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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Dec 06. 2022

壬寅년 辛亥월 다섯 번째 기록

22.11.27(일) - 22.12.03(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11.28 (월)


(..)

운에도 계절이란 게 있다. 봄에서 출발하여 겨울로 향하고, 다시 겨울에서 다음 봄을 향해 나아가는, 계속되는 흐름의 기운이 있다. 이것은 각자가 경험하는 세상 너머, 모두의 세계의 흐름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언젠가 인류 역사에도 계절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인류는 겨울의 시대를 지나는 와중에 있다는 말도 함께. 과거에 지금보다 더 힘든 시절도 있었는데 무슨 겨울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옛날 시절부터 지금까지 누군가가 살아 숨 쉬고 있을 때라야 비교를 통한 논의가 가능할 문제이리라.

그러나 현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 과거라는 시절에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매 사이클을 돌 때마다 인류가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겨울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다. 그 시대가 어떻든 간에 겨울은 언제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겐 가장 힘겹고 두렵고 고통이 가득한 시기이다. 과거의 겨울뿐 아니라 지금의 겨울도 그 순간을 사는 사람들에겐 모두 똑같이 그저 추울 뿐인 것처럼 말이다.

(..)

그저 진심을 담아서 상대의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것에 집중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나의 진가를 알아봐 주고 또다시 찾아올 거라고 말했다. 그것이 우주에 전달이라도 됐던 것일까. 기대도 안 했던 내담자 한 분이 오랜만에 다시 찾아주셨다.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만족을 하신 것만으로도 내게 뿌듯함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자주 가는 카페(어느 카페인지는 모르겠다)에 추천글을 남겨주셨단다. 실제로 얼마 가지 않아 새 내담자들이 우후죽순 찾아오기 시작했다. 뿌듯함과 감사함으로 가슴 벅차던 밤이다.

(..)

상담을 하는 데 있어 지식만이 능사가 아님은 확실하다. 상대방과의 교감, 경청하는 자세, 그리고 선입견 없이 상대를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열린 마음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 이것은 기교로써 늘리기엔 한계가 있다. 글로 배운 공감이 되지 않으려면 마음이 담겨야 한다. 마음이라는 물을 담는 그릇의 너비는 스스로 키워야 한다. 

이것은 결코 지식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영역이다. 근간에 깔린 심리적 대전제,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에서부터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이 사람이 지금 대하고 있는 문제를 현명하게 직면케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진심. 그리고 당면한 과제 자체를 넘어서 삶 자체를 잘 살아내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 사람에 대한 이해와 세상에 대한 이해. 여러 가지가 한 데 어우러질 때 상담이라는 오케스트라가 완성된다.




22.11.29 (화)


(..)

부정적 에너지, 긍정적 에너지 중에 무엇이 더 전파되기가 쉬울까? 나는 전자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성적이기 이전에 생물학적 본능을 타고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불안, 두려움, 분노 등에 쉽게 반응한다.

(..)

현대에는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보다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 더 큰 문제다. 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거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히거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거나 하는 등. 인간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에 의해 '나'라는 정체성에 입힐 수 있는 상처를 막고 싶어 한다.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그러한 예방의 일환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자연 상태에서 동물들의 천적 감지 능력에는 오류가 거의 없는 반면, 현대를 사는 인간이 경계하는 '정신적 위협' 감지 능력에는 오류가 많다. 우리는 상대의 의도나 행동에 대해 자신만의 주관적 기준으로 '임의 판단'을 내린 뒤, 그것에 의해 즉각적으로 촉발되는 감정을 '진실'이라고 믿는 오류를 범한다. 

(..)

내가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그리고 내 곁에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길 위에서 만난, 인연을 맺은 모든 인연들이 내게는 감사한 존재들이다.

(..)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정말 달콤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졸음이 물밀듯 밀려오는 낮 시간에 30분가량 눈을 붙이는 것 아닐까.

(..)

