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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ug 22. 2022

壬寅년 戊申월 세 번째 기록

22.08.14(일) - 22.08.20(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8.15 (월)


(..)

지나고 보면 그저 각자의 입장이 있는 것이고 그 각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행동하고 사고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거기에 화가 나는 것은 자기 관점만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각자가 대치하는 과정은 주관적 세계 간의 충돌이기에 어느 한 쪽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방식으로는 타개될 수 없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적어도 제3자의 몫이어야 한다. 혹은 충돌이 끝난 이후 서로가 각자의 언행과 관점의 적절함과 부적절함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풀어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갈등 당사자'들은 상대를 설득하거나 누르거나 하는 등의 각자만의 방식으로 '승리'를 쟁취해 내고자 고군분투할 뿐이다. 

내가 틀릴 리는 없어! 잘못된 것은 너야!라는 편협하고 유치한 마음. 아직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에고가 자기보호를 위해 애쓰는 안쓰러운 몸부림이다. 그게 갈등의 본질이요, 민낯이다. 여전히 갈등에서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는 나는 미성숙한 사람이다. 

나이에 무관하게 갈등의 당사자로서 이따금씩 이성의 통제를 상실하여 언성을 높이고 자기감정만을 앞세우고 있다면 그는 미숙한 사람이다. 인간은 삶에서의 미숙을 성숙으로 무르익도록 만드는 농부와도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열매가 있지만 하나같이 지닌 공통점이 있다면 각자가 가장 좋은 상태로 점점 익어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왜 사람은 본인 자신도 잘 하지도 못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요구하나? 그는 그럴 자격이 없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제안할 사람이라면 자고로 솔선수범하는 사람이며, 언행일치가 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조언'에 관해 일반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옛 선현들의 말씀은 대부분이 당위성을 띤 조언의 형태를 보인다. 거기에 대고 '흥, 네가 뭔데 훈수질이야! 꼰대야 뭐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소위 MZ 세대라며 추켜세우는 우리 세대에게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꼰대라고 응수할지도..ㅋㅋ)

조언은 무거워야 한다. 조언의 무게는 그것이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앎이라는 지혜를 싣고 있을 때에만 늘어난다. 해보지도 않고, 혹은 자신도 잘 못하는 그런 조언이나 요구 따위는 고이 접어 가슴속에 넣어두도록 하자. 가볍디가벼운 조언을 어설프게 꺼낼 시간에 자기 자신을 먼저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자. 



22.08.16 (화)


(..)

한국에 먹방 열풍이 불기 훨씬 이전에 먹방러로 활동한 사람이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원조답게(?) 자기만의 스타일로 일관된 식사 모습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그의 스타일은 국내 열풍을 일으킨 말도 안 되는 양을 먹거나 자극적인 음식 조합을 개발하거나 요란하게 먹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먹방이 아니라 하나의 식사 그 자체다. 그의 식사에는 일본 특유의 담백함이 돋보이는 요소들을 두루 갖췄다. 적당한 양의 음식을, 편식 없이 고루 먹으며 사소한 반찬 하나에도 애정 어린 시선을 담아 꼼꼼하게 맛을 평가한다. 거기에는 음식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랑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

그가 음식을 먹을 때 드러내는 행복감은 도파민보다는 세로토닌에 의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그만큼 그 순간에 온전히 머물러 행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잊는 몰입의 경지에 다다른 것을 보여준다.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식사를 할 때는 스마트폰 알림 확인도 잊고, 유튜브도 보지 않는다. '라방'이니 뭐니 해서 자신의 팬들과 실시간 소통을 하며 먹느라 식사에 대한 집중을 100% 하지 못하는 상황 역시 없다. 그래서 그는 고독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진정한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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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군침을 당기게만 하는 것이 요즘의 먹방이라면, 고로상의 '미식 행위'는 군침은 둘째 치고 보는 이로 하여금 흐뭇함으로 마음이 흡족해짐을 느끼게 만든다. 그가 음식에 집중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의 몰입에 함께 젖어드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고로상의 먹방은 자극 일색인 세간의 콘텐츠들 속에서 늘 자기 자리를 홀연히 지키고 있는 구수한 집 밥 된장찌개 같은 존재다.

