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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an 25. 2023

壬寅년 癸丑월 세 번째 기록

주간단남 1월 3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1.15 (일)


(..)

불의에 저항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멋진 경지는 똑같은 방식으로, 함무라비 법전의 정신에 입각한 전략을 취하지 않을 때라 생각한다.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경지. 실제로는 그보다 더 열악한 상황임에도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그 마음. 그것이 얼마나 높은 경지인지를 알겠기에 가슴이 더 찌릿했던 것 같다.


(..)

그로 대표되는 조상들이 만들어 둔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한 후손으로서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 단순한 단어에 내가 느낀 감정을 모두 담을 수가 없다. 단순히 감사함만 느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열정과 흔들림 없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흔들릴 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용기, 그런 자질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에 대한 귀감을 얻었다. 한편으론 그에 비해, 그 당시를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도 안일하고도 과분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겪는 경험만이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믿고 산다. 어릴 적 밥을 남기면 으레 듣던 말인 '아프리카 아이들은 지금도 굶고 있다'라는 말에 진심으로 스스로의 '사치'에 대한 부끄러움을 쉽사리 느끼지 못했듯이,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은 사람일수록 본인의 고통이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상태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고통의 감정을 부정해서도 결코 안되겠지만 거기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리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남의 행복을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스스로를 불행한 상태라고 여기는 못된 습관이 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정작 남의 불행을 보며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감사한 상황인지는 전혀 생각해 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모두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위만 쳐다보는가? 이것은 인간이 손실에 대한 회피 성향이 이득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는 성향보다 압도적으로 발달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지지 못한 것에만 주의를 빼앗기는 것은 스스로를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광고를 하고 다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망쳐놓는다. 거기서 끝난다면 다행(?)이다. 자업자득이니.


문제는 그러한 태도가 굉장히 강력한 전염성을 띤다는 점이다. 인간의 부정 편향 성향, 그리고 인간이 지닌 거울 뉴런이라는 존재로 인해 간접 경험을 직접 경험처럼 여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탓에 주변에 늘 자기 얘기만, 그것도 불행한 얘기만 늘어놓는 소위 에너지 뱀파이어'를 만나게 되면 괴롭다. 부정 편향에 의해 생겨난 에너지 뱀파이어는 거울 뉴런의 존재로 인해 공감을 할 줄 아는 '희생양'을 자양분 삼아 오늘도 자신의 불행을 주변에 전파하고 다닌다. 그는 자기 자신만 망쳐놓는 게 아니라 주변까지도 어둠으로 물들인다.


(..)

느슨한 관계를 여럿 가지고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연구 결과는 흥미로웠다. 나는 피상적인 관계만 늘어나고 있는 현대인의 관계 맺는 방식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는데 그게 긍정적인 작용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자연 생태계가 건강하려면 생물종의 다양성이 무척 중요하다. 인간관계도 그런 셈이다. 그러니 각자의 역량, 심리적 에너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그 속에서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에 거부감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3.01.17 (화)


(..)

근데 한 편으로는 떳떳한 형이 되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이 떳떳한 형인가? 돈 많은 형? 그런데 나는 돈 많다는 것에 부정적 시선이 섞여있음을 방금 저 말을 적으면서 캐치했다. 돈을 버는 과정에 황금만능주의적 가치관이나 이기심이 가득 들어갔을 거라는 투사를 내 멋대로 해버린 것이다. 지금도 그 반자동적인 조건반사가 이뤄지는 것은 내 자의식의 허황된 착각 탓만은 아니리라.


