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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r 13. 2023

癸卯년 乙卯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3월 1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2.20 (월)


(..)

꿈속의 내가 취한 태도는 나와는 다른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깔보지도 우러러보지도 않았다는 것. 오히려 내게는 없는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내 삶에 적용할 만한 것은 없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 있었다. 


현재 내 생황이 일정을 통제하기보다는 일정에 통제를 받고 있어서 꿈속의 내가 맹렬하게 전진하기 바빴던 것일까?


(..)

영국 시인의 그 시 한 편은 놓치고 있던 순간의 소중함을 상기시켜줬다. 애석하게도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것이 남긴 인상만큼은 지금도 역력하다. 현재에 온전히 머무르지 못하는 화자의 상태를 보며 답답함과 안타까움은 고조되다가 끝내 해소되지 못한 채 시는 마무리되어버린다.


타인에 대한 질책과 비평 그리고 객관화는 쉽게 하는 인간의 특성상 그렇게 남일 보듯 단숨에 고조되는 감정이 제 몸집을 키워나갈 때 어느 한구석에서는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그 감정의 정체는 시가 끝나며 미처 해소되지 못한 답답함과 함께 그 정체를 드러낸다.


바로 그것이 시를 읽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 알 수 없던 그 찝찝함은 결국 인간과 너무 똑같은 안드로이드를 보며 불쾌함을 느끼듯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그 시에게서 느껴졌던 것이다. 오늘은 그 시를 필사해 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어보고자 한다.



봄이 왔다. 그러나 나는 여름을 원했다.

따뜻한 날들 그리고 화려한 외출.


여름이 왔다. 그러나 나는 가을을 원했다.

화려한 단풍 그리고 신선한 공기.


가을이 왔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겨울이었다.

아름다운 눈 그리고 성탄의 기쁨.


겨울이 왔다. 그러나 나는 봄을 원했다.

따뜻함 그리고 그 자연의 꽃.


내가 아이였을 때 나는 어른을 원했다.

자유 그리고 존경.


내 나이 스물이었을 때 나는 서른을 원했다.

성숙 그리고 세련미.


내가 중년이었을 때 나는 내 나이 스물을 원했다.

젊음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


이제 은퇴했다. 그러나 내가 원한 건 중년의 나이.

마음의 평정 그리고 무엇이든 거리낌 없는..


이제 나의 삶이 끝났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단 한 번도 갖지 못했다.


-제이슨 레만




23.02.22 (수)


(..)

시간은 지나도 결과물에 진전이 보이질 않네. 일관성이 없고 예정에 없이 계속 튀어나오는 피드백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니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대는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나의 보고서 작업이라네. 이제는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보단 오기가 생기네. 나는 창작을 좋아하는 것이지 대필을 좋아하진 않는다네. 이 기회에 그것을 다시금 깨닫네.


(..)

합곡혈에 놓는 침은 찌릿하고 아픈 느낌이 피부 얕은 곳에서부터 느껴져서 힘들다.

아,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환경을 또 하나 알았다. 단기간에 확 에너지를 쏟아부어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하는 환경. 내가 전혀 컨트롤할 수 없이 일정에 쫓기는 일들. 


나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고민하며 결과를 내놓고 싶은데. 뭐 결과가 어찌 되건 간에 과정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말이다. 그러나 그 어떤 회사라는 조직도 그것의 규모나 성격을 떠나서, 개인을 기다려주지는 않는다. 개인은 그곳에서 실험을 하러 취직이 된 것이 아니다. 주어진 기간 내에 특정한 결과물을 산출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게 단순히 기획이나 기타 재량을 부릴 것 없는 단순 작업이라면(즉, 다가올 미래엔 구태여 인간이 직접 해야 할 필요조차 없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은 마감일이라는 틀에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욱여넣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조직 내에서 인간의 존재는 부품에 불과하고 경영자들은 그 부품을 자신의 피와 살처럼 여기는 게 아니라 쓰다 갈아 치우는 한 철 입는 옷과 같이 여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명품 옷이라고 하더라도 옷은 옷이다. 소모되고 감가상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기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까지고 존속할 수는 없다. 물론 개개인도 더 이상 그걸 원하지는 않는 추세이지만 말이다.




