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Jan 17. 2023

壬寅년 癸丑월 두 번째 기록

주간단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1.09 (월)


(..)

가수나 기타 다른 여러 위인들(?)이 모닝 페이지 또는 그와 비슷한 습관을 갖고 있는 사례와 그 이유를 찾아보자. 그게 Hooking Point다. 


(..)

각종 플랫폼에 입점시키고 블로그나 인스타 등에도 올려 홍보를 하자. 그리고 광고도 돌려 보는 거야. 하루에 5,000 ~ 10,000원 정도 투자해서 하루에 한 권이라도 팔리면 손해가 아닌 구조를 만드는 거지. 광고의 힘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 너무 의존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지.


(..)

안 되겠네.라고 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의도의 선언이고 가능성의 선언이다. 이것은 일종의 스케치다. 백지인 상태의 종이는 아무것도 아님과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하다. 


종이의 크기라는 물리적 크기의 제약을 제외한다면 백지는 곧 모든 가능성을 내포한다. 스케치가 그려지면 백지는 하나의 무엇으로 규정된다. 그 가능성은 백지로 하여금 상상도 못했던 어떤 것이 되어가는 여정이 될지도 모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가능성의 제약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은 어떠한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 자신의 한계를 자주 언급하는 편인가,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편인가? 눈은 죽어있나, 살아서 빛이 나는 것만 같이 생동감을 띠는가?  살아있음! 그것은 삶이 우리에게 준 축복 그 자체다. 


(..)

나는 지금 평소보다 시간을 절반이나 단축해서 모닝페이지를 쓰고 있지만 시간의 단축이 감정의 크기까지 절반으로 줄이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커피와 잔잔한 음악 속에서 아침 단상들을 여과 없이 흘려보내고 있다.


대장에서는 배변을 통해 깨끗하고 텅 빈 상태를 유지하듯 머릿속, 가슴속에 찌꺼기처럼 생각이 쌓여 병이 되도록 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 모닝 페이지인 것이다. 자고로 사람은 총 2회의 배변 활동이 필요하다. 대장의 배변, 그리고 모닝 페이지의 그것. 


나는 당신이 모닝 페이지를 쓰길 바란다. 지금 적은 이 짧은 한 문장이 누구에게 가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진심을 담아 한 글자마다 영혼을 눌러 담았다. 마음을 담은 글엔 보이지 않는 기운이 서린다. 그 문장을 눈으로든, 입으로든 읽은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그 에너지를 전달받는다. 


그래서 같은 글도 누가 쓰느냐, 인간이 쓰느냐 AI가 쓰느냐에 따라 사실 우리가 모르는 큰 차이가 존재할 테다. 효율성과 합리성만이 최고로 평가받는 현시대에서는 그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간 모든 이가 마치 상식처럼 이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리라 믿는다.





23.01.10 (화)


(..)

백회에 침을 놓는다. 모닝 페이지의 시작을 알린다. 지금은 묘시. 경락의 유주에서는 대장에 기가 흐르는 시간이다. 건강한 사람은 이 시간에 대변을 본다던데 나는 2시간 뒤인 진시에 대체로 보는 편이다. 기상시간이 인시가 아니라서 변 보는 시간도 그만큼 늦춰진 것일까? 자는 동안 기가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잠들어 있다면 다만 그 흐름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기의 흐름을 중요시하는 분들이 그토록 인시에 일어나려고 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

갑자기 무슨 일인지 만우절 특집이 생각났다. 주간단남의 이면을 보여주고 프사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주간단남 내용은 내가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아니라 숨기고 싶은 내용, 별것 아닌 내용들로 채우는 거다.


(..)

인간의 다양한 페르소나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변한다. 성호의 모습 역시 간단남으로 활동한 이래로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며 부캐인 단남 역시도 본체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본캐가 지향하는 바 중 어느 하나를 가져와 인격화한 것이 부캐이기 때문이다. 내 본캐가 사주로 쳤을 때 일간이라면 부캐는 다른 천간이라고 할 수 있다.


(..)

오늘은 무슨 아이디어가 샘솟는 날인가? 또 하나의 생각이 불현듯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모닝 페이지에 종종 등장하는 명리 관련 단상들, 직관적인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말고 브런치에 적는 거다. 제목에는 [명리 잡설]이라는 말머리를 달고서..