자기 수양이 아닌 자기개발만이 주목을 받고 돈과 관련된 관심은 (물론 이는 시대를 불문하고 중요하긴 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정점에 치달은 모습이 작금의 현실이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 공통된 기조 같은 게 있다. 짐작건대 우리나라는 IMF 사태 이후 돈에 대한 강력한 집착과 강박이 국민 정서와 집단 무의식에 강하게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생존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 먹고 나서도 배고프다를 외치던 '가오나시'처럼 버는 족족 소비와 지출로 나가기 때문에 쌓이는 것도 없다. 그러니 안정을 느낄 새도 없이 다시 노동전선에 스스로를 내던져야만 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관심사는 온라인 쪽으로 옮겨가며 투자와 부업 혹은 사업소득 등을 올리기에 혈안이 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구체적인 양상만 다를 뿐, 그때 이후로 마치 온 국민의 목표가 부자 되기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

내게 드는 그런 부정적인 인상은 어쩌면 철학이 있는 부의 실질적 소유자들이 아닌, 물질 만능이라는 풍조와 시류에 익사하듯 떠밀려 자신이 왜 부를 좇는지도 모른 채 불나방처럼, 불도저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즐비한 경향에 대한 탄식과 경계인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경국 시대정신에 불과하다면 우린 늘 실수를 하고 나중에 후회하기를 반복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을 것이다. 집단 단위로 그러하니 개인 단위도 그럴 수밖에. 아니, 정말 그러한가? 개인은 집단의 경향성에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동물적 관점으로만 인간을 정의하자면 그렇다. 인간의 사회적 본능이 그것을 가능케 만든다. 대세를 따르며 소외받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것. 이게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면 어떨까? 집단적 흐름에서 한걸음 빠져나와 무엇이 자신의 기준인지를 점검할 줄 아는, 그러고자 노력하는 의지의 발현이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실존적 존재의 모습이리라. 그것은 결국 철학, 사색, 그리고 질문으로 드러난다. 의문과 물음이 깨어있음의 발로다.


자본은 도구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 군데에서 목적과 수단이 전치되면 모든 곳에서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이 세상은 어느 하나 연결되지 않고 고립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도심 한복판의 사람과 설악산 정상의 바위마저도 연결되어 있다. 그기 설악에 오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해도 말이다.


(..)

질문하기 위해서는 의문이 필요하고 의문은 관심이 있어야 하며, 관심은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 있을 때 생겨나고 그것은 마음의 여유와 여러 사색의 층위들이 쌓여 있을 때 가능해진다. 궁금해본 것들이 많은 사람만이 의문도 잘 갖는다.


(..)

어쩌면 내가 출근하지 않는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모순되는 두 요소의 조화 덕분인지도 모른다. 첫째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능력. 둘째는 느슨한 인간관계를 두루 구축해두며 지냈다는 것. 세상이 구성된 이치가 음양의 이치이듯 인간에게도 언제나 대립되는 두 종류의 능력, 가치 등을 균형 있게 갖추는 자세가 필요하다.


5:5가 이상적이니, 6:4가 이상적이니 이런 것은 부차적이다. 똑같은 외줄 타기 고수래도 사람마다 균형을 잡는 지점이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균형에 대한 지향 자체이지 특정한 수치나 공식, 노하우 따위가 아니다.




23.01.18 (수)


(..)

타로카드든 오라클이든 특정 상황이나 심리 등을 반영하는 카드가 절묘하게 나오는 것은 어떠한 연유에서일까? 정말 합리주의자들의 말대로 바넘효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단순히 그것 하나로 오랜 역사를 거쳐 지속되어온 명맥을 부정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바넘 효과 하나로 그것을 일축해 버리는 것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세계, 드러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뭔가 있기는 한 것 같은 그 느낌을 애써 부정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정말 그 사안에 대해 너무나 알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과 탐구심에 의한 결론이었다면 고작 그 사소한 근거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에 쉽사리 빠져들지 않았으리라.


(..)

결혼 이후에 집단에서 멀어지는 친구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결혼은 무엇이길래 이토록 누군가의 행동반경에 제약을 거는 것인가? 본인의 이기심을 가정에 대한 안정과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로 포장하여 상대를 구속할 권리를 얻었다 생각하는 게 혹시 결혼을 이용하려는 자들의 심산인가? 


