연 앞에서 사색하는 게 얼마 만인가. 가만히 침잠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도 감사하다.     


바람이 분다.

강 표면을 훑어서 물결을 일렁인 다음, 내게로 다가온다. 바람은 내 마음의 결도 살포시 어루만져 준다.      


세상으로 나아간다.

앞으로 나는 분명 많이 아플 테고, 많이 슬플 테다. 그러나 이미 고통의 극한을 겪었기에, 좀 더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한강 물의 깊이를 가늠하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눈을 감는다. 내 마음속 보이지 않는 내밀한 곳까지 닿기 위해 강바람을 깊이깊이 들이마신다.


내 마음 속 나를 찾는다.

내가 보인다. 여리고 순수한 내가 보인다. 내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어 준다. 마음껏 세상을 만나라고 토닥토닥.     



intro 그림 제목: 사색 / outro 그림 제목: 다짐 / 그린 사람: 여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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