지금 생각하면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방식을 곁눈질로 배운 제목 짓는 방법은 노골적이지만 클릭률을 높이는 효과는 확실했다. 그러나 나는 무슨 자존심인지 (자의식인지) 불특정 다수의 클릭을 유도하는 게 아니라, 그게 필요하던 사람에게 적절히 가닿기를 바란다. 차라리 이런 니즈에 걸맞은 도구는 광고다. 이것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이것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그뿐이다. 그 이상은 불필요하다.


광고를 돌려서 클릭하지 않을 수가 없는 카피를 써서 어떤 게 더 사람들의 주의력을 낚아채는지 쉬로 비교하고 또 개선하고 실험하기를 반복하는 것에 매몰되어 버리는 방식에 신물이 난다. 그것이 지나치면 본질을 놓친다. 본질은 언제나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구현이 되었다면 제품이나 서비스가 본질이다. 올바른 경로를 거쳤다면 거기에 본질의 정수가 녹아 있다.


(..)

그 대상이라는 본질을 놓치면 모든 행위는 다 헛질이 된다. 거기에 관련된 모두가 거기에 열광해야 한다. 자신도 열광하지 못하는 것을 왜 남에게 알리지? 왜 남에게 팔지? 그것부터가 애초에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다. 세상에 그저 그런 제품과 서비스들, 어떻게든 사람을 끌어모으고 그들의 지갑만 열자는 식으로 생각하는 자들의 존재로 지금 이 순간에도 쓸데없는 것들이 판을 쳐서 사람들의 주의력을 좀먹고 있다. 


이제는 철학이 필요하다. 인류는 더 이상 생존에의 위협을 겪지 않고 꼭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는 다 채워졌다. 남은 것은 물음이다. 모든 것이 다 있는 세상에서 내가 이것을 소개해야 하는 이유는 뭐지? 나는 무엇을 위해 이것을 알리고자 하지? 하는 물음. 그런 진심이 있어야 한다.


(..)

인간은 본능적으로 낯섦을 경계한다. 지금 내게 터키어로 된 책을 던져준다면 1분도 못 버티고 흥미를 잃고 말 것이다. 그만큼 나는 평소에 그쪽과 관련된 생각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기에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글은 평소에 익숙한 것을 다시 보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익숙하지 않거나 불편한 분들이 계속 읽기엔 재미도 감동도 없으리.


결국 대중의 눈치를 보며 내가 어떤 것을 해야 그들이 나를 좋아해 줄까? 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긍지를 잃는 길이다. 일관된 모습으로 꾸준함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긍지이고 그것이 곧 브랜딩이다. 일관성과 반복성. 그러면 자신만의 색채가 드러난다. 


그 색채가 내 영혼의 빛깔이다. 그것이 탁하든 맑든 밝든 어둡든 간에 내게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그 강렬한 빛을 사랑하라.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반드시 존재한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그런 믿음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라. 다 떠나서 나 자신이 스스로의 열렬한 팬이면 그걸로 족하지 않나. 삶이란 결국 내 안의 진정한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연속이다. 그게 저마다의 공통된 삶의 의미요, 목표다.




23.01.11 (수)


(..)

삶의 여유를 잃지 말라. 여유는 다름 아닌 일상의 리듬에서 나온다. 자신의 조급함으로 인해 스스로 그 신성한 리듬을 멋대로 깨뜨리고 변경할 때 일상의 균형은 무너지고 마음의 균형도 무너진다.


(..)

집에다가 그 경락 모형도?를 보고 혈자리를 틈틈이 익힐 수 있도록 하나 둬야 하나. 4관을 제외하고 각 경락별 모혈까지는 외웠었는데 반복을 하지 않으니 금세 다 까먹어 버렸다.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은 레알 띵작이다.


(..)

어제 읽었던 책 구절의 내용이 공감이 간다. 원리에 대한 파악 없는 단순 암기를 통해 익힌 것은 금방 날아가고 마는 알코올과 같은 휘발성을 가진다. 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본기를 탄탄히 다져야 실전에서 다양한 응용이 가능해진다.


(..)

틀리는 것을 걱정하면 본질을 놓친다. 틀릴 것을 걱정하는 것이나 어떻게든 맞히려고 애를 쓰는 것이나 방향성만 다르지 결국 같은 현상의 다른 두 얼굴에 다름 아니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그러니 언제나 중화점을 찾자. 그것은 본질을 잃지 않으려 하는 데서 온다. 사주든 타로든 역술/점술 기반의 상담의 방점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상담에 찍혀야 한다. 


