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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l 11. 2022

[주간단남] 7월 1주 차 아침 생각

22.07.03(일) - 22.07.09(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7.03 (일)


(..)

나는 여전히 생각이 길어서 행동을 자꾸 놓칠 위기가 매 순간 찾아온다. 변해야지, 변해야지 말은 하지만 글쎄, 정말 변하고자 하는가? 머리로만 변화를 얘기하지, 아직 가슴으로까지 함께 그것을 외쳐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머릿속에서 펼쳐진 한바탕 사투 끝에 책상에 앉았다.

(..)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영화도 좋지만 불편하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좋다. 사람이 불편함을, 그것도 알듯 말듯 묘한 느낌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오히려 본인이 그게 무슨 느낌인지 전혀 모를 그런 생경한 감정이 아니라 간당간당한 경계에 있어서 더 묘하고 찝찝한 느낌이 들게끔 하는 것이 그의 영화의 스타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런 인간의 왜곡된 본능이 드러나는 시점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시선, 가령 시체가 보는 시점, 죽은 생선이 보는 시점, 그리고 스마트폰 액정의 관점에서 사용자를 올려다보는 시점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본능에 의해 이성적 판단을 상실한 사람들의 민낯을 거울처럼 되비쳐 주는 연출이 굉장히 신선했다. 

(..)

결혼의 본질은 사실 그런 결심에 있는 것이다. 마치 내가 스스로 매일 아침 5시 기상과 모닝 페이지 쓰기, 명상 1시간 하기를 '지향점'으로만 삼고 '법칙'으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숱한 타협의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것처럼, 결혼식이라는, 타인 앞에서의 공표와 혼인 신고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결속력 강화에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인간은 실로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보조 수단의 역할은 매우 크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의 존재 여부와는 별개로 개인의 수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

맥주나 탄산음료가 기가 막히게 달콤하고 시원할 때는 그것이 최고급 제품일 때가 아니라 매우 덥고 습한 날씨의 끝에서, 고된 노동 끝에 마침내 등과 같은 '어려움'의 끝이 있을 때이다. 인생이 달콤한 것은 쓴맛을 겪어봤기 때문이요, 쓴 것은 달콤함을 맛봐봤기 때문이다. 

쾌락만을 좇는 삶은 균형이 무너진 삶이다.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여가며 거기에서 파생되는 여러 감정과 생각들을 곱씹고 음미하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이다. 삶은 아름답고 또 추악하다. 미추를 두루 경험하면서 그 어디에도 휘말리지 않을 굳은 내면의 심지를 가꾸는 삶. 그것이 군자의 살, 구도자의 삶이요 모두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리라.

(..)

정해지지 않은 것은 막막함과 동시에 즐거움을 준다. 무엇을 정해두고 무엇을 열어둘 것인지가 그 사람의 삶의 양상을 결정짓는다.



22.07.04 (월)


(..)

본격적인 하반기의 시작이다. 내가 그리는 삶을 실제 그림으로 옮겨 나가기 시작하자. 알바의 형태가 되어도 좋으니 이곳저곳을 통해 내가 위로하고 도울 수 있는 곳을 찾아 영향력을 당장 끼치기 시작하자.

(..)

인생은 실제로 한 편의 영화요, 하나의 게임에 불과하다. 그러니 여기에 지나치게 골몰하고 두려워하며 걱정하고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삶을 대충대충 살라는 게 아니다. 늘 진심은 다하되, 마치 그것이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절망을 담보로 전념하며 살지는 말라는 것이다. 중요도를 지나치게 높게 부여하면 문제가 반드시 생긴다. 

(..)

걱정보다는 설렘이 앞선다. 세상이 나를 자연스레 필요한 곳으로 이끌 것이다. 뭐든지 'learn by doing'이 되도록 하자. 그래야 실력도 는다. 내가 배우는 것은 결국 써먹기 위함이다. 배움과 활용이 병행되는 것이 가장 빠른 성장의 지름길이리라.




22.07.05 (목)


(..)

어제 주간단남 썸네일 글자를 쓴 것을 보고 글씨체 칭찬을 받았다. 크크 어느덧 6개월.. 꾸준히 필체 교정 연습을 한 보람이 있다.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무언가에 정진한다면 누구나가 그에 준하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이것은 누구는 되고 누구는 되지 않는 확률 게임이 아니다.

자연의 법칙은 철저한 인과율에 의거한다. 만일 무언가 잘되지 않았다면 거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존재한다.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그 모든 원인을 파악할 수가 없다. 똑같이 1시간을 앉아 있어도 그 사람이 오롯이 그 순간에 머물며 집중하고 있는지가 다르기 때문이고, 기존에 그 사람이 지니고 있던 습관들과의 상호작용의 영향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동기부여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때이다.




22.07.06 (수)


(..)

