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Aug 29. 2022

壬寅년 戊申월 네 번째 기록

22.08.21(일) - 22.08.27(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8.21 (일)


(..)

가을맞이 대청소가 필요한 시기다. 방도 깨끗이 비우고 닦아내고 내 마음도 깨끗이 씻어내자.


(..) 

결국 역학 또한 삶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하나의 틀일 뿐,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진리는 삶에 녹아들어 있기에 오고 가는 대화가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결국은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여행에서 견문을 넓히듯 다양한 배경의 도반들과 교류하면 나는 절로 겸허해지고 여러 군상의 사람들 속에서 삶의 다양한 얼굴들을 마주하게 된다. 역학을 배우러 모두가 모였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삶을 배워가는 중인 것이다.


(..)

사람은 어떤 순간엔 생각의 대전환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런 것들까지도 사주와 주역을 통해 내다볼 수 있을까? 사실 도구에 집착하면 그것으로 하고자 했던 원래의 목표를 쉽게 잊고 만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만 매몰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

스승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성공하는 3%는 자기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얼굴이 널리 알려지는 데 주저함이 없다고. 또 하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 그것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것들이 왜 내게 들어왔냐 하는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똑같은 순간에 비슷한 주의력으로 접한 말들 중 순간 더 큰 집중력을 선택적으로 기울이게 된 것이다.




22.08.22 (월)


(..)

확실히 내가 자주 뽑던 카드와는 다소 다른 종류의 카드들이 나와서인지 낯설었다. 그래서 나 자신뿐만 아니라 싼값에라도 좋으니 다른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라는 마음은 자세히 살펴보면 현명함보다는, 다시 말해 정말 움직여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분간할 줄 알아서라기보다는 두려움에 의한 것일 경우가 더 많다. 실패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을까 두려운 그런 마음. 


그래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 내가 말하기 보다 상대가 더 말하게 하는 것. 나는 지금 돗자리를 깔고서 모든 것을 알아맞혀야 하는 도인이 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무슨 검증을 받으러 그 상대와 마주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최대한 많은 부분을 상대로부터 이끌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 자신도 몰랐거나 혹은 직면하고 있지 않았던 마음속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꺼내어 보도록 하기 위함에 목적이 있다. 따라서 틀릴까 봐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의 상담은 말 그대로 방향성의 제시에 있고 그것을 걸을지 말지는 순전히 내담자의 몫이다. 내가 제시한 길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또 다른 길을 떠올리게 하는 촉발제의 역할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기 자신이 가슴에 품고 있던, 내가 제시한 방향과 대척점에 있던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사실은 같은 결과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스스로 문제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음으로써 그것을 구조화해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에 대해 사유해 보고 그 끝에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상담이란 것의 최종 목적이 그것 아닌가.


(..)

무엇인가를 지속한다는 것은 단 한차례의 흔들림도 없음을 의미하기보다는 방황이나 궤도 이탈을 하고 나서도 돌아올 수 있는 궤적이 그려져 있느냐를 의미한다. 내면에 그러한 닦인 길이 존재할 때, 방황과 흔들림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누구임을 알려고 하는 것. 내가 무엇인가를 왜 하는지 알면서 하는 것. 그런 태도와 마음가짐들이 내면에 궤적을 그리는 붓과 먹물이 되어준다.


(..)

어제 화살이 덜 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와중에도 한 두발씩 과녁과 마주 하긴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활도 삶도 결국 나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여 찬찬히 탐구하는 시간을 요구하는 점에선 상당히 닮았다고 할 수 있다.


(..)

스스로의 몸을 잘 살피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경락에 대한 이해와 활용, 그리고 건강한 섭생. 이것들은 한데 모여 올바르고 건전한 정신을 일궈줄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말이 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고 화려한 언변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때로는 요즘 먹는 음식들, 음식을 고를 때의 기준들을 보는 것이 나라는 사람이 요즘에 어떠한 지를 알려주는 가장 좋은 신호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 같다.




22.08.23 (화)


(..)

