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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an 10. 2023

壬寅년 癸丑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1.01 (일)


(..)

새해엔 조금 더 남의 렌즈를 상정해 보고 가상으로 착용해 보는 상상을 하는 연습을 하자. 역지사지의 첫 출발은 세상은 각자의 렌즈를 끼고 볼 때는 전혀 볼 수도 들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아니 최소한 개념적으로라도 그렇겠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오늘은 일출을 보러 갈 것이기에 모닝 페이지 3쪽을 다 못 채운다. 정확히는 내가 다섯시 반에 일어나기로 해놓고 더 잠들어 버려서다. 인간은 정녕 의지만으로는 변할 수 없는 존재인가? 특정한 조건에 특정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된 움직이는 살덩어리에 불과하단 말인가?


(..)

인간은 결심만으로는 바뀔 수 없다. 설령 바뀌나 싶다가도 그것을 지속해 나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유전자 자체에 변화를 긍정하기보다 부정하며, 신뢰하기보단 불신과 회의, 의심을 갖도록 설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종들이 살아남아 현재의 문명을 이룬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게 더 중요하다. 너무 이상적이고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다. 환경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게 유전자에 순응하는 동물적 삶이라면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삶이리라. 거부와 극복. 극기복례야말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대표적인 증거 아니겠는가.


(..)

정말 하고 싶다고 말하는 육체적 본능을 자기 자신과 분리시켜 볼 줄 아는 것, 그래서 마치 자식을 기르는 부모의 마음처럼, 혹은 반려동물을 기르는 주인의 입장에서 마음이, 에고가, 동물적 본능이 자아내는 충동과 욕망을 어떻게 다스릴지 차분히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 그게 바로 자유의지이며, 그러한 내적 본능에 끌려다니는 삶이야말로 자유의지가 없는 ‘반 송장’의 삶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부분이 이러한 자유의지인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언어능력, 추리능력 등은 모두 이러한 자유의지가 뒷받침될 때라야 비로소 그것이 주어진 원래의 목적대로 쓰일 수 있다. 그 목적이란 결국 깨닫는 삶이다. 진리를 구하는 삶, 나누고 베푸는 삶에의 지향. 


남은 나 몰라라 하고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는 삶,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삶, 세상은 제한된 몫을 두고 피 튀기는 경쟁을 해야 한다고 보는 삶은 모두 자유의지가 없는 상태로 인간에게 주어진 그런 축복과도 같은 능력을 오, 남용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23.01.02 (월)


(..)

부지런함이라는 포장지를 장식하는 것은 카페인이 주는 ‘가짜 활력’이다. 카페인이 없이는 기운을 낼 수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삶이다. 나 역시 1일 1커피를 하고 있기에 이에 대해 강하게 일갈할 자격은 못 된다. 그러나 이 말은 할 수 있다. 커피가 단순한 기호 식품이 아니라 필수재로 자리 잡은 이상, 그 사람은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 상태가 양호한지 면밀히 검토해 봐야 한다는 것.


커피가 주는 자극을 보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과 그것이 없이는 도저히 하루를 운영할 수 없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


(..)

그는 분명 이 분야에 소질이 있다. 식신이 왕하고 편인 도식이 있긴 하지만 미약하며 오히려 적당한 자극으로 발전의 요소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천을귀인의 글자가 충을 맞고 있지만 그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니 이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오냐오냐’하며 온실 속 화초로 자라게 될 만큼의 과도한 덕은 받지 않는다는 뜻도 될 것이다.


(..)

모든 것이 도전이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게 지금의 나를 발전시키고 영감을 더해줄 것이다. 세상에 명리학자는 많다. 타로 마스터도 많다. 그중에서 나는 어떤 가치로써 두각을 나타낼 것인가? 지금의 과정은 내가 나로서 개성을, 고유한 빛을 찾아나가는 훌륭한 밑거름의 역할을 톡톡히 해줄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그것을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내가 하는 연락을 상대가 ‘얘가 나를 인맥 관리용으로 연락을 하나?’라고 생각을 하게 만들까 봐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겁한 변명이다. 사람들은 연락을 받으면 좋아하면 좋아했지 불쾌함을 느끼진 않는다. 당신이 전 애인이거나 직장 상사가 아니라면 말이다.


(..)

젊은 세대가 각박한 삶에 치여 무기력하고 꿈도 목표도 없는 것도 맞는 말이고, 그럴만한 환경을 조성해 주지 못한 기성세대의 잘못이 있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것은 관점이 무엇이고 논의의 방점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다를 뿐 모두 지금의 시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의 여러 가지 얼굴일 뿐이다. 그렇기에 어느 한 쪽에 대해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것은 소모적이다.




23.01.03 (화)


(..)

