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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y 01. 2023

癸卯년 丙辰월 네 번째 기록

주간단남 4월 4주 차

癸卯년 丙辰월 두 번째 기록癸卯년 丙辰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4.25 (화) 


(..)

인간의 욕구는 자연스럽고 불가피하다. 그것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보다 건전하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해소시킬 방법은 없나 모색해 보아야 한다.




23.04.26 (수)


(..)

알아차린다는 것. 하기엔 쉬울지 몰라도 일상 속에서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벼룩 실험 얘기가 생각난다. 인간은 생각하는 것만큼만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다.

(..)

이건 비단 시도의 문제가 아니라 선언의 문제다. 나로서 산다는 것. 그게 자유의 첫 출발점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비아냥대기도 한다. 자기는 뭐 좋아서 출퇴근 지옥철에 매일 몸을 욱여넣겠느냐며. 

그러나 그런 숨 막히는 삶의 존재가 있기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자유인도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 불만족할수록 자유에 대한 갈망 역시 커지고 그 결과 그런 삶을 좇는 자들이 주변에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유인의 삶이 지닌 예측 불가능함과 불안정성은 역으로 틀에 박혀있지만 안정적인 삶에의 열망을 낳는다. 양극은 서로 만나는 