인연은 시절의 문제다. 그처럼 내가 붙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인연이라면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이어지고, 그렇지 않다면 자연스레 연락이 끊긴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이어져 오고 있는 인연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괜스레 감사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

의심은 무조건 나쁜 게 아니다. 의심하는 것은 비판적인 시각을 지녔다는 것이고 맹목적인 수용의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시각을 유지하는 것은 결국 매사 깨어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의심하는 자는 곧 깨어있는 자이다. 데카르트 역시도 숱한 의심 끝에 그만의 철학적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던가?

단, 자기중심이 잡혀있지 않을 경우 의심은 오히려 어떤 것이든 불신하고 선택을 내리지 못하게끔 가슴을 닫아버리는, 잠든 의식을 만들기도 한다. 무엇이든 양면이 존재한다. 그 '무엇'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양면성이 지닌 위험성이 달라진다. 동전은 양면이나, 칼날은 양날이듯이.




22.11.30 (수)


(..)

철이 든 사람은 바쁜 와중에도 주변을 살필 줄 안다. 특정 시기에만 일어나는 이벤트는 시급성과 중요성이 모두 높은 일인 경우가 많다. 그쪽 사분면에 위치한 일들을 차질 없이 해내는 사람이 철이 든 사람이다. '철'이라는 게 결국 때에 맞춰 순리대로 사는 법을 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

종교적 우월주의, 배타주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연민과 동정은 우월과 열등을 상대적으로 구분하는 관점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서부터 일방적인 권고와 추천이 일어난다. 묻지 않은 것에 대한 조언이나 추천은 그 당사자가 조언의 대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한 프라이드를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종교는 결국 우주의 섭리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에는 나 역시 이견이 없다. 그러나 종교가 진리 그 자체라고 믿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진리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

진리는 지도자의 말씀에 있지도, 경전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삶의 모든 현상을 직접 경험하는 우리 자신 안에 있다. 진리는 언어나 지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현란한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그것은 진리를 묘사한 하나의 작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리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

경험되지 않은 진리는 지식에 불과하다. 마치 조류 백과사전을 들고 다니며 온갖 새의 생김새와 종류, 심지어 학명까지 줄줄 꿰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가 실제로 본 새는 길거리의 참새와 비둘기가 전부라면, 그는 새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다.

(..)

중요한 것은 현상 그 자체이지 그것에 대한 해석도, 지식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현상을 더 잘 이해하고자 노력한 흔적이자 부산물인 셈이다. 그렇기에 그 도구나 결과물이 가장 의미를 갖는 사람은 그것을 최초로 창안한 자가 될 것이다.

사과라는 대상을 처음 본 동쪽 마을 사람은 그것을 '사과'라고 부르고 서쪽 마을 사람들은 'apple'이라 부른다. 설령 동쪽 마을 사람들이 사과를 더 일찍 발견하여 사과라는 '개념'이 더 일찍 만들어졌다고 한들, 사과를 '사과'라고만 불러야 유일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

언제나 현상이 우선이고 나머지는 부수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진리를 좇는 길 위에서 걷는 사람이라면 명심해야 한다. 아니, 우리 모두는 결국 각자만의 세상을 경험하는 존재이고, 모든 경험 속에는 우주의 신묘한 섭리가 담겨 있음을 고려한다면, 누구나가 구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배타주의와 동시에 분별심을 모두 경계해야 한다. 

경험 없는 말은 뿌리 없는 나무와도 같기에. 직접 그 집단 속에서 경험해 보지 않고 내리는 모든 판단에는 주관이라는, 그리고 선입견이라는 불순물이 끼어 있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이 현명하다. 

(..)

이를 이해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정상적이고 성숙한 소통이 가능해진다. 주변을 둘러보면 소통의 탈을 쓴 불통이 즐비하다. 일방적인 설교와 자기 과시, 혹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세상과 정부에 대한 혐오가 이어진다. 그 속에서 올바른 소통은 소원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사실은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 단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 모두는 테스 형의 지혜를 가슴속 정언명령으로 삼아야 한다.