어쨌거나 잠은 매일 잔다. 그렇다면 잠들기 전 하는 자기 암시가 쌓이면 어마어마한 복리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

백회에 침 놓는 게 어떻게든 모닝 페이지의 시작과 조건화가 되긴 했나 보다. 쓰기 전에, 혹은 쓰기 시작과 동시에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한두 문장 쓰다 보면 생각이 뿅! 하고 난다. 지금도 백회에 침을 놓고 쓰고 있다.


(..)

올해는 저녁 명상 시간을 제발 좀 정해두겠니? 일단 30분 명상이 다시 내 삶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저녁 9시 30분. 이건 정말 정해라. 이때는 명상시간이다! 래야 그 시간에 다른 무언가를 하더라도 그것을 외부의 세력이 경우 없이 그 시간대를 침범하는 게 되도록 스스로의 관점이 재구조화될 수 있다.


자청의 말대로 우리는 어느 정도는 짜인 판위에서 움직이는 조건화된 동물인 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무의식적 순간이 전혀 없이 매 순간 모든 것을 100% 의식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만물이 이면성을 갖춘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

올해를 후회 없이 보내도록 하자. 현재 발 딛고 있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그저 해나가자. 영혼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둘만의 댄스를 추도록 내버려 두자. 그들의 합일을 관객석에 앉아 바라보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이거 드디어 외워졌구나. 눈에 띄다, 간격을 띄우다 말고는 다 띠다다!) 바라보자.




23.01.04 (수)


(..)

일상에서 사소한 것 하나라도 새롭게 보고, 새롭게 시도할 때 인간의 뇌는 자극을 받고 더 발달한다. 어찌 보면 인간의 간사함일 수도 있는 게, 우리는 과학에게 ‘가스 라이팅’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이 가장 최상위(누군가에겐 신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과학자다)에 위치한 학문이라고 여기며, 거기에서 나온 말은 모조리 믿는, 아니 거기에서 인정한 것만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게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다. (물론 명리학, 타로, 점성술 등은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진화론은 믿지 않는 모순 덩어리 종교인도 있…)


하지만 과학이 맞다고 인정한 것만을 사실로 간주하는 것은 상당히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삶의 자세다. 어떤 것이 아무리 봐도 사실이 분명한데 과학적 증거가 없으면 그 사람에겐 절대 사실이 아니다. 그러다 뿅! 하고 갑자기 5분 뒤에 과학계에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나오면 5분 만에 그것은 거짓에서 진실이 된다. 우습지 않나?


과학은 이미 드러난 현상을 다각도로 재점검하여 정말 그러함은 입증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도구 그 이상으로 여기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닐까? 나는 쟤랑 놀고 싶은데, 엄마가 놀지 말라고 하니 갑자기 ‘이제부터 넌 내 친구가 아니야. 우리 엄마가 그랬거든.’ 이라고 말하는 꼴이랑 뭐가 다를까.


(..)

대상이 무엇이든 맹신은 절대 금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태도를 늘 갖추고 살아야 할 것이다.


(..)

바른 자세로 천천히 적어나가라. 급할 것 없다. 기껏해야 5-10분 차이가 날 뿐이다. 그러나 그로 인한 목과 손목의 건강은 천지차이가 될 것이다. 언제나, 매사를 차분하고 천천히 대하라. 차분함 속에서 알아차림이라는 꽃이 피어난다.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작용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알려고 애쓰지는 마라. 애쓴다는 것은 조바심을 낸다는 것에 다름 아니니. 그저 고요히, 내 안팎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로부터 비롯되는 감각에 시선을 머무르도록 하라. 시선이 현상에 고요히 머무를 때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며, 그때 사물과 관찰자가,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어 그 구분의 자체가 무의미한 경지로 나아간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나는 나요, 이 안에서 피어오르는 감정과 생각은 그저 감정과 생각일 뿐이다. 내가 아니라.


(..)

세상과 교류하며 직업적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그렇게 그림으로 기록해 두니 보기가 좋은 것 같다. 좋은 레퍼런스다. 나도 나중에…라고 넘어가는 나를 본다. 이것 또한 어쩌면 자의식 혹은 검열관이 아닌가? 내 검열관도 무조건 안 될 이유만 들이밀던 풋내기 시절에서 나름 레벨 업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조건 까내리는 게 아니라 높이 올려주되 취하지는 않는 것. 이것은 거부를 하는 완곡하고도 고급스러운 스킬이다. 좋은 콘텐츠를 보고 끄덕이며 감명 깊음을 느끼고 나가서 곧장 행동하는 게 아니라 그냥 또 다른 콘텐츠로 넘어가는 것. 혹은 나중에 다시 봐야지 하고 일단 저장해두고 보는 것. 이것들이 일종의 자의식이 구사하는 고도의 거부 전략에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되었든 곧바로 행동하지 못하게,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모든 것이 자의식, 에고, 검열관, 마음속 ‘어른’이다. 붙이는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이 형태와 전략을 바꿔가며 나를 조종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제때 알아차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

