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같은 부담감을 방어하는 유일한 방법
입학식 날은 옷깃이 빳빳한 교복을 갖춰 입었다.
눈물 한 바가지와 맞바꾼 짧은 단발머리와
검정 스타킹에 흰 양말 등 못생김으로 완전무장하였다.
입학식이 시작되고 신입생 선서 때 갑자기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운동장 구령대로 올라갔다. 처음 본 사회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또박또박 선서문을 읽고 마지막에 내 이름을 말했다. 내가 신입생 대표라니. 반편성고사에서 전체 1등을 해버린 나는 관심을 갖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3월 첫 주 동안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꼭 한 번씩 물어보셨다.
“여기 여현주가 누구니?”
그때마다 내 얼굴은 빨강을 넘어 자주색이 될 만큼 달아올랐다. 제발 이번 과목은 그냥 넘어가길 기도하면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신학기도 보름이 흘렀다. 중1 수학 첫 단원은 늘 그렇듯이 ‘집합’이다. 합집합과 교집합을 배운 다음에 차집합, 여집합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서 사건은 터져버렸다.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 수학 선생님은 그날도 작은 궁서체로 칠판을 가득 채운 다음, 소리 높여 개념을 가르쳐주셨다.
“여러분~ 여집합은 여현주 집합이죠, 허허허!”
순간 제트기가 미사일로 가격한 듯, 뒤통수가 아찔했다. 교실이 떠나갈 듯 호쾌하게 지르는 친구들의 웃음 폭격은 내 이마를 한 번 더 강타했다. 어질어질한 정신 줄을 겨우 붙잡고 나니, 불현듯 원망이 치솟았다. 연로한 선생님의 고리타분한 구식 농담이 야속했고, 답정너 농담에 응답해준 친구들의 어쭙잖은 공경심이 미웠다.
나의 이름이 회자될 때마다 내 안의 부끄럼둥이 아기는 온몸을 떨며 울었다.
원치 않는 관심이 너무 싫었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부담으로 남겨졌다. 가슴에 송곳처럼 박힌 부담감이 나를 더 깊이 찌르지 않도록 방어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이미 받아버린 그들의 기대를 현실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나는 더욱더 학습에 매진했고, 점점 더 공부 기계가 되어갔다. 전교 1등이라는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아야 했다. 그래야 어떤 상대든, 어떤 상황이든, 그 어떤 변수에서도 안전하게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내 밖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것들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서 모든 전쟁을 치러야 했다. 예측한 상황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고, 문제 해결에 필요한 역량을 갖추기 위해 나는 007(더블오 세븐) 요원으로 화했다. 지독하게 나를 몰아붙이고, 혹독하게 나를 단련시켜야 겨우 제임스 본드 시늉이라도 할 수 있으므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좋아하지 않는 과목의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심신의 에너지를 더 많이 쏟아야 했다. 체육 농구 수행평가에서 만점을 받기 위해, 깜깜한 새벽 다섯 시에 혼자 마을 운동장에 나가 자유투를 연습했다. 모두가 잠든 어둠 속 무서움 따위는 느껴서는 안 될 사치였다.
첫날 한 골도 넣지 못했던 내 비루한 손은 일주일간 미친 연습을 거치고,
시험 날 농구공 열 개를 연속으로 골대에 넣어버렸다.
지지리 싫어했던 한문과 세계사는 단기 기억으로 압살해야 했기에, 시험 전날 밤샘 암기가 절대적이었다. 아침 해가 뜨기 시작하면, 급박해지는 마음과 함께 어김없이 새빨간 코피가 쏟아졌다. 한자책 위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시뻘건 피보다 더 무서운 건 시험에서 한 문제라도 틀리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