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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Dec 27. 2022

壬寅년 壬子월 세 번째 기록

22.12.18(일) - 22.12.24(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12.18 (일)


(..)

그 모든 관련 기억의 종합본이 지금 내가 한 사람을 바라보는 틀을 이룬다. 반면에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내 앞의 이 사람은 어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우리는 결국 미립자라는 아주 미세한 원자로 이뤄진 존재들이고 그것은 매초, 그보다 짧은 시간 동안에도 수업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관점의 차이에 따라 존재의 정의가 달라진다. 


내게 힘이 되어주는 관점은 키우고 나를 힘들게 하는 관점은 내려두라.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관점은 줄이고 타인에게 득이 되는 관점을 강화하라. 그것이 매일 스스로의 생각을 점검하고 조금씩 다듬어 나가야 하는 이유다. 자존감과 자만심이 뒤섞이지 않도록. 적당한 지점에서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리.




22.12.19 (월)


(..)

스트레스를 풀려고 폭음, 폭식을 하거나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잔뜩 사며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겉을 치장하는 것이 자신의 품격을 드높여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각자만의 세계 안에서 각자만의 비이성적인 결정을, 다른 누군가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말할 언행을 행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남의 삶을 까내리고 비판하며 날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기 기준으로 이해가 되어야만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몰상식 또는 악으로 규정짓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렸다.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에 분노를 내뿜는 자들의 태도를 뒤집어 살피면 자기 삶에 확신이 없는 거라고 볼 수 있다. 자기 삶의 옳음을 유지하려면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존재 자체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모르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은 없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이해해 보고자 하는 일말의 시도조차 없이 그들의 존재를 혐오하고 부정할 뿐이다. 개개인의 갈등뿐 아니라 사회적 갈등, 국제적 갈등은 모두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과 폐쇄적인 마음에서 비롯되는 어리석음에서 기인한다. 


취해야 할 태도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기반으로 한 열린 마음이다. '왜 내 기준대로 안 하지?'라는 분노에 찬 질문, 답이 정해진 질문이 아니라. 이 질문에 기대되는 모범답안 같은 것은 없다. 


서로가 서로를 궁금해할 때, 내가 떠들기 보다 상대가 말하도록 할 때, 그때 비로소 상호 간에 이해의 교각이 놓이게 된다. 두 세계라는 섬 사이에 놓인 교량으로 고립되어 있던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더 큰 세계로 융합되는 것이다.


(..)

인생에서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방향성을 정하는 것. 그리고 가다가 지칠 때면 스스로를 독려할 줄 아는 힘을 갖는 것.




22.12.21 (수)


(..)

내가 이따금씩 고삐가 풀린 채 늦게 자는 까닭은 어쩌면 아티스트 데이트를 자꾸 소홀히 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자기를 돌보는 일은 언제나 최우선 순위는 못 되더라도 상위권에는 머무르게 해야 한다.


(..)

무엇을 할지 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얼마나 할 건지 일정한 규칙과 시간을 정해두는 것이다.


(..)

별들이 속삭이는 것마저 들릴 것 같은 고요함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라. 고요 속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니. 새벽엔 양기가 서서히 깃들기 시작한다. 양기는 인寅시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여 정오正午에 정점을 찍는다. 그 시간에 충분히 기운을 받기 위해서는 역시 인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음기가 정점을 찍는 자子시에는 적어도 잠에 들어서 휴식의 질을 극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해亥시나 자시 사이에 잠에 들고 인시에 기상하기. 이게 내가 다가오는 2023년에 갖추고자 하는 습관이다.


(..)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섣불리 조치를 취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이미 공급자들이 판을 그렇게 짜두었기 때문이다. 현재 통신 시장은 온갖 거품과 환술이 난무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그나마 어제 나를 상담해 준 인간미 넘치는 분을 만난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 외의 사람들은 무심하다. 남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차치하고서라도 남에게 해를 끼쳐서 한몫하려는 심산도 딱히 없어 보였다. 들어오는 놈 안 막고 가는 놈 안 붙잡는다는 마인드. 그들에게 타인은 철저히 자신과는 무관한 타자화된 존재다. 아니 존재라기보다는 객체 또는 그것으로 본다고 해야 더 정확하리라.