연락의 빈도는 그 사람과의 친분도와 비례한다. 인스타를 늘 접속하는 사람에게 인스타는 당연한 존재가 된다. 무슨 일이 생기면 피드나 스토리를 통해 뭔가를 올리는 게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 된다. 생각을 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행동으로 옮긴다. 연락을 유지한다는 게 그런 거다. 매일 연락을 끊임없이 주고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본인 인생의 ‘

써클’ 내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써클’에는 누가 들어와 있는가? 혹시 일방적 관계는 없는지, 혹은 나의 필요에 의해서 유지하고 있는, 필요할 때만 찾으며 상대를 도구화하고 있는 관계는 없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3.01.05 (목)


(..)

제대로 푹 못 잤는데 되려 머리가 멍하지가 않다. 1차적으로 드는 생각이 ‘나 혹시 조금 덜 자도 되는 건가?’라니. 역시 대한민국의 의지의 국민다운 생각이다.


(..)

호흡과 자세를 가다듬고 차분히 지금 떠오르는 생각들을 내려 적는다. 마치 졸졸졸 흐르는 시냇가에 조심스레 발을 담그듯, 아니 발보다는 그 물의 일부를 담는 항아리 단지를 조심스레 담그듯. 물이 흐르다 일부가 단지 속으로 흘러 들어가듯 지금 내가 손에 (최대한) 가볍게 쥔(쥐려고 노력 중인) 이 만년필의 펜촉 끝으로 생각의 시냇가에서 건져 올린 생각의 파편들을 천천히 옮겨 적고 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이 사념의 시냇가(思溪라고 이름 붙여야 하려나)는 결코 마를 일이 없다. 해탈한 자라면 모를까. 그러나 내가 경험적으로 해탈의 경지에 올라보지 않았기에 그 부분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 것이 맞겠다.


(..)

글씨를 천천히 쓰려고, 힘을 빼려고 계속 의식을 하니 나도 모르게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한편으론 시간을 잊은 것이기도 하다. 대충이라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동시에 두려움과 막연함이 작지만 감지가 된다.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워지는 삶을 사는 것엔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구나.


(..)

대중문화에 대해서 그런 생각도 든다. 문화화 시키고자 하는 내용을 요즘의 모습과 함께 교묘히 섞어서 만들어 낸 것이라면? 일부의 모습을 마치 사회 전반에 걸쳐 그런 것처럼 사람들이 여기게끔 만들고자 함이라면? 


(..)

내 손목과 엄지 뿌리의 통증은 오래 쓰는, 아니 평생 쓰는 모닝 페이지가 습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자세를 교정할 것을 내게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초염이나 목, 허리 디스크 없이 오래오래 안전하게 쓰려면 지루하고 답답해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관문인 셈이다.


(..)

삶이 내게 보낸 ‘교정’이라는 화두는 내 안의 금(金) 기를 기르라는 뜻이기도 하다. 계속 스스로를 점검하고 일정한 규칙과 틀 안에 적절히 가두는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이 내게 금기를 길러줄 것이다. 종이는 목이고 만년필은 금이다. 그리고 내 사념과 그것을 실체화하는 매개체인 잉크는 수다. 금에서 출발하여 수를 거쳐 목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상생의 이치가 여기 모닝 페이지에도 담겨있는 것이다.




23.01.06 (금)


(..)

왜 그 사장이라는 사람에게서 돈을 밝히는 수전노의 향이 날까. 순수하게 사람을 위하는 따스한 마음과 관점이 아니라 매사에 실리를 계산하고 손해는 어떻게든 보지 않으려는 게 의사결정의 기준들 사이에서 최상위에 놓여 있을 것만 같다. 


아직 사람 보는 눈이 완전히 다 갖춰지진 않았기에(그 완전함은 당연히 개념적인 것이라 영원한 지향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 생각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함부로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하다. 생각이 드는 것과 단정을 짓는다는 것은 별개의 행위다. 대상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이나 판단 등이 일어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후속 처리하느냐는 사실 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모두 단번에 이뤄지는 하나의 과정, 하나의 현상으로 보일지 몰라도, 감정이나 생각의 태동이 먼저 있고 그것을 흘려보내느냐 발산하고 드러내느냐라는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전자든 후자든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점은 특정한 감정이나 생각이 이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며 억누르려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안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든 그것은 그 자체로 내버려 두라. 중요한 것은 그 작은 씨앗에 우리 자신이 어떤 반응을 하기로 선택하느냐에 달렸으니.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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