우리는 종종 바른 마음에서 비롯된 바른 결과를 목적으로 두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심지어는 목적에 두는 것을 넘어 규칙화, 법제화하여 어길 시에는 벌금과 같은 페널티를 부과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진짜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른 마음이요,  내 뿐만 아니라 상대도 바른 마음을 갖도록, 상대의 성숙과 성장을 바라는 마음, 오직 그것 하나만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할 수 있다.


(..)

결혼을 단순히 사랑이라는 눈속임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 간의 혹은 가문 간의 거래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관점을 견지한 자라면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숭고한 가치들로 포장된 행동 규범을 상대에게 강요할 권리가 당연히 결혼하는 순간 각자에게(가급적 자신에게만 있길 바란다는 모순도 당연히 빠뜨리지 않고) 생긴다고 믿는다.


그러나 결혼의 진정한 목적을 두 사람의 관계의 결실과 완성으로 보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 혹은 두 집안의 재력의 합일과 같은 것은 관계의 결실이라는 본래 목적에 뒤따르는, 그리고 필수가 아니라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자연스러운 수순일 따름이지 의무도 아니며 목적은 더더욱 아니라고 본다.


그렇기에 이런 대전제를 가진 사람일 때라야 결혼을 통해 개인의 이기심 충족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논의가 가능해진다. 바른 마음을 각자가 갖도록 노력하면 그뿐이다. 나머지는 절로 이뤄진다. 바라지 않음으로써 바라던걸 얻는 무위이화의 이치는 결혼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

올해가 가기 전에 저기 꽂힌 책들을 다 읽자. 새 책으로 눈을 돌리는 정도보다 기존 책에 시선을 두는 연습을 더 하도록 하자.




23.01.19 (목)


(..)

그들의 출전(?) 전날은 어떠할까. 혹은 전날 밤이라는 최소한의 마음의 준비 시간도 없이 갑작스러운 출동으로 가슴속에 사슬 퍼런 사시미 한 자루만 품고서 전장으로 향하는 봉고차 안에 있을 때의 마음은 어떠할까. 사지로 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는 마음이란 감히 상상조차도 하기가 어렵다. 

그들이 군인이라면 적어도 우국충정이라는 말로 그들의 두려움을 애써 덮기라고 할 텐데. 조폭에게도 그런 충성심이 있을까? 개인의 영달을 누리기 위해 들어간 곳에서 내가 아닌 조직을 위해 희생하러 가야 하는 상황이 충성심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포장이 될까 싶다. 그보다는 생존. 오히려 충무공의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오직 스스로의 안위를 보전하기 위해 모두를 죽일 각오로 싸우는 것 아닐까? 가슴 한곳에 분명히 존재하는 두려움을 애써 누른 채 말이다.

전쟁도 없고, 전쟁을 방불케 하는 그런 대규모(소규모도 마찬가지) 패싸움, 살육전 같은 것은 몽땅 다 사라지면 좋겠다. 우리는 동물의 세계에서 차라리 한 수 배울 필요가 있다. 그들은 졸개를 앞세워 권위를 얻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 직접 나서서 자웅을 겨뤄 우두머리 자리를 정한다. 그러면 평화가 지속된다.  일대일로, 스파링을 하든 길거리 싸움을 하든 그렇게 순수한 육탄전을 겨룸으로써 정면 승부를 하는 편이 더 우아하고 멋진 것 아닐까? 

(..)

의사든, 코치든, 상담사든 사람을 치유하고 개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것과 관련된 업계의 모든 종사자들의 진짜 목적인 고객의 창출이 아니라 제거(?)에 있다. 예를 들어 의사의 사명은 아픈 사람이 없게 하는 것, 더 나아가 환자가 스스로를 돌보는 '건강 주권'을 확립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어야 마땅하다. 평생 약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을 관행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

그것을 큰일로 만들지 말라.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이 짧은 한 문장. 이것이 삶의 커다란 기조가 되어야 한다. 그 태도야말로 삶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억지로 애써 작은 일로 만드는 것도, 놀라서 큰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떠한 일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 거기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억누르지도, 그렇다고 거기에 휘말리지도 않도록. 멈춰있지만 끝없이 움직이고 있고, 움직이지만 늘 멈춰서 있는 듯 고요하게 말이다. 삶이란 외줄 타기 혹은 서핑과도 같다.