나는 술사가 아니고 도사도 아니다. 뭔가를 짚어냄으로써 용하다고 추앙받기를 기대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모든 것은 자연의 순리대로 될지어니. 나는 그것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뭔가를 발견하는 사람, 순리에 따르는 사람이고 싶다.


(..)

진짜 별 내용도 의미도 없는 꿈이었다. 그래도 만물의 존재에는 내가 모르는 자연의 의도, 신의 섭리가 담겨 있음을 잊지 말자. 내 관점에서나 시답잖을 뿐이지, 그런 꿈을 꾸게 된 나름의 이유가 다 있을 것이다. 


(..)

나는 궁금해진다. 꿈은 기억 못하고 이곳만 기억을 하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 개가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 것은 각자의 영역이 활성화되는 동안에는 체험되는 그 세계는 정말로 실존한다고 여겨지는 것인가? 그러니 꿈 세계나 현실 세계나 구분이 없는, 둘 사이의 어떠한 위계 관계도 없는 개별적 구획이란 말인가? 어쩌면 장자의 말이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욱 현생에서의 삶을 즐기면 그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곳도, 저곳도 모두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허상인 걸지도 모르겠다. 진짜 답은 내 영혼만이 알겠지. 영혼의 시야와 하나 된 합일 상태를 이루는 게 깨달음 일 테고. 궁금하다. 이 세상의 너머 저 끝엔 무엇이 있을지. 


그래도 나는 주어진 현실을 허무주의를 갖고서 마주하진 않을 것이다. 경험하는 동안에는 늘 매 순간에 온전히 머물도록 하자. 최선을 다해서. 그게 삶을 대하는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세일 것이다.




23.01.12 (목)


(..)

물에 빠졌을 때 익사하지 않으려면 마음을 우선 편하게 먹고 몸에 힘을 빼야 하듯 아침에 일어났을 때 스스로가 생각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힘 빼기다. 몸에 힘을 잔뜩 주면 경직되어 물속으로 더 가라앉듯, ‘아, 일어나야 하는데’와 같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만 있으면 몸은 반대로 더 무거워진다.


몸에 힘을 빼자. 천천히 호흡을 하자. 그리고 물 위를 헤엄치듯 다리부터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결코 급하지 않게. 입가엔 은은한 미소도 띠면 좋다. 그렇게 일어난다. 이것이 여유로운 기상법이다. 우아하고 고결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첫 단추를 꿰는 길이다.


(..)

깨작깨작 이렇게 침을 스스로에게 놓은지 그래도 반년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두렵다. 날카로운 것이 내 안에 들어와 예리한 고통을 줄 것이 두렵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통해 내게 부족한 금 기운을 보충할 수 있고, 현침살을 풀어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

나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게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든다. 개인정보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애초에 SNS나 블로그 등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남들 다 보라고 올려놓고서는 사생활 침해니 뭐니 운운하는 것도 웃기다. 


물론 치마를 입었다고 그 옷을 입은 사람이 성범죄자를 자극했다고 할 수 없듯, 인터넷상에 사적인 내용을 올린다고 해서 그게 자신이 올린 것 이상으로 사생활이 공개되어도 동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드러나는 것, 공개된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올바른, 양심적인 태도다.


(..)

중완과 합곡에 침을 놓고 나니 한결 낫다. 인간의 몸에는 스스로를 치유할 힘이 있다. 우리가 병에 드는 이유는 체내 기운들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자가 치유력도 같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침과 뜸은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여 원래의 균형에서 비롯된 치유력을 일으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균형이 회복되면 나머지는 몸이 알아서 한다.


(..)

크게 보면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거시적인 관점만이 능사는 아니다. 우린 때로는 작게 보는 연습도 해야 한다. 세상에는 작게 보아야, 자세히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


(..)

단순히 필체를 교정하기 시작한 게 작년의 습관이라면 올해는 필체 교정을 포함하여 자세까지 안정적으로, 평생 글씨를 써도 무리가 없도록 잡아나가자. 계속해서 점검하고 그 좋은 느낌을 몸에 각인시켜라. 뇌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것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을 가기도 한다. 좋은 습관은 뇌가 아니라 몸에 새기자. 그것은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서도 자유로울 것이다.




23.01.13 (금)


(..)

매일 아침 일어나면 후두부와 콩팥 쪽을 두드려 마사지를 해주는데 목덜미 쪽에 중풍을 방지하는 혈자리인 풍지가 있다고 하니 더욱 열심히 두드려야겠다. 좋은 것을 접하면 내 것으로 흡수하라.