22.12.01 (목)


(..)

정신없이 살다 보면 특정한 시기에 해야 할 적절한 행동들을 놓치게 된다. 특히 12월 중순이 넘어가면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앞두고 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변을 돌아본다는 것에는 봉사도 포함이 된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겨우 하루씩 연명해 가는 이웃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훨씬 많을 것이다.

자기 것을 흔쾌히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넉넉하고 여유가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GDP나 GNP 같은 것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IMF 사태를 맞은 97년도보다 지금 GDP가 더 높아졌지만 넉넉함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과연 요즘 같은 분위기에 금 모으기 운동을 한다면 참여율이 얼마나 될는지?

(..)

예나 지금이나 미래는 늘 불확정적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고 그렇지 않은 시절이 있다. 차이는 무엇일까. 정부나 사회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결국 자신이 튼튼한 벽돌집 안에 사느냐 지푸라기로 만든 집에 사느냐에 따라 안심의 정도가 결정이 되고 그것이 행복도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행복은 순간적이고 폭발적인 쾌락과는 다르다. 다이내믹한 상황이 아니라 안정감이 지속될 때, 마음의 평화 속에서 행복은 그 꽃을 피우게 된다.

(..)

시대의 불안정성이 높다는 것은 다른 말로 새 시대가 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존의 프레임의 연장선상으로 보면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자는... 'Great Reset'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더라. 그것이 무엇이든, 누가 주축이 되어 이끌든, 옳든 그르든 간에 각 개인의 입장에서는 거부하기 어려운 거대한 변화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때일수록 알아차리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어차피 미래를 완벽히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인간의 마음은 변덕과 충동으로 인해 언제나 예상을 비껴간다. 이성은 예측 가능해도 감성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

인간이 예측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은 축복이다. 신이 내린 선물이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예측이 쉽다는 것은 통제와 선동이 쉽다는 것이며, 그것은 다시 말해 지배하기도 쉽다는 얘기가 된다.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예측이 쉬워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군집을 형성할 때다. 각 개인을 1:1로 선동하는 것보다 군중심리를 이용해 선동하는 편이 훨씬 쉽다. 각 개인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여론을 형성하고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은 '그들'에겐 식은 죽 먹기다.

군중은 알아차림이 어렵다. 각 개인이 모이면 이성은 마비가 된다. 그 속에서도 군중의 일부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관점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의 존재가 늘 '그들'에겐 변수이자, 인류에겐 '희망'이 된다. 그런 개인들이 위기나 혼란의 순간에 빛을 발한다. 

군중이라는 물에 희석되어 자신만의 색깔과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 척추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똑바로 들라. 바른 자세에서 바른 마음이 나오는 법이다.




22.12.02 (금)


(..)

인간은 왜 자꾸 자연적으로 주어진 기본 상태를 바꾸려 드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꿈속에서도 한 것 같다.

(..)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활을 쏘러 다녀올까 싶다가도 그냥 걷자는 생각으로 귀결한다. 그래, 걷자. 루소처럼. 걷기는 성스러운 행위다. 인간은 걸을 때 영적으로 자유로워진다. 무협지에서 기경팔맥이 개방되어 숨겨져 있던 능력을 얻게 되는 것처럼 걷기는 내면 깊은 곳에 지니고 있던 지혜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그 지혜는 흘끔 쳐다보기만 해도 커다란 힘을 줄만큼 다스하고 무한하며 웅장하다.

(..)