인간은 참 신기한 동물인 게 같은 현상에도 적용하는 관점에 따라 해석을 다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의 전환이 옷 갈아입듯이 쉽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준이 되는 생각, 가치를 평소에 잘 정립해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그러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규칙이 생겨난 취지와 본래의 목적을 잊고는 그 규칙을 무조건적으로 엄수하는 것에만 매몰되어 그러지 못할까 봐 조급해 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니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

지나간 것에 너무 개의치는 말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아침의 고요함 속에서 나의 깊은 내면은 비로소 열린다. 조급함과 초조함으로 뒤덮인 마음은 눈 덮인 겨울산처럼 꽁꽁 얼어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기 어렵게 만든다.




22.08.25 (목)


(..)

요즘 수면 시간이 부족한 건지 일어날 의지가 부족한 건지 설정한 알람에 맞춰 재깍재깍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

'면치기'에 관한 밈을 보고 이것도 누군가에겐 예의 혹은 교양이 없다고 느껴질 수 있는 행동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예의와 교양은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내 뇌리를 스쳤다.


예의는, 적어도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올바른 사회를 일구는 데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해하거나, 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만 생각하는 치졸함과 편협함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 있는 계도와 계몽의 작용을 한다. 


반면에 교양은 그와는 다르다. 표준어와 사투리를 구분 지어 은근히 옳고 그름을 나누듯, 품위와 품위 없음을 구분 지어 행동 양식에 높고 낮음을 부여하는 것이 교양이다. 교양은 더 나은 사회,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바가 크게 없다. 


교양은 그것을 가졌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이, 순전히 자기 관점에서 그것을 갖지 못한 자를 깎아내리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존재한다. 결국 예의와 달리 공동체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자신을 혹은 자기 자신이 소속된 일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어떻게 저떻게 포장을 해도 결국 이기주이, 집단 이기주의와 우월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대사가 생각이 난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다음에 무엇을 집을 지 알 수 없다.'라는 말. 인생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존재함을 아는 자는 아마 격하게 동의할 것이고, 인생은 철저히 자기 힘으로 100%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전체에서 동떨어져 나온 분리된 '나'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나', '나'를 잊은 나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22.08.26 (금)


(..)

어제 저녁 때 무리한 것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제 정말 과식은 금물이다. 위는 무조건 최대 80%만 채우라던 담마의 가르침을 고새 잊었느냐..


(..)

사실 샐러드는 생채소에다가 섬유소도 지나치게 많아서 소화가 썩 잘 되는 음식은 아니다. 건강음식으로서 각광받는 이유는 영양 과다인 현대인에게 잠시 쉬어가는 효과를 주기 때문이지, 그 자체로 매우 건강하고 영양분이 가득한 든든한 한 끼 식사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마케팅은 이를 어떻게든 건강관리를 위한 가장 최선의 음식인 것처럼 포장을 해서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며, 사람들 역시 건강 음식에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익히지 않은 채소가 풍성하게 쌓인 샐러드를 꼽는다. 


이것은 과연 건강에 좋은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채는 동물적 본능이 우리 DNA에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디어에 의해 채소, 과일이 건강음식의 대표주자로서 우리 무의식에 각인된 탓일까?


(..)

혈자리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리중표와 동기 관계의 개념을 볼 때마다 인체의 신비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그 옛날, 2,000년도 더 되었을 시기에 선조들의 통찰력이 얼마나 뛰어났을지를 생각게 한다.


(..)

직접 보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 또는 가설에 불과하다.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록해 둔 문서가 발견된다 하여도 그것은 기록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주관적 세계에 불과하니 반쪽짜리 실체이다. 그것을 두고 무언가를 다 안다고 표현하기엔 조금 민망하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보면 과학이 밝혀 낸, 혹은 역사가 밝혀낸 현시대의 모든 사실들은 객관적 실체 그 자체가 아니라, 잠정적으로 참이라고 합의가 이뤄진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

달은 하나일지 몰라도 손가락은 하나가 아니다. 하나의 혹은 한 시대의 관점에 불과한 자신의 손가락을 유일한 진리처럼 여길 때 모든 갈등은 시작된다.


