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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Dec 20. 2022

壬寅년 壬子월 두 번째 기록

22.12.11(일) - 22.12.17(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12.12 (월)


(..)

내 사주상 金水의 기운은 나를 빛나게 해줄 청淸한 기운이다. 나는 스스로가 청해져야 한다. 시간표대로 사는 일과를 수행하듯 반복하며, 마음과 실력을 갈고닦아야 한다.


(..)

나는 신점을 봐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일개 개인으로서 내담자를 맞이하는 것이 아닐,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신성이 그를 맞이할 수 있게 나 자신은 옆으로 비켜설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 비켜 섦이 바로 깨어있음이다. 충분히 각성한 사람은 비켜설 줄 아는 자다. 나는 그저 내면의 빛이 세상과 교류할 수 있도록 하는 창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자다.


(..)

벽돌클럽을 만들어야지. 노쇼나 대충 하는 것, 그리고 별게 아니라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 가입비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걸 통해서 이뤄낸 것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낼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을 모아가야지. 규칙도 만들 것이다.


내년에는 아티스트 웨이 모임이든 벽돌클럽이든 모임을 하나 반드시 만들고 운영할 것이다. 그러려면 내가 뭔가 모임을 이끌어 갈 건덕지가 있어야 하는데. 비건도, 명리학도 아닌 공통된 그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성장이다. 자신만의 길을 닦아 나가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모임.


(..)

나는 밖에 나가면 경청하기를 잘한다. '너무 내 얘기만 했나?'라고 습관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딱인 그런 사람. 이걸 장점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내재된 관종의 본능, 주목받고 싶은 욕망, 남들이 나를 알아봐 주길 바라는 욕망을 지녔다. 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경청이다.


어떤 것이든 '~하는 법'이라며 원리가 아니라 노하우부터 얻고 보려는,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주의적 사고가 팽배한 요즘에 경청마저도 하나의 스킬처럼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무엇이든 스킬로 접근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방식이다.


눈을 어디에 맞추고 입가엔 얼마나 미소를 띠며 고개는 얼마나 끄덕여야 하는지 등의 드러나는 것에만 집착하면 본질을 놓치기 십상이다. 본질은 마음가짐, 즉 태도에 있다.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 이 사람이 빛날 수 있도록 자신이 빛나고 싶은 욕심을 잠시 내려놓을 줄 아는 미덕. 그것이 경청의 시작과 끝이다.




22.12.13 (화)


(..)

내가 진로를 찾아가면서 가슴이 뛰는 이유는 그 과정 속에서 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무척 높아지기 때문이다. 사주팔자 상에 드러난 내 인생의 지도를 바탕으로 나의 성향과 나아갈 방향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은 마치 삶의 진리를 깨우치는 과정처럼 가슴이 웅장해짐을 느끼게 한다. 


나는 직업의 세계 같은 미시적인 것엔 관심이 없다. 구체적, 개별적인 직업들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그 속도는 무어의 법칙이 가리키듯 점점 더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직업에 필요한 자질과 성향이지 직업 자체가 아니다.


(..)

상대가 잘나가는 사람이면 내 개성을 누르고 멀끔히 차려입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편하게 입어도 되는가? 그것이야말로 비겁의 대명사다. TPO에 어긋나지 않게만 내 개성을 살려서 상대가 누구든 관계없이 내 선택의 기준을 유지하는 것. 그게 나의 방식이다. 상대가 누구이든 그를 배경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한 명의 인격체이자 존재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방식이다.


(..)

언제나 중요한 것은 기존의 것을 늘 익숙하게만 보지 않으려는 자세다. 낯섦을 의도적으로 가져오는 연습을 하자. 관계든 일이든 창작이든. 세상과 교류를 맺는 방식엔 익숙함보다는 낯섦이 언제나 더 낫다.




22.12.14 (수)


(..)

대면 상담은 확실히 그런 면에서 좋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 사람을 마주하고 눈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그것부터가 참된 관계의 시작이다.


(..)

지금 당장 앞으로 달려가고픈 욕구가 일겠지만 잠시 눌러두고 시스템의 설계에 시간을 쏟자.


(..)