(..)

청첩장을 주기 위해선 한 턱 쏴야 한다는 그 인식 때문에 사람들은 제법 그럴듯한 식당을 고른다. 그러나 그것은 청첩장을 주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이 욕먹지 않도록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기준이지, 마음 씀씀이에 의한 선택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음은 빠지고 형식만 갖추는 도리. 그게 현대 사회의, 아니 어쩌면 인류 역사를 아우르는 양상인지도 모르겠다.


(..)

과거에 있었던 혹은 흔했던 패턴이나 습관을 떠올리며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게 오히려 그것을 피하기보다는 반복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뇌는 부정의 표현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떡볶이를 먹지 말자라고 다짐한다면 뇌가 반응하는 것은 '떡볶이'와 '먹다'이지, '~하지 말자'와 같은 부정어가 아니다. 그래서 피하고자 하는 그것을 떠올리며 다짐하는 것이 오히려 그것을 다시금 상기시켜 불러오는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

명리학을 계속해서 공부해 나가다 보면 점점 자기 것을 봐달라고 사석에서 대뜸 내미는 경우를 자주 겪게 될 것이다. 대부분이 지인들일 터라 복채부터 요구하기도 뭐 하다. 이럴 때 내가 취해야 할 스탠스는 무엇일까. 그냥 봐주는 것이다. 다만 라이트 하게. 무료 체험이 만족스러우면 그 사람은 반드시 재방문을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봐주되, 지금은 너무 갑작스럽고 자리가 자리인지라 가볍게만 봐준다는 식의 언급을 해주자. 무료라고 해서 대충 보지 않는 게 중요하다. 내가 명리학을 도구로써 결국 이루고자 하는 것은 활인이다. 무엇이 활인인가? 작게는 그가 조언이 필요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 일회성으로 돕는 것으로 시작해서 크게는 한 사람의 인생이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

내가 원하는 대로 하루를 설계해 나갈 수 있는 지금의 삶에 정말 감사하다이 형태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수입원을 점차 더 늘려 나가고 자동화해 나가는 나만의 꿈나라를 설계해 나가자.




22.12.22 (목)


(..)

우연히 미즈노 남보쿠의 책을 다시 접하게 됐다. 1년 전에 읽었던 책인데 '소식小食'을 하는 게 왜 개운에 좋은지를 설명한다. 나는 소식을 두 가지 관점에서 살핀다. 하나는 기준 시간 내의 총량, 또 하나는 한 끼 식사 내에서의 총량. 


전자는 하루 동안 섭취한 음식물의 초량을 말하는 것이며, 후자는 매 끼니 때마다의 섭취량을 말한다. 이걸 굳이 구분하는 이유는 한 끼마다 먹는 양은 적으나 횟수가 많아서 결국 섭취 총량 측면에서는 소식이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

물리적 부를 좇느라 건강을 소진할 바에는 건강이라는 부를 잘 축적시켜서 중년 이후에 들어가는 막대한 의료비를 절약하는 편이 훨씬 낫다. 후자의 삶이 훨씬 더 건강하고 자연의 이치에도 걸맞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자신을 소모시켜가며 일을 하지 말지어다. 그것은 순리에 어긋나는 삶이다.


(..)

나를 내던질 수 있는 가치를 향해 한 몸 불사르는 것은 숭고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고서야 대부분은 그저 왜곡된 탐욕 혹은 어리석음 때문에 건강을 소홀히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신을 돌보는 선택을 내리는 쪽이 여러모로 훨씬 더 본인과 세상 모두에게 좋다고 할 수 있다.


(..)