(..)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상대를 만난다면 교류하고 자신의 외연과 내면의 깊이와 너비를 확장할 좋은 기회로 삼기보다는 결점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자신의 관점에 한 톨의 오점이 생길 위기로 바라보고 상대를 제거하려는 욕망이 일기까지 하는 것이 인류 역사의 실태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만 봐도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볼 때면 존중과 교류를 바탕으로 화합을 이끌어 내기보다는 반목과 갈등이 빚어지지 않던가.


(..)

인류의 역사를 이어온 근본 에너지는 갈등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다시 화합이라는 에너지로 중화시키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음과 양의 대립과 조화. 태극의 이치가 여기에도 서려 있다. 


어쩌면 우리가 쉽게 바꾸지 못하는 무엇, 예를 들어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으로는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 나와 다른 견해를 지닌 존재를 호기심이 아니라 적개심으로 바라보는 것, 이와 같은 것들이 존재하며 쉬이 그 기질을 바꾸지 않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내가 상대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섣부른 오만함이 갈등의 씨앗이 되듯,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걸 넘어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만인지도 모른다.


(..)

삶이란 결국 전체의 일부임을 잊고 자의식이 있는 암세포처럼 멋대로 활동하던 단계에서 점차 전체를 의식하고 그 품으로 되돌아가려는 여정에 다름 아니다. 매 순간 이 사실을 상기토록 하자. 나는 전체의 일부요, 그렇기에 전체 그 자체다. 그 사실을 알 때 비로소 나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말이 한낱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철부지의 착각에 의하여 나온 말이 아님을 알게 되리니.




22.08.27 (토)


(..)

7시 40분 기상. 당분간 주말엔 크게 무리하지 않으려 한다. 잠이 부족하다고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게 느껴진다. 

(..)

바쁘다 바빠를 입에 달고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면 시간은 충분 수면시간에서 한참 모자라다. 수면 부족은 각종 질병과 스트레스, 신체의 무기력증을 유발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수면 부족으로 인해 자연의 정기를 상실해 가는 개개인은 점차 전체와 분리가 되어 동떨어진 존재가 되고 만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사회에는 수면 부족도 크게 한몫하지 않을까.

기계 알람음이 아침부터 뇌간을 내리치며 맞이하는 강제적 아침 기상의 문화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때가 되면 잠이 뜨는 문화 역시도 갖춰져야 할 것이다. 무언가에 대해 논의하려거든 그것과 연계된 다른 모든 것들을 두루 살피고자 하는 전체적인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

(..)

몇 년 만의 무더위다, 역대급 장마다 말은 많았지만 결국 입추와 처서가 지나면서 더위는 맥을 못 추리고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아직은 24절기에 담긴 자연의 이치가 기후변화로 비롯된 이상 현상에 의해 훼손되지는 않았다는 방증이다.

(..)

비워야 새로운 것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비움에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 머물려는 습성과 가지 것을 놓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그 자리에 머물도록 하는 데는 본능이 작용한다. 본능은 생명의 보존과 현상 유지의 기능을 한다. 

그러나 인간을 성장시키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행위는 대부분 본능을 거스른다. 본능대로 사는 삶은 무의식적 삶이며, 본능을 일정 부분 거스르며 사는 것은 의식적인 삶이다. 의식적인 삶이 곧 성경의 말씀처럼 깨어있는 삶이다.

(..)

현실 문제를 외면한 것은 진정한 진리 추구의 길이 아니다. 진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다. 책과 사색에서만 진리를 구할 게 아니라 언제나 세상 한 쪽에, 저잣거리와 길 위에 한 발을 딛고 있어야 진정한 통합의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주간단남]

첫 번째 글(21년 6월) 보러가기



간단남 응원하기

작은 관심과 응원만으로도 지속해 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壬寅년 戊申월 세 번째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