우리 사회는 증상을 제거하기에만 급급한, 그리고 그것을 치료라고 일컫는 의료 시스템에 완전히 주도권을 내어주고 만 상태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을 1차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게 아니라, 모든 판단과 결정을 의사에게 맡기고 의존해 버리는 것. 그게 바로 환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주권을 포기한 것에 다름없는 것이다. 


내 건강은 내가 책임지고 챙겨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의사는 내가 아프면 무조건 고민도 없이 찾아가서 보고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거나 되찾기 위한 과정에서 도움을 줄 수단이지 우리가 취해야 할 목적이 아니다. 

한의학이나 그 밖의 다른 수단을, 기능의학, 대체의학(이 단어의 어감도 참 별로다. 사실 서양의 근대 의학이야말로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기존 치료 시스템을 대체한 주체이기에 엄밀히 따지면 서양 의학을 대체 의학이라고 해야 맞다.) 그리고 자연 치유 등은 그러한 과정에서 모두 검토해 볼 수 있는 같은 도구들인 셈이다. 내 몸의 다양한 기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각 도구들의 특징과 장단점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건강 주권이라는 개념도 유명무실해지지 않는다.

(..)

'빚'의 올바른 활용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전략, 다시 말해 더 큰 것을 벌어들이기 위한 일시적인 손해 감수로 활용될 때뿐이다. 모두가 그런 명분으로 처음엔 빚을 냈다가 어느새 초심을 잃고 말았으리라. 나는 어떤가? 나의 현재 경제관념에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담겨 있나? 현존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대비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22.07.08 (금)


(..)

참여자 전원이 그렇게 한다고 한들, 행사 주최 측에서 행사를 위해 사용하는 일회용품의 숫자가 훨씬 압도적이다. 결국 플라스틱이나 기타 일회용품, 각종 쓰레기를 줄이려면 이와 같은 행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돈 냄새 맡고 돈을 쓸어 담으려 모여드는 상업적 행사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말이지만 동물이 불쌍해서 고기는 안 먹지만 고기 맛은 못 잊겠어서 삼시 세끼, 365일 내내 대체육만 찾는 비건이 있다면 그게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그것은 교조주의에 가깝고 신념에의 맹목적인 추종으로 스스로를 정신적 감옥의 수감자로 밀어 넣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이 있다고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지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스스로를 모범 시민이라고 독려하는 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기계나 로봇에 가깝다. 그 법이 왜 만들어졌고, 목적이 무엇인지를 한 번쯤은 헤아려 볼 생각을 해야 시대적, 환경적 변화에 맞춰서 그 타당성을 평가해 볼 수 있으리라. 마찬가지로 비건이니까 이래야 한다는 기계론적 인식에서 탈피하여야 한다. 비건의 덕목이라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덕목들을 무슨 체크리스트처럼 머릿속에 떠올려가며 남들 눈에도 자신이 비건으로서 적합해 보이는지를 신경 쓰는 것이 행동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패션 비건이다.

(..)

진짜 환경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으로 환경을 사랑하는 열의를 보이는 것을 오롯이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페스티벌이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닐까? 혹은 주최 측에서 환경사랑에 필요한 비용의 상당 부분을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

태초에 근본적 동기, 개개인적 관점에서는 '초심'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소위 '후발주자'들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들의, 그것이 개인이든 기업이든, 동기는 본질적으로는 가치 추구에 대한 열의가 아니라, 어떤 큰 흐름, 다시 말해 트렌드에 대한 관심과 열정에 가깝다. 거기에 친환경이라는 그럴싸한 라벨을 덧댈 뿐이다. SNS가 없었다면, 자신이 그런 흐름에 동참하는 멋진 사람/기업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드러낼 수단이 없었다면, 진짜 근본적인 환경주의자들만이 남고 모두 흩어지고 마리라.

유행이라는 건, 그리고 그런 유행을 부추기는 미디어라는 존재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 놓았다.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주된 동기가 남들도 그렇게 하기 때문이라면, 대체 그 개인이 오롯이 혼자서 내리는 결정이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먹고 싸는 것? 이제는 그런 생리적 욕구마저도 미디어가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에 통제받기를 자발적으로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우리는 자연이 선물한 육체적 정신적 주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남들처럼 사는 것 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혼자서는 어떤 결정도 쉽사리 내리지 못하는 주체성의 결여에 있다. 초연결 시대로 갈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인간은 각기 다른 영혼을 지닌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은 채 눈을 뜨고 있지만 잠들어 있는 것과 다름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들을 비난해서도 원망해서도 안 된다. 무엇이, 누가 그들을 그런 좀비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만드는가? 우리가 주목해야 하고 화살을 겨누어야 할 대상은 우리와 같은 대중이 아니라 그런 흐름을 만들어낸 그 무엇 혹은 누군가이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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