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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침잠mania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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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주 Jul 13. 2022

만년 전교 일등의 비애

사춘기 소녀에게 사춘기는 없었다

중입 선서문을 낭독한 열네 살 소녀는
특급 노력을 불사한 끝에 명 받은 미션을 완수했다. 


중학교 3년간 학기마다 치르는 총 열두 번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전교 1등의 자리를 사수하였다. 에이전트(agent)의 수행 영역은 비단 학교 안만이 아니었다. 다니던 학원은 성적순대로 A1~A5, B1~B5, C1~C5 체계의 총 15개 반이었는데, 지역 내 내로라하는 전교 1등 학생들은 나와 같은 A1반이었다. 분기별로 학원 내 자체 모의고사를 쳐서 클래스를 조정하고, 상금을 주기도 했다. 





내가 학원 모의고사에서 1등 상금을 받은 날, 엄마는 우리 딸이 돈을 벌어왔다며 무척 기뻐하셨다. 중2를 마치고, 아버지 사업으로 창원에서 부산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내가 떠날 때 친구들은 무척 놀라며 아쉬워했지만, 웃음 섞인 농담도 흘렸다.


“앞으로 우리 학교 애들은 전교 등수 하나씩 올라가고 거긴 내려가겠네!”


친구들의 웃는 얼굴과 잘 가라는 다정한 인사에 나도 환한 미소로 작별했지만, 이 말은 두고두고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친구들은 내가 이사한 후에도 분기별로 손편지를 써서 보내주었다. 내 소식을 물었고, 그들의 안부를 전했다. 나는 친구들이 예상했던 1등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 안도했지만, 한편으론 무척 서글펐다. 전학 간 학교에서 곧장 적응해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급요원인 나에게도 절대 만만치 않은 미션이었다. 더구나 중3은 질풍노도의 시기가 아니던가. 나는 힘든 여건을 뚫고, 결국 해낸 나 자신이 참 대견하였다. 그러나 이런 나를 바라보는 양가적인 친구들의 마음을 생각할 때면 심장 한쪽이 저릿하게 아팠다.


내가 떠난 학교의 친구들은 기뻐했고, 내가 찾은 학교의 친구들은 나를 경계했다. 


나는 어딜 가나 친구들에게 순수하게 반가운 존재일 수 없었다. 이걸 깨달은 후 밀려오는 서글픔은 시리고 또 아팠다. 공부하는 것도 넘치게 고달픈데, 겨우 해낸 내가 떠안아야 할 외로움의 무게가 무참히도 가혹했다.


      


사춘기 소녀에게 사춘기는 없었다. 


이차 성징에 따른 심신의 기복도 비켜 갈 만큼 치열하게 공부에 매달렸던 십 대 소녀의 의식을 장악한 것은 학습의 희열과 세속에의 환멸이었다. 


의지의 숭고함, 노력의 처절함, 성취의 이중성이
차례차례 인식의 바다에 밀물처럼 밀려들어,
세차게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기쁘고 외로울수록, 벅차고 억울할수록 마음속 깊은 바다 밑을 들여다보았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바라보면 어떠한 물결도 일지 않는 차분한 그곳에 내가 있었다. 침잠하면 내가 보였다. 내 여린 영혼이 무사히 잘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뭍으로 올라와 미움받을 용기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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