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Sep 26. 2022

壬寅년 己酉월 세 번째 기록

22.09.18(일) - 22.09.24(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9.18 (일)


(..)

제주 상공에서 내려다 본 모습과 서울 김포에서 내려다 본 모습은 같은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

군대 문화에서 파생된 그런 위계적 질서 기반의 조직문화가 아니라, 정말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나뿐만 아니라 남을 생각하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해 내는지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두루 접하고 있다. 특히' 공덕'이라는 키워드가 만드는 프레임 효과가 톡톡히 작용하는 것 같다. 

공덕을 쌓으면 결국 나 자신에게 이득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이기심이 남에게 베푸는 행동을 낳는 이타심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개중에는 그런 행위가 나에게 아무런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구태여 베풂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사람도 분명히 존재하리라.

반면에 감사의 표현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케이스도 있다. 집단에서 뜻밖의 이득을 받거나 혹은 남들이 더 원하는 무언가를 자신이 먼저 얻게 됐다는 감사함과 또 동시에 드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공덕을 하는 경우 말이다.

이와 같은 것은 뭔가를 얻긴 얻었기에 완전히 순수한 의도라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그것을 기대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욕망하지도 않았던 그것이 덜컥 주어진 것에 대한 순수한 기쁨과 감사의 표시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자신이 가진 것을 선뜻 내어 놓고자 하는 마음. 스승님은 '공덕'이라는 표현으로 집단 내에 나눔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시스템을 만드신 셈이다.

그런 사랑과 나눔의 정신이 세상을 계속해서 굴러가게 만드는 것이다. 도로 위에 그어진 선이 운전자들이 그것을 넘지 않고 반듯하게 나갈 수 있도록 만들 듯이 세상의 일정 부분의 선하고 순수한 에너지의 비율을 유지하는 데에 이바지하는 것이 바로 선한 마음과 선한 행동이다.

(..)

행복해서 웃기도 하지만 그 역도 성립하듯이 나 자신을 위한 동기로 시작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 행동 자체가 선하다면 그 사람의 동기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결국 이기심에 의해 시작된 것이 이타심으로 바뀌고, 그 뒤엔 말해 무엇하리.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선하고 순수한 사람으로 변모해 가는 것이다.

(..)

사람들이 느끼는 불쾌함의 대부분은 이와 같이 이기적인 동기가 유발한다. 그토록 개인적인 것에 예의범절이라는 공적인 프레임을 붙였을 따름이다. 그것은 이기심을 숨기고 자신이 느끼는 불쾌함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지, 공공선이나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대의에 헌신하거나 귀의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

그래도 안에서 이는 불쾌감에 계속해서 먹이를 주지 않고, 그렇다고 부정하거나 억누르지도 않은 채 내 안의 또 다른 측면인 선한 곳에 주의를 기울여 심리적 균형, 평정심을 끝내 잃지 않았음에 스스로를 칭찬해 본다.




22.09.21 (수)


(..)

사람은 정말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 무의식의 이 지독한 패턴에서 벗어나려면 대충 결심해서는 안 된다. 오른손잡이가 하루아침에 왼손 잡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의 첫걸음은 그것을 이루고 말겠다는 굳은 다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

다시 일상의 리듬을 되찾자.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고 다시 쌓아올리는 데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내게는 하겠다는 의지와 이전에 해봤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자신감이 마치 건물 설계도처럼 존재하고 있다.

(..)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시답잖은 일들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이들이 뭉치면 튼튼한 기둥이 되어 내 일상을 대들보처럼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무너짐 없는 일상을 무던하게, 반복적으로 살아내는 것이 군자의 삶이다. 군자의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바로 솔선수범과 언행일치이다.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는 지식은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

특정 장소에는 그 목적에 맞는 행동만을 할 수 있도록 하자. 밥상 앞에선 밥을 먹고, 책상 앞에선 공부와 작업을, 명상 방석 위에서는 기도와 명상을, 화장실 변기 위에서는 볼 일을. 이렇게 그 장소에 걸맞은 행위에 온전히 머무르면서 짧게라도 좋으니 몰입의 순간에 빠져든다면 그 치열한 에너지가 불타오르던 흔적이 그곳에 서리게 된다. 

동물이 영역 표시를 하는 것처럼 그 행동에서 새어 나오는 고유의 아우라와 특정 주파수의 파동이 그 일대를 물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장소에서는 그 행동을 더 쉽게 하게 되며 이는 선순환의 고리를 형성하는 첫 출발점이 된다. 이것이 루티너리한 일과를 보내는 자의 이상적인 경지가 아닐까. 일상은 종이 위에 적힌 그날의 계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장소와 사물이, 가구들이 내 하루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자. 그런 순수하고도 잘 정돈된 집중의 행위는 그 자체로 거룩하고 숭고하다. 

반면에 스마트폰은 손만 있다면 장소를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할 수 있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어디서나 쓸 수 있는 편리함은 TPO를 가리지 않고 일상에 자연스럽게, 마치 태초부터 그랬다는 듯이 스며들어 버린다. 이제는 콘서트장에 가도, 밥을 먹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길을 걸을 때조차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는 튼튼한 일상의 대들보를 좀먹는 벌레와도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스마트폰에 주의를 빼앗기는 삶은 매트릭스에 사로잡혀 인공지능에게 생체 에너지를 제공하는 '생체 배터리'와 다를 바 없다.

