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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Dec 12. 2022

壬寅년 壬子월 첫 번째 기록

22.12.04(일) - 22.12.10(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12.06 (화)


(..)

그들은 고통의 우월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고통을 지위 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사실 그들에겐 고통을 제거할 마음이 없다. 고통은 그들에게 필요악이다. 그것이 없다면 그들 자신에겐 발언권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운동가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자신의 이기심을 있어 보이는 신념이라는 방패로 가리는 데 이용하는 파렴치한에 더 가깝다. 그것이 '문제'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문제가 되니까 문제시 삼는. 전형적인 지역이기주의와 다를 게 뭔가.

(..)

생각이야 자유라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어디까지가 자유인가? 인간의 생각 자체에 통제를 가하면 자칫 독재주의, 감시 정권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 생각이나 해도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행동으로 옮기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가 있을까?

(..)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것은 그 자유의 범위를 무제한으로 두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지닌 도덕적 잣대에 의해 설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상상은 무제한적 자유고, 책임은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지 않는 것이라고만 말하기엔 어폐가 있다.

우리 마음속에는 생각이 담기는 그릇이라는 게 존재한다. 생각은 언젠가 반드시 넘친다. 그것이 넘치기 시작하면 그 흔적이 드러난다. 임계치를 넘기면 생각만 하던 그것이 자기도 모르게 실제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자신 있어 하던 통제와 책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갈등과 범죄는 언제나 이성이 아니라 동물적 충동에 의해 일어난다. 순간적으로 이성은 마비되고 오직 쾌락과 본능만을 좇는 동물의 상태만이 남아 인간의 관점에선 문제가 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욱해서 평소에 안 하던 욕을 하거나 폭력을 쓰거나 혹은 배달의민족을 키거나. 그 정도가 크든 작든 이성의 스위치가 꺼지는 순간들을 이따금씩 겪으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자유에 뒤따르는 책임을 행동에만 두는 것은 한계가 명확한 것이다.

언젠가 이성 스위치가 꺼지는 순간에 드러날 '본모습'은 평소 자신이 생각은 자유랍시고 제약 없이 쓸어 담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섞인 적나라한 참상이다. 

(..)

책임이 뒤따르는 자유만이 진짜 자유다. 그 자유는 추구할 자유가 아니라, 절제할 자유다. 절제 없는 자유는 방종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지 방종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인간의 탈을 쓴. 때로는 현자의 탈을 쓴.

(..)

마음을 더 청정하게 가꾸자. 더러운 인연이 꼬였다는 것은 내 마음의 상태가 청하지 못한 탓이다.

(..)

오로지 내적인 즐거움이 유일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그게 나의 길이다. 타인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주된 동기가 아닌 길. 그곳에 언제나 삶의 답이 있다.




22.12.07 (수)


(..)

주변에 도움을 구할 때, 자신의 어려움을 얘기할 땐 늘 신중해야 한다. 세상 어느 누구도 우리 자신만을 위한 전용 상담사가 아니다. 그들도 각자만의 삶을 정신없이 살아내느라 하루하루 여념이 없다. 그렇기에 본인이 너무 힘들 때, 신중하게, 그리고 감사한 마음과 함께 상대의 경청이란 문을 두드려야만 한다. 

(..)

확신을 스스로 얻지 못하고 외부에만 의존하며 얻는다면 그것은 거짓 확신이다. 모래 위에 쌓은 성이다. 당장은 그럴싸해 보여도 파도 한 방이면 모든 게 무너져 원상 복귀되고 만다. 아니, 어쩌면 전보다 더 악화될지도 모른다. 애초에 절망만 있던 사람과 절망 속에서 잠시 희망을 봤는데 그 남은 희망마저 무너져 버리는 걸 경험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렇기에 느리더라도, 힘들더라도 내면의 힘을 갈고닦아 스스로 심리적 자립을 일구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

타인에게 의존하는 한 스스로 성장하는 것은 없다. 시간이 지나도 늘 그 자리다. 달라지는 게 하나 있다면 늘 내 편인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지쳐서 하나 둘 떠나가는 것. 그때조차도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했다고만 생각할 뿐, 자기 성찰은 없다. 그저 다음 타깃(?)을 찾아 나설 뿐.

(..)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전염될 뿐.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말에는 사실 선순환의 고리가 전제되어 있다. 내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만큼 그것을 발판 삼아 정신적 성장과 성숙을 이루고, 그만큼 나 역시 누군가의 발판이 되어주기를 기꺼이 응할 준비가 되어있을 때, 이때 비로소 슬픔이 나누면 줄어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책임감도 없이 그 말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없이 자신의 슬픔 좀 가져가라는 식으로 타인에게 경청을 맡겨라도 뒀다는 듯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은 타인을 감정 분출의 도구로 쓰는 것 밖에 안 된다. 


분출이 하고 싶다면 차라리 노래방에 가서 소리를 지르거나 종이 위에 속마음을 어떠한 필터링도 없이 마구 쏟아낸 뒤 찢어버리거나 태워버리라. 그 편이 도구를 쓰는 동물인 인간다운 쪽에 속한다. 같은 인간을 자신을 위한 도구로 삼지는 말라.

(..)

알량한 자존심, 치기 어린 마음에 내린 결정은 아니었는가. 그것을 나의 신념과 이상으로 애써 포장해가면서 말이다. 고작 이 정도 문제에 흔들릴 거라면 신념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 자기 포장, 자기 위로에 가까운 것 아닌가?