자신이 받아봤던 상담 중에 TOP3 안에 든다고 얘기해 주셨다. 그게 과연 내가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서였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얼마나 상담이 상담다웠느냐, 즉 얼마나 주어진 시간 동안 상담자와 내담자가 서로 교류의 주파수가 일치되어 충분히 공명하는 시간을 가졌느냐에 만족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사주는 여러 도구로써 활용이 가능하다. 상담의 도구, 미래 예언의 도구 등. 대부분은 후자에 방점을 찍는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잘 생각해 보면 결국 잘 살기 위함이 아니던가? 미래 예측이 결국에는 잘 살기 위한 것에 그 근본 목적이 있다면 상담과 코칭을 통해 그것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현대의 명리학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자질은 훌륭한 상담가, 카운슬러로서의 그것이다. 지식만 가지고 사람을 상대하느라 콜드리딩 스킬만 늘어서는 훌륭한 명리학자라 할 수 없다.


(..)

웹 2.0의 시대도 어느덧 저물어가고 있다고 한다. 다가오는 웹 3.0의 시대에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자고로 명리학을 공부한다는 사람이 세상의 변화에 둔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지식과 현실을 구분하는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셈이다. 지식은 현실 속으로 흘러나와 그것과 하나가 될 때 참된 지혜, 앎이 된다. 


머릿속에 든 정보만 늘어나고 그것이 당장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지식을 수집하는 것에만 의의를 두고 있는 것이다.


(..)

허례허식과 유의미한 격식의 차이는 목적성의 유무에 달려있었다. 격식은 본질을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알면 그 자체에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격식을 차리는 것 자체에만 목적을 두는 자들에 비해서도 더 격식을 엄격하게 잘 지켜낸다.


유교 문화나 그 밖의 옛사람들의 고루한 관습이요, 허례허식이라고 비판받고 외면받는 모든 것들이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전해져서 그런 대우를 받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알맹이를 제대로 전하는 사람이 적은 데다가 그것이 전달하기가 참 쉬운 게 아니니 전달이 상대적으로 쉬운 껍데기만 살아남아 전통문화로 잔존하고 있는 것 아닐까.


(..)

키보드에 왜 이렇게 알게 모르게 피어오르는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전생에 나는 타자기로 글을 쓰던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 사람이 글을 안 쓰고 살고 있으니 되겠나.




22.12.16 (금)


(..)

성숙해짐 그 자체가 아니라 성숙하다는 칭호를 얻고 싶어서 욕심을 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갈 길이 먼 놈이다. 내 의도와 욕망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인간의 뇌는 때론 너무나도 간사하여 그 주인마저도 속이고 마니까. 


자신이 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는가? 그 달콤한 꿈에서 하루빨리 깨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뇌에게 지배당하는 한 개인에게 자유의지는 없다. 뇌에게 속아 넘어간 나머지 자신이 온전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뿐. 


성숙을 향한 여정의 시작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다.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

내가 베푸는 것을 상대가 당연시 여길 때 화가 났다. 은행에 맡겨둔 예금을 찾는 것처럼 나의 친절을 자신의 권리로 여기는 것에도 강한 반감이 들곤 한다.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나의 행동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분명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나의 친절에는 기대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만족하고 고마워하는 것을 보는 것. 그게 나에게는 뿌듯함을 느끼게 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임을 느끼게 했다. 인정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친절을 베푼 것이다. 


내 친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고 진짜 목적, 숨은 욕망은 나 자신의 인정욕에 대한 충족이다. 이게 바로 가짜 착함이고 정신적 미숙함이다.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이다.


(..)

나를 포함해서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상대를 도구화하는 사람들 일색인 세상이다. 무념 공덕의 마음을 견지하고, 상대를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존재 자체로 대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다면 얼마나 더 따스하고 아름다울지 상상조차 하기가 어렵다. 상상이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모습과 거리가 먼 얘기라는 뜻이다. 


돈벌이가 우선이고 자기 PR이 우선이며, 철학과 종교 그리고 도덕과 윤리는 언제나 먼지 쌓인 오랜 고서와도 같은 취급을 받는 시대에 인간의 도구화는 피해 갈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일수록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잘 간수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인류 역사를 통틀어 그쪽 세계에 대한 관심은 그 대중성과 무관하게 언제나 확고했다.


(..)

정신적 영역에 대한 개개인의 관심도가 곧 인류 전체의 성숙과 각성을 결정짓는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 길목 위에 서 있다. 물질적 영역만 치우치게 추구해온 지난 수 세기 동안의 레이스에서 한계를 보여주는 여러 굵직한 사건들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

말법의 시대가 온다고 했다. 살아생전에 그 모습을 보고 귀천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그 변화의 흐름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미 시작된 지 오래라는 점이다. 내가 20대 후반에 들면서 물질세계 이면의 정신적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모든 일에는 그것이 일어나는 저마다의 이유가 존재하는 법. 그 이유들은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된다. 바로 개개인의 깨달음. 인류의 대오각성. 전 지구적 해탈이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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