(..)

아무튼 꿈에서 깨고 양치를 하는데 불현듯 아이템이 떠올랐다. 일명 ‘블라인드 노래팅.’ 사람들이 서로 사전 정보 없이 노래만으로 서로에 대한 소통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가장 유사한 컨셉은 오디션 프로 중에 뭐더라.. 슈가 보이스였나? 심사위원들이 pass 버튼을 누르면 뒤돌아 있던 심사위원석이 돌아가면서 비로소 참가자를 눈으로 볼 수 있는.

(..)

블라인드만큼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책임감이다. 본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 상대에 대한 존중. 애초에 노래만을 보고 상대를 고른 건 본인이다. 그걸 바탕으로 서로에게 대화권이 주어지고 그렇게 매칭이 된 상태에서는 다른 서비스는 이용이 불가하고 오직 그 상대와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일정 기간 혹은 일정량 이상의 대화가 쌓이기도 전에 그 방에서 나가버리면 그 사람은 신뢰도가 깎여서 이용에 페널티가 가해진다. 

이런 컨셉의 기능의 존재 이유는 만남의 ‘반-틴더화’를 지향하기 위해서다. 온라인 문화의 활성화로 인해 자유롭고 가벼운 관계가 보편화되고 있다. 가벼운 콘텐츠 소비가 우리의 뇌를 망가뜨린다는 연구결과가 수두룩하다. 무책임함을 ‘쿨함’으로 포장한 인스턴트 관계는 어떻고? 누군가와 진득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 계속해서 그런 가벼운 관계만을 맺다 보면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는 법을 모르게 된다. 

특히 소위 인디고 세대들은 연애 경험이 전무하거나 있어도 온라인 연애만 해본 사람이 기존 세대의 상식보다 훨씬 많다. 이것은 이미 과거 히피 문화처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지 오래다. 이것을 어떻게 해보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해법은 대안을 만드는 것에만 있다. 유행은 또 다른 유행에게 묻히는 법. 

사람은 옳다고 믿는 것을 좇는 게 아니다. 유행하는 것을, 다수가 옳다고 따르는 것을 그저 따를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흐름이 아주 작은 실개천에서 큰 강의 세찬 물줄기가 되기까지의 과정의 시작에는 무엇이 있었나? 


어떤 현상에 문제의식을 느낀 누군가의, 다수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은 누군가가 존재할 것이다. 늘 최초의 누군가가 존재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이런 작은 씨앗에서 출발한다.


(..)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 기능은 ‘느린 피드.’ 자신의 노래를 어필한 각종 피드가 뜨지만 인스타나 틴더처럼 바쁘게 엄지손가락을 놀릴 일이 없다. 자신과 마주한 어떤 콘텐츠든 우연이 주는 인연의 힘을 믿는다. 결코 그것을 가벼이 여기며 0.1초 만에 엄지로 넘겨버리는 냉담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꽉 막힌 서비스를 누가 이용할까 싶지만 이게 현실 생활에서의 인간관계다. 소개팅 하나를 해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체면, 상대에 대한 예의, 소개팅 자리를 만들어 준 사람에 대한 예의 등 고려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가 온라인화되면서 그런 것들이 허례허식 취급을 받으며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 동물의 왕국, 도파민에 의해서만 관계가 맺어지는 카지노 도박장 같은 곳으로 관계의 장이 옮겨지고 말았다.

나는 이와 같은 가벼운 형태의 콘텐츠 소비의 환경, 관계의 지향에 반대한다. 나는 사람들이 얕아지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결국엔 인류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신뢰와 공존의 가치마저 무너뜨려버릴지도 모른다. 

응답하라 19XX 시리즈가 한때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한 단순한 향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 그 시대에 살아본 사람들만 그 프로를 봤어야 논리에 맞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지금은 퇴색되어 가고 있는, 초개인주의 사회에 잊혀지고 있는 진정성, 사람 간의 정 등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도 한몫했다는 뜻이 된다. 


공동체에 속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는 게 인간의 원시적 본능이다. 늘 말하지만 지금의 초개인주의, 파편화된 양상으로 흘러가는 사회는 결코 답이 되어선 안 된다. 







[주간단남]

첫 번째 글(21년 6월) 보러가기



간단남 응원하기

작은 관심과 응원만으로도 지속해 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壬寅년 癸丑월 첫 번째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