(..)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윤추구의 극대화에 있다는 기업의 정의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경영학이 종교 경전같이 역사가 깊고 신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처럼 당연시되어야만 다른 고민이나 죄책감 같은 것 없이 이윤추구에만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어떤 성스러운 가치나 미션, 비전 따위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

혹자는 그런 이기심이 결국 편리한 세상을 만든다며 '보이지 않는 손'을 운운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 보다 그 이면에 담긴 의도가 더 중요하다. 똑같이 당신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당신을 존중하고 돕고 싶어 하는 선한 마음을 지닌 사람과 당신을 어떻게든 이용해 먹어서 자기 배를 불릴 생각만 하는 사람 중 누구와 친하게 지낼 것인가?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며 그저 자신이 편리해지기만 하면 그 사람의 의도야 아무래도 좋다는 사람이 집단 내에서 많아질수록 그 집단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22.09.22 (목)


(..)

요구하기 보다 그저 의도하면, 바라지 않던 그것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을 떠올리자.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주변이 알아서 그 변화의 흐름에 발을 맞출 것이다.

(..)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최고의 상담가, 동기부여가, 코치가 되고자 한다면 내 옆에서 힘들어하는 가까운 사람을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은 아니란 것이다. 그간 내세웠던 핑계로는 그들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며 믿고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란 점이었지만, 실제로 만날 바깥세상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뭐 얼마나 나를 믿고 변화에 쉽게 동참할 것이라 보는가?

어쩌면 이건 미션이다. 가까운 사람들을 바꾸지 못하면 최고의 전문가로 거듭날 수 없을 것이며, 만일 성공한다면 날개 돋친 듯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미션.

그전에 가장 시급한 건 역시 나부터 바꾸는 것이다. 나 하나 바꾸지 못하면서 자꾸 누굴 바꾸고 누굴 돕겠단 것인가? 최고의 코치가 될 첫걸음은 사실 나에게 있다. 무엇을 하든 간에 출발점은 언제나 내가 되어야 한다.

(..)

그러니 언제까지고 경험 쌓기를 뒤로 한 채 지식만 쌓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행동하자. 미래에 어떤 조건이 되면, 자격이 되면 행동해야지 하는 생각일랑 내려놓고 지금 바로 한 손엔 책을 들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라. 거리에서 직접 사람들과 부딪히며 인생을 배워라. 인생을 아는 사람이 상담도 잘 할 수 있다. 역학은 세상의 이치를 담은 프레임이지만 결국 그러한 도구로 관찰해야 하는 것은 우리네의 현실, 즉 삶 아니던가.

(..)

사주는 통계이고 수학이며 법칙화된 영역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본다. 기초적인 접근 방식은 존재할지 몰라도 그것으로 인한 결과가 칼로 무 자르듯 딱 나뉘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중화의 지점을 어떻게 잡느냐는 순전히 개인의 임상과 직관에 따르는 주관적 영역이다. 

결국 논리와 직관을 두루 겸비해야 하는 것이 사주 통변이다. 지식만 공부하고 익히는 데만 해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테지만 지식적인 것 이외에도 심신을 단련하여 영적인 수준을 한껏 끌어올리는 게 필수적이다. 내가 명리학을 배우기 이전에 명상이나 영성 쪽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그런 심신의 기초를 일찍이 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나는 운명의 형세를 관찰하고 이를 몸으로 느낀 뒤에 역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드러내고 표현할 능력을 갖출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기로 예정된 일, 꼭 필요한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법이다.

(..)

살면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깨어있음이다. 깨어있기 위해서라면 경험하는 모든 것을 가만히 관찰하면 된다. 관찰에는 다시 평정심이 요구되며 평정심은 경험의 순간순간을 그저 느끼며 집중하는 몰입에서 비롯된다. 경험이 집중을, 집중이 몰입을, 몰입이 평정심을, 평정심이 관찰의 연속을, 관찰의 연속이 깨어있음을 만드는 것이다.

(..)

높은 경지라는 것은 아직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한 입장에서의 표현일 뿐이다.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시선에서 보면 달은 멀리 있지만 달은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 거기에 멀고 가깝다란 딱지를 붙인 건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에게 그것은 그저 당연한 일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




22.09.23 (금)


(..)

아침부터 콧물이 난다. 백회혈에 침을 꽂으면 콧물이 싹 가신다던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나는 모페를 쓰기 전에 백회에 침을 하나 놓았다.

(..)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힘을 뺀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어떤 동작을 편하고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 마음까지도 한껏 더 여유롭고 차분해진 상태로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행위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논리의 선상에서 초보자들이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이유는 익숙하지 않은 것과 함께 의욕만 앞서서 결과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

콧물은 완전히 멎지는 않고 얕은 수준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침이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나 보다.











[주간단남]

첫 번째 글(21년 6월) 보러가기



간단남 응원하기

작은 관심과 응원만으로도 지속해 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壬寅년 己酉월 두 번째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