23.03.06 (월)


(..)

내 주변을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로 두라. 내 안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한다. 한때의 나는 그러 했었다. 채식의 대중화가 내 인생의 사명이기까지 했으니. 그래, 그리고 미니멀리즘. 채식까진 아니지만 지금은 간소하고 단순하게 사는 남로서 나를 포지셔닝했다.


내가 전하고 싶은 가치는 단순한 삶인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인가? 물론 그 둘이 언제나 일치할 필요도 없고 선을 그어 명확히 구별을 해야 하는 양립 불가능한 가치도 아니다. 어떤 인과율 같은 법칙을 발견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다만 그것이 여전히 내게 유의미한지, 나의 가슴을 동하게 하는지.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

지난 며칠간 바빴다가 컨디션을 회복하느라 시간을 다 쓰다 보니 피아노와 기타 그 밖의 내 삶의 일상 루틴들에 소홀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으니 다시 삶의 기둥들을 차곡차곡 다져나가야지.


(..)

오랜만에 아침에 일어나 이렇게 의식의 흐름을 적고 있자니 처음엔 익숙해져 버린 요 근래의 '알람 없이 일어나기 패턴(지금도 내가 지향하는 삶이다. 일찍 일어나면서 알람 없이 일어나려면 취침시간을 더 당겨야겠지만)'을 깨려고 하니 처음엔 나도 모르게 기계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아 귀찮아)이 나왔으나,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스스로의 감정을 조율했다. 주어진 하루에 대한, 그리고 더 나아진 컨디션에 대한 감사로 말이다.


주어진 상황이 변하지 않을 때, 관점마저 변하지 않는다면 감정도 당연히 변하지 않는다. 감정은 태도의 부산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일지라도 태도와 관점을 달리하면 감정은 충분히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굉장히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상황에 대한 조망을 할 기회조차 없이 곧바로 감정에 사로잡혀 버릴 때가 그렇다. 나는 그것을 '감정의 덫' 혹은 '감정의 늪'이라 부른다. 여기에 일단 빠져버리면 즉각적인 조율이 어렵다.


다른 관점의 선택의 가능성일랑 상상조차 못한 채 오로지 단 하나의 가능성만이 존재 (즉, 내 감정이 옳다) 함을 증명하기 위한 온갖 생쇼와 몸부림이 펼쳐진다. 조금만, 단 하루라도 지나면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유치찬란한 생떼에 불과한지를 깨닫게 될 텐데 말이다.


이를 예방하려면 자신의 발작 지점을 이해하고 그것이 자극받기 시작하여 감정의 덫에 사로잡히기 직전까지 그 찰나에 어떤 느낌이 드는지 평소에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그때가 유일한 탈출 타이밍이다.




23.03.07 (화)


(..)

간밤에 꾼 꿈은 마치 내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간듯했다. 그땐 내 사주에 무엇이 그토록 날 인기 있게 만들었을까. 원국에는 늘 재성이 많다. 그것을 상대적으로 쳐내어 적당히 써먹을 수 있게 해주는 세력이 있었거나 부드럽게 원국의 글자들 사이를 매개하는 통관 용신이 있거나 했을 것이다. 내 경우는 후자일 확률이 더 높아 보이는 것이 원국 자체가 이미 양신성상격에 가까울 만큼 두 세력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

30대가 넘어가면서 다들 살이 쪄서 아재 소리가 절로 나온다. 결혼이 요새 갑자기 내 삶의 키워드가 되려는지 눈에 그 단어가 자주 밟히고 자주 들린다. 아무래도 주변의 영향과 시대의 분위기가 한몫하는 듯하다. 요즘 국가 출산율이 낮다고 대한민국 몰락 위기라고 난리다. 그러게 있을 때 잘 좀 하지 그랬어. 