흔들린다면 그것은 신념이라 할 수 없다. 신념의 뿌리는 머릿속에 이렇게 사는 게 옳겠다는 생각만으로는 깊어지지 않는다. 신념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여러 순간이 있어야 하며 그때마다 그것이 옳은 길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무조건적인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근거는 스스로가 만들거나 책이나 경전 등의 말씀에서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앞으로 굳세게 걸어나가면서 채워야 한다. 만보기의 걸음 수가 올라가듯 신념의 강도 또한 내 걸음걸음이 쌓여갈 때 두터워진다.

(..)

그래서 불안할 땐 나가서 걸으란 것이다. 그리고 그저 눈앞에 놓인 해야 할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뿐이다. 나머지는 절로 해결될 것이다. 그러한 집중의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금 불확신의 늪으로 빠지려 하는 스스로를 잘 알아차려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괴롭고 귀찮지만 이것이 인간을 더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떠한 고통도 스스로 견디려 하지 않고 외부에 의탁하는 것은 마약과도 같아서 나 자신과 상대를 동시에 망치고 만다. 스스로 바로 서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도, 이 세상도 더욱 건강해진다. 

(..)

자신이 힘들 때 얘기를 터놓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얘기를 끊지도 않고 묵묵히 들어주는 누군가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하기는커녕 자신이 원하던 답에 가까운 리액션을 보이지 않았다고 적개심을 드러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그것은 스스로가 이기적인 인간임을 떠벌리고 다니는 꼴밖에 안 된다. 원하는 답이 있다면 채팅 봇에게 그것을 입력하여 교육한 뒤에 거길 통해 듣는 쪽이 빠를 것이다. 

원하는 답이 있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상태. 그것이 그렇게 명확하다면 자기가 자신에게 그 답을 주면 될 문제다. 주위를 자꾸 둘러보는 것을 멈추자. 그리고 내면으로 침잠하자. 그럴 때라야 타인과의 교류에서 답이 정해져 있는 흐름만을 기대하는 '죽은 대화'가 아니라, 내 관점을 뛰어넘는, 지평을 더 넓혀주는 '살아있는 대화' 가 가능해진다.




22.12.08 (목)


(..)

거기에서는 나왔지만 그곳에서 배운 것은 내 가슴속에 남아 있으니 그 불씨가 그나마 살아있을 때, 나만의 화로를 만들어 불씨를 옮겨야 한다.

(..)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을 악으로 함부로 규정하는 것이다. 선악은 경계가 모호하다. 절대선 절대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게 과연 몇이나 될까. 내 심기를 건드렸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악이라 단정 지을 순 없다.

(..)

흠집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인간을 바라봄에 있어 자신이 본 면만이 그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평생 지구에서 달의 뒷면을 보지 못하고 산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뒷면 역시 보기 어렵다. 악인에게도 선인의 측면이 있고, 선인에게도 악인의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의 신념에 반하는 행동을 누군가 했을 때 다른 측면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되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가치관이 '옳음'을 지향한다고 스스로 자부한다면 더더욱 그 상대적인 옳지 않음에 대해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행동을 하되, 섣불리 그 상대에 대한 종합 판단의 결과에 '악'이라는 딱지를 섣불리 붙이는 편협함은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

인간의 뇌는 가만히 두면 딱지 붙이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람이 생기면 '예비 악인 후보자'그룹으로 옮겨버리고 만다. 본인은 조금 더 지켜본다는 생각에 자신이 일면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은 성숙함을 지녔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큰 착각이다.

단번에 판단을 내리든, '후보자 명단'에 올리든 넓게 보면 같은 행위다. 인간은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확증편향적 습성이 있기 때문에 예비 후보자로 지목하는 순간부터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는 것에 혈안이 되기 때문이다. 

시작은 '후보자'였으나 '최종 당선인'이 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다. 그렇게 머릿속 선거를 기획한 당사자는 본인의 성숙하고도 정확한 안목에 감탄하며 더더욱 그러한 사고 패턴을 강화하는 오류에 빠진다. 그 누구도 이와 같은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만이 정의한 왜곡된 '옳음'에 취해서 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 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해야 하는 이유다.

(..)

역사가 아무리 많은 이들이 흘린 피로 세워졌다고 해서 나의 역사마저도 피로 쓰고 싶지는 않다. '남들도 그래'라는 말로 정당화하고 싶지도 않다. 그 사람이 흠결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큰일을 하다 보면 소수의 희생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에 따르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나는 내 결정으로 인해 누군가 가슴 아파할 것을 안다면 최대한 다른 가능성도 모색해 보는 사람이고 싶다. 사람들의 피와 땀, 눈물 위에 세워진 왕국에 살고 싶지는 않다. 

융통성 없는 사람이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비겁한 사람이고 싶지도 않다. 융통성과 비겁함이 미루는 교집합을 만들고 싶지 않다. 나는 앞으로도 아마 많은 길을 돌고 돌아가겠지. 그럼에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그런 용기가 계속 샘솟는 지혜의 샘물이 마르지 않길 바란다. 그 샘물을 촉촉이 적시는 것은 남들의 피눈물이 아니라 내 땀이길 바란다. 그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것은 신념에 따라 내딛는 묵직한 나의 두 발걸음이기를 바란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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