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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an 19. 2023

시대의 열광이 곧 옳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권위와 영향력을 갖춘 한 남자가 앞에 나서서 일장 연설을 한다.

청중들은 연사가 내뱉는 공기의 파열음 하나하나에 가슴이 저릿해지고, 문장마다 실린 장엄함에 전율하며 이내 눈물을 흘린다. 자신들의 앞에 서있는 그 남자가 삶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해 줄 것만 같다. 자신이 걷는 그 길이 올바른 곳으로 향하는 길인 것만 같다. 연설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온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일심동체가 되어 목표를 향해 전진할 것이다.



위와 같은 짧은 묘사를 보고서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성공한 연사의 강연을 들으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 자신의 밝은 앞날에 대한 희망을 그리는 청년들의 모습, 정의를 부르짖기 위해 광장에 모여 불의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모습, 혹자는 종교 행사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구체적인 내용은 저마다 상이하지만 이들을 꿰뚫는 공통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욕망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본능의 여러 얼굴에 다름 아니다.



글의 초두에서 묘사했던 장면은 도마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다룬 뮤지컬 영화 <영웅>의 한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이토 히로부미 (김승락 분)는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상과의 논의를 앞두고 수많은 일본 군인들 앞에 서서 일장 연설을 한다. 동북아의 번영과 평화를 이룩하겠노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군인들은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영화 <영웅> 중 이토 히로부미(김승락 분)의 모습



개인적으로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일본군이 눈물을 흘리다니. 일본군은, 적어도 '항일'이 모티프가 된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 등의 작품에서의 일본군은 그저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악인惡人'이라고만 생각했다. 더군다나 영화의 초반부에 안중근(정성화 분)이 살려준 일본군 포로(김중희 분)가 나중에 뒤통수를 치는 것도 모자라서 나중엔 순사로 등장하여 지독한 악연(드라마 <야인시대>의 미와 경이 떠오른다)으로 안중근을 집요하게 쫓아다닌 것을 생각하니 더더욱 생각회로가 그렇게 굳어지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권선징악, 선과 악이라는 이중적 구도라는 프레임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던 나머지 그들도 결국 한 시대를 살았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과연 악인이었을까?



나는 단순히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의 파편적인 지식만 가지고서 그들을 악인으로 규정했다.

그들이 어떤 힘으로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했는지, 그것이 가능했던 시대적 배경은 어떤 것이 있었을지 등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고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독일 전범 아이히만에 대한 예루살렘 재판에서 수많은 유대인 학살에 앞장선 악의 장본인의 예상 밖의 지극히 평범한 모습에 놀란다. 이후 그는 모든 사람이 당연하고 평범하게 여기는 행동이나 생각이 악이 될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혐오나 증오와 같은 악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아이히만의 담담한 증언에서 우리는 평범함이라는 가면 속에 가려진 악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영화 한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 당시의 일본군도 아이히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까라면 까야지.', '안 되면 되게 하라.' 등의 관용적 표현들은 모두 군대 문화에서 유래된 표현들이다. 그만큼 명령에 대한 복종이 중요시되는 집단이 군대인 것이다. 특히나 과거 전시 때는 더더욱.



게다가 그 시절 일본군은 당대의 어떤 국가보다도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이 하늘을 찔렀다. 자신의 희생으로 국가가 위대해지는 것을 넘어서 동북아의 평화를 이룩한다고 하니 그들에겐 얼마나 큰 영광이요, 감동이었겠는가. 자신이 몸 바쳐 헌신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가슴 벅찬 일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




사유하지 않는 것은 곧 악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순 없다. 그것은 후대의 관점으로 평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가치가 내면의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의 평범성이 시사하는 바는 그렇기에 후대에 평가되는 악이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것이니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평범함의 탈을 쓴 악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당연시하게 여기는 행동과 규범이라고 할지라도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 선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도 정말 옳은 것인지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어떤 일이 다분히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해서 그 일이 어디서나 반드시 일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욕망은 얼굴을 달리할 뿐, 늘 우리 인간과 함께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한 존재가 욕망이라는 존재다.