지금도 여전히 한 번씩 펜 쥐는 자세에 관해 이상적인 상태를 찾아가며 바른 자세로 힘을 빼고 쓰기 위해 꾸준히 시도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걸 적어둔다. 무슨 역사 기록가니? 후대에 발견될 것을 염두에 두고 쓰게?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쓰게 되면 글에도 다분히 영향을 주게 된다. 그것은 모닝 페이지가 아니라 아침 글쓰기가 되어버린다. 주객의 전도다. 어떤 삶을 살든 간에 본말이 전도되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하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

어딘가 진행이 더디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머리가 '그래도 해야지..'하며 스스로를 독려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객이 전도된 경우가 많다. 죄책감, 부채감 등에 의해서 내리는 모든 결정들,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행동들은 모두 다 영혼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럴 땐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 것이냐, 아니면 사회에서 제시한 모범 답안만을 수용하며 고유한 내면의 빛깔의 근원에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천편일률적인 필터를 덧씌울 것이냐, 이 둘 사이에서 말이다.

전자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생기'를 잃지 않는다. 삶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그런 생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게 가장 자연스러움을, 삶이란 생명력의 태동에 다름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나 자신의 고유한 색채를 상실해 가는 것은 죽은 삶이다. 

그런 삶의 종국에는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인터넷 검색이나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거나 비교해 볼 타인이 없이는 스스로 답을 구하지 못하는 정신적 좀비의 상태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사회 시스템은 그런 노예 상태의 인간을 양성하는 공장이다. 그런 정신적 반송장 상태의 인간은 시스템이 잘 돌아가도록 해주는 훌륭한 연료자원으로서 기능하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22.12.03(토)


(..)

손흥민 선수를 비롯하여 몇몇 선수들은 기쁨의 눈물까지 흘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눈물샘을 자극했을 것이다. 열심히 달려온 시간들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두 발이 부르트고 심장이 터질 듯이 달려도 오직 결과로만 판단하는, 아니 어쩌면 결과와 상관없이 늘 흠잡을 곳을 찾아 물어뜯기 바쁜 일부 종자들의 '헛소리'가 정말 헛소리에 불과했음을 결과로써도 증명해 낸 순간. 승리의 순간이었다.

(..)

이 결과를 만들어 내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을 의료진과 코치진에게도 감사와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또한 선수들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 싸우던 경기장 밖의 12번째 선수라는 별칭을 가진 응원단들에게도. 그들 역시 서로 부둥켜안고 함성을 질렀다. 몇몇 분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뚝뚝 흘리기까지 하더라. 그 눈물엔 어떤 의미가 서려 있을까?

선수들의 입장에서 싸우다 보니 그들의 입장을 완전히 헤아리게 된 것일까? 그들의 희로애락을 매순간 같이 느끼는 뛰어난 공감 능력을 갖춘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선수 중 누군가와 가까운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당사자 만큼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그리고 팀 전체가 이날을 위해 얼마나 피, 땀, 눈물이 서린 고생을 했을지 몸과 마음으로 모두 이해하는 사람. 선수들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절로 눈물이 함께 흐르는 사람들.

그것이 아닌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속에서 본인의 삶과 견주어 생각해 보기도 했으리라. 대표팀 선수들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밟아왔을 지난 과정들, 시련들, 고난들을 모두 뚫고 이겨내는 모습을 통해 마치 자신이 앞에 놓인 장애물을 헤쳐나갔을 때 느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결국 자기 앞에 놓인 그것이 무엇인지냐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길 위에서 숱한 고난과 시련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가슴 한편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팀이 역경을 딛고 올라서는 감동적인 순간을 목도하는 과정에서 자기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

그 순간에 그 사람은 다른 관중들, 선수들, 스태프들, 그리고 그밖에 눈에 보이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사람들과 연결된다. 삶과 하나가 된다. 그게 공감이라는 것, 공명한다는 것의 참 모습이리라. 외부의 대상에서 나를 볼 때. 나와 네가 다르지 않고, 우리와 그들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아는 순간. 안의 세상과 밖의 세상이 다르지 않음을 알 때 비로소 감정적인 연대가 일어나는 것이 공감인 것이다. 

결국 공감은 억지로 하는 것도, 매뉴얼 따위를 읽어서 따라 한다고 흉내 낼 수 있는 잡기술이 아니라 연결성을 상실하지 않았을 때, 혹은 다시금 본래 지녔던 그 연결성을 회복했을 때 주어지는 지복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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