(..)

고로상과 과나는 모두 자극 일색으로 난무하고 범람하는 콘텐츠 춘추전국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그만의 확실한 개성,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흉내 내기 위한 기준으로서의 방향성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개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기만의 스타일을 꾸준히 개발하여 자기 자신이 곧 하나의 새로운 장르가 되는 사람들이다.

(..)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아티스트의 삶이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대중의 찬사를 받고 사는 사람들만이 아티스트인 것은 아니다. 혹은 소위 교양 있는 일부의 사람들만 향유하는 특정한 형태의 예술이라는 좁은 분야에만 한정 지어 고도로 집중된 역량의 산출물을 만들어 내는 형태만이 아티스트적인 것이 아니다. 

삶을, 일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라는 대상에도 (당연히 개인별 취향이란 게 존재하니 모두가 그것을 좋아할 순 없겠지만) 이렇다 할 진입장벽이란 것이 없는 것. 그것 또한 아티스트이며 오히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모든 아티스트들이 이 정의를 따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나만의 개성을 어떤 수준으로 승화시키기기 위해서는 부단하고 일관된 무엇이 필요하다. 무어라 한 마디로 정의하기엔 아직 정체성이 모자라지만 계속해서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될 테지.

(..)

부처의 가르침처럼 매 순간에 깨어있는 것. 현재에 충실한 것. 그것이 명상이고 수행이다. 산에 은거하는 것만이 수행이라고 하는 사람은 일상을 게으르고 무의식적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 변명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삶 자체가 곧 수행이다. 그것은 오직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22.08.18 (목)


(..)

매 순간이 살아있는 생생한 순간인 것이 아닌, 그저 반자동적으로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 그럴 때 우리는 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외부의 자극에 대해 늘 비슷한 패턴의 반응을 보인다. 그러다 보니 일어나는 일들 또한 늘 비슷한 일 투성이다. 그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 역시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이라 매번 똑같다. 자신의 삶이 마치 고여있는 물처럼 정체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양상으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

확실히 실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우리는 매 순간 새로이 태어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오늘 하루가 흘러가면 그것은 사라지고 없다. 그에 대한 장면만이 잔상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순간들은 지금껏 다 어디로 흘러갔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지난 평생의 기억의 장면들을 시간순으로 한데 이어 붙여 영상으로 만들어도 30분을 채 넘기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축복이다.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다. 전생이 있다고 가정해 보면, 윤회를 통해 세상에 다시 내려올 때 과거의 모든 기억을 지니고 태어난다면 과연 새 삶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있을까? 마찬가지로 이미 흘러간 어제의, 한 달 전의, 어느 시점이 되었든 자신의 주의력을 계속해서 앗아가는 기억 속 '잔상'으로만 존재하는 그것을 떠나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실재하는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르지 못할 수밖에 없다.

윤회를 하기 전 '망각수'를 들이키고 새 삶을 살게 되듯 매일을 사는 우리 역시도 일상에서 망각수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그것은 깊은 수면이 될 수도, 명상이 될 수도, 몰입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저승에는 망각수 하나만 있을지 몰라도 이승에는 실로 다양한 망각의, 현존의 방식이 존재한다. 

다만 지우개로 지우듯 말끔하게 지난 기억들을 완전히 지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굳이 완전한 삭제까지 필요할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자아를 규정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짓는 상당 부분이 기억이다. 기억의 순기능을 살려두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100% 완전한 망각의 기능까지 갖고 태어나진 못한 것이다. 세상이, 그리고 그 일부인 인간이 그렇게 생겨먹은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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