당시 눈물을 흘리던 일본인들의 모습에서 지금을 사는 우리네의 평범한 얼굴들이 오버랩된다고 하면 지나친 억지일까? 우리는 그 당시를 살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그 일본군들이 착용하고 있던 프레임이라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을 차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 우리 또한 어떤 측면에서는 결코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지금의 관점에서 그때를 다시 보니 비상식적으로 보이지만 과연 그 시대의 한복판에 서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욕망에 눈이 멀면, 그리고 다수가 따르는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따를 때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집단적 광기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미쳐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이비 종교같이 극단적인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우리의 곁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바로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에 대한 집단적인 추앙이 거기에 해당될 수 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인드. 돈이 나의 삶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 그것을 얻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희생은 일단 모르겠다는 마인드.



그 당시에는 어떻게든 식민지를 누가 먼저, 누가 더 많이 확보하느냐로 경쟁을 붙었던 제국주의 선봉국들이 있었다면 지금은 일부 선진국들이 모여서 멋대로 '세계'를 대표한다며 지구촌의 대표를 자처하고 각종 회동을 주최한다. 그들이 논의하는 탁상 위에 그 자리에 끼지 못한 자들에 대한 고려가 존재하기는 할까? 다국적 기업들을 앞세운 경제 선진국들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현대판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다.



더욱이 지금은 '경제적 자유' 혹은 '파이어족'이 화두다. 지긋지긋한 회사 생활에서 탈출하기 위해 수익을 극대화하고 그를 통해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하겠다는 욕망의 발현이다. 그쪽 업계(?) 사람들의 대표적인 참고서 중 하나인 <4시간만 일한다>에는 자유를 확보하는 구체적인 방법 중 하나로 업무의 아웃소싱을 예로 든다. 자신에게 노동 대비 큰 효과를 내지 않는 단순 업무들은 제3국에 저렴한 비용으로 외주화를 맡기라는 방식이다. 자신은 자유를 얻는 동안 누군가는 그 일을 대신해 주느라 자유를 잃는다. 혹자는 그것이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과거 일본이 식민 통치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 중 하나가 조선의 근대화 아니던가.



세계 무대로까지 멀리 눈을 돌릴 필요도 없다. 한국이라는 좁은 나라 안에서도 중용의 미덕은 사라진지 오래다. 대기업들이 신생 소기업들의 시장에 멋대로 침투하고, 골목 상권에도 속속들이 진출하여 개개인의 설자리를 밀어내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자유 시장의 냉험함이라는 그럴듯한 논리를 앞세워 가면서.



그것이 합법이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사고방식이 아니다. 전체주의가 횡행하던 시절에 식민통치 역시 국제법상으로 문제가 없었으니 당시로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인가? 그 논리라면 독립운동은 평화에 대한 외침이 아니라 우리 집 앞마당만큼은 안 된다는 지역이기주의에 다름 아닐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



갈수록 개인주의가 확대되고 개개인의 삶이 팍팍해지면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내 코가 석자라는 마인드가 만연해진 것이 요즘 사회의 분위기다. 당국에서 내놓는 정책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여겨지고,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는 안정적인 미래를 기대할 수가 없다. 생존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보니 도덕이니 양심이니 올바른 삶이니 하는 가치는 이제 사치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과거에는 가축이 귀해서 경사 날에나 동물을 잡았지만 지금은 도축이라는 존재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고기를 제품처럼 받아먹는다. 고마운 가축은 사라지고 판매되는 제품으로서의 고기만 남는다. 생명을 자원처럼 길러 공장에서 찍어내듯 도축이 이뤄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끼어 명을 달리하면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를 읊조리다 떠난 사람 혹은 소스 배합기에 끼어 명을 달리한 노동자의 사고, 그리고 그 장례식에 빵을 보낸 한 기업체의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효율적인 처사는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수가 가는 길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시류라는 커다란 급류에 떠밀리기보다는 깨어있는 시선으로, 자유의지를 가지고서 급류가 흘러가는 방향을 살펴볼 줄 아는 혜안을 갖춰야 한다. 그것을 돕는 하나의 기준이 바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 것 아닐까. '후손들에게 떳떳한가? 미래의 자식들에게 남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었다고 자부하는가?' 우리는 후대에 물려줄만한 위대한 유산을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말이다.



현시대가 열광하며 흘린 감동의 눈물이 부끄러움으로 남지 않기를,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가치가 후대에도 자랑스럽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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