한반도는 무슨 기운이 서려있기에 한때는 중국 본토를 넘어 세계무대까지 넘볼 수 있을 정도로 대제국을 이루기도 하고, 식민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전쟁을 치르고 분단이 됐고, 게다가 한강의 기적과 IMF 외환위기, 민주화 운동 등 격동의 역사를 거치게 되었나. 혼란의 근현대사를 거치지 않은 현대 국가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유독 한반도는 그 좁은 땅덩이에 비해 다사다난함이 큰 것 같다.


(..)

인구 절벽을 위시한 대한민국 위기설이 지적하는 현상은 크게 보면 우주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그러니 예의주시하되 너무 호들갑 부리지는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리라.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대의를 위한 저마다의 헌신이 아닐까. 모두가 저마다의 몫을 조금씩 대의를 위해 내어놓는 것이 미덕이고 국가적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것이 돈이든, 시간적 자원이든 정신적 자원이든 간에 내가 속한 큰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출산율이든 무엇이든 직면해야 할 과제들을 하나씩 격파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내 코가 석자다는 말이 시대정신이 될 때 공동체의 붕괴는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지 코는 원래 석자다. 너무 풍요로워서 남을 돕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

망조가 낀 대한민국을 탈출해 이민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그것은 과거 식민 지배 같은 국가 존속의 위기 속에서 목숨 바쳐 나라를 구했던 선조들을 욕보이게 하는 마인드 셋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분명 역사를 배우면서 친일파를 욕했을 것이고, 지금도 떵떵거리고 있는 친일세력의 후손들을 보며 정의란 존재하는가 하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피하는 게, 생존하는 것만이 일생일대의 유일한 목표이기에 공동체의 붕괴란 내 알 바가 아니란 식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가진 자들이 과연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친일을 하지 않았으리라 자신할 수 있을까?


(..)

그렇다고 기울어가는 국가 정세를 손놓고 바라보기만 하며 무조건 버텨야 하는 것 역시 옳은 처사는 아니다. 늘 관심을 갖고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게 말이 쉽지 소통의 의사를 내비치지 않는 불통의 정부를 두고 변화를 이야기하기란 쇠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다. 


결국 이야기의 결론은 언제나 '위'를 향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작금과 같은 현상의 원인은 결고 그 시대의 중심에 선 젊은이들에게 있지 않다. 젊은이들은 언제나 시대의 '반(反)'의 역할을 맡는다. 독재라는 썩은 윗물을 민주화 운동이라는 '반'으로써 새로운 합을 이끌어 냈듯이 국가의 위기설까지 제기될 만큼 낮아지는 출산율과 결혼율은 시대착오적 발상을 지닌 윗세대들이 아직도 잇속을 챙기며 '해처먹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인 '반'이다.




23.03.09 (목)


(..)

코털이 삐죽 튀어나온 게 느껴진다. 자연의 선물을 유지하는 것과 문화적 미적 기준이 상충할 때 인간은 어리석게도 후자의 기준에 자신을 내맡긴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존재방식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 어리석은 게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인지도 모른다.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 그리고 번식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만큼은 번식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전담 과목으로 변질되어버렸으니 남은 건 오로지 생존, 즉 먹고사는 데 이렇다 할 심각한 위협이나 애로사항이 없다면 인간은 자연적 존재로 머무는 것에는 더 이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보다는 '사회적 생존'이 더욱 관심의 도마 위에 오른다.


누구나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소외받지 않으려고, 인정받으려고 애쓰며 살아간다. 원시사회에서는 그것이 생존과 직결됐기 때문이라면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이 존재론적 자아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것의 여부로 생사를 스스로 결정짓기도 한다는 점도 고려한다면 생존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고로 본인이 감당 가능하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소진시키지 않는 선에서 스스로를 치장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자연적 존재로서의 자신과 얼마나 상충되는지도 때에 따라 생각을 해본다면 금상첨화겠다. 


코털 삐져나온 거 하나로 여기까지 오다니. 코털 정리하기 귀찮단 말을 이렇게 길게 할 일인가.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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