아 그렇구나.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을 신격화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간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멘토나 스승을 신격화하는 습성이 있다. 단순한 존경심을 넘어선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서, 그 분야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고 하지 못할 것이 없는 존재로 바라본다. 그래야 자신이 걷는 그 길이 위대해지고 그 길을 걷는 자신도 위대해지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심리가 여기에서 과연 얼마나 다를까? 


(..)

인간이 벌이는 여러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과 행동은 자기 자신도 어딘가에서는, 특정 상황에서는 하고 있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특이한 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이 마침 그 순간에 특이한 언행을 일삼았을 뿐.


그러니 타인을 비방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비판하는 게 때로는 얼마나 무의미한 짓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저 모두가 차례로 돌아가며 역할 놀이를 하고 있는 듯하다. A라는 사건이 일어나면 a가 b를 비판하고, B라는 사건이 일어날 땐 b가 a를 비판한다. 


비난과 비판은 다르다며 자신이 하는 것은 비판이니 숭고하다며 가감 없이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화자가 일반인이냐 전문가냐 하는 권위 따위가 아니다. 말의 내용도 아니다. 그것이 근거 없는 비난인지 논리와 지식을 갖춘 비판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발화자의 의도에 있다. 감정적이고 논리가 없으면 타당하지 않고, 권위와 근거만 갖추면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글쓴이의 숨은 의도를 간파하려는 시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혼란스러운 세상일수록 더욱이 서로의 의중을 헤아리려는 것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겉으로 드러는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고 또 성급하다. 


질문이 결여된, 직감에만 의존한 일방적 판단에는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 간극을 좁히는 것은 존재와의 교감이며 대화다. 상대를 알아가려 하는 노력에의 의지다.


(..)

특히 사람에 관한 것이라면 더 신중해야 한다. 개인은 결코 상대를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면밀한 대화를 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함부로 판단하지도, 안다고 지껄여서도 안 된다. 오래 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실 판단 자체를 지양해야 한다. 그러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과 논리력이 아니다. 존재를 대할 땐 존재 그 자체로 대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진짜 필요한 것이다.




22.12.24 (토)


(..)

시간은 없다. 연속되는 순간의 흐름만이 존재할 뿐. 우린 결코 지나가버린, 매 순간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란 모래를 움켜쥘 수 없다. 쥐려고 애쓰면 더 빠르게 손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다만 우리는 현재의 인상을 기록할 순 있다. 그것은 지나가는 과거가 됨과 동시에 일종의 보이지 않는 표식이 되어 그 순간이 지나서도 다시금 회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인간은 늘 현재를 살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추동력은 과거와 미래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에너지는 다시 현재라는 순간을 충실히 살아냄으로써 더욱 증폭된다.


(..)

그에게 매일 아침 빵을 무료로 나누는 일을 하기가 어렵지 않느냐고 묻자 그가 왜 어렵냐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조금만 부지런하면 된다고. 자신은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1년에 약 2,000만 원어치의 빵을 주변에 나누는 그는 돈 자체를 축적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를 벌기에 그 정도의 빵을 기부를 하느냐 묻는 건 무의미하다. 얼마를 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람들은 돈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지 수입이 크면 돈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돈을 대하는 태도이며, 살면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이다.


호의호식하며 쾌락을 좇는 것이 삶의 목표라면 그가 추구하는 돈도 자기 잇속만을 위한 수단이 된다. 반면에 남을 돕는 수단의 영향력의 크기와 범위를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써 돈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돈이어도 쓰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파동의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 액수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건 무의미하다.


오히려 액수 자체에, 혹은 손익분기점이 맞을 지에만 신경 쓰느라 혈안이 되어있다면 그가 궁금해하는 '검증'의 대상에 대해 논하기 이전에 그런 쪽에 관심을 맹렬히 갖는 그 사람의 마인드가 이미 돈 자체가 축적과 추구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드러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질문에는 언제나 질문자의 가치관과 욕망이 묻어나기 마련이니까.


(..)

내년에는 더 넉넉하고 마음이 여유로워지기를. 늘 주변을 돌아보며 내가 나눌 것은 없는지 살필 수 있기를 바란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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