23.01.20 (금)


(..)

예전에는 이렇게 '민족 대이동'의 시즌을 마치 출퇴근 지옥철에 비유해서 부정적으로 봤었다. 그땐 보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바로 자발성의 여부다. 회사에 출퇴근하는 것과 모처럼 가족들을 만나러 모두가 이동하는 것은 자발성의 여부에서 매우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단순히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다 같이 이동한다는 점이 같다고 해서 똑같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

그도 두렵고, 막막하고, 불안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마음이 약해지고 흔들릴 때마다 자신이 품었던 굳센 의지를 다시금 상기시켰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차이가 있을 뿐, 그런 존재가 있다. 떠올리면 힘이 절로 생기는 존재. 누군가는 가족, 누군가는 자신의 미래, 누군가는 인생의 소명, 또 누군가는 매 순간순간에 깃든 삶의 신묘한 원리 그 자체에서 힘을 얻기도 할 터이다. 

이번 명절이 모두에게 풍요롭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의미 있는 순간들이기를, 매일 같이 치이기 바쁜 일상에서 잠시라도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3.01.21 (토)


(..)

청년들이 괴로운 건 방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황하는 삶이 괴로운 게 아니다. 고민의 과정에서 오는 불안함과 막연함을 극복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을 통해 젊음은 비로소 꽃을 피우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밑거름으로 거듭난다. 

젊음을 왜 청춘이라고 봄에 비유했겠는가. 봄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대지를 뚫고 새싹이 튀어나오는 태동의 계절이다. 동시에 늘 따뜻하기만 한 뜨거운  여름도 아니다. 꽃샘추위도 존재하고, 조석으로 여전히 일교차도 커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을 겪기도 한다. 그게 청춘의, 젊음의 태곳적 원형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고통을 자초한다. 방황의 과정 없이 인생의 황금기를 하루라도 빨리 마주하고 싶어 하는 조급함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그게 아니라면 방황 자체가 최소화된 '정해진 루트'대로 사느라 내면의 목소리와 살제 펼쳐지는 현실 간의 간극으로 인해서. 

어느 쪽이든 방황을 악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고통이다.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방황이 아니라 여행이다. 불안이 아니라 설렘이며, 길 잃음이 아니라 탐구라고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주입식 교육이라 일컬어지는 기존의 교육 방식 하에서도 스스로 고민하고 그에 대한 답이 구해지는 과정을 경험해야 한다고 수학 시간에 배운 바 있다. 답부터 보거나 그냥 풀이 방식만 외워서는 실력이 늘지 않는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이라는 문제에 막막함을 느낀 나머지 덜컥 해답부터 보려는 마음으로 주변으로 눈길을 돌리며 이미 누가 닦아둔 길만 뒤쫓으며 고스란히 답습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한 삶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리고 반드시, 그 젊음이란 시간이 허용할 때 자신만의 길을 닦아나가야 한다. 직접 시도해 보고 부딪혀도 보고 답이 뭘까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아도 봐야 한다. 

No Pain, No Gain은 삶의 주체성이 전제되었을 때에만 참된 의미를 갖는다. 소처럼 일은 죽어라 하는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 지도 모르고 이게 누구를 위한 일인지도 모르고 산다면, 그 끝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자기완성의 경지가 아니라 온몸이 잘려나가 인간들의 밥 상위에 올라가는 처지가 되는 것뿐이다. Gain은 없고 Pain만 가득한 삶.

스스로를 완성해 나가는 삶, 평생을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도구로 전착하다가 단물이 다 빨리고 나면 팽 당하는 삶을 거부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유의지와 주체성을 가지고, 숱한 그리고 깊은 고민의 과정 끝에 내린 결정을 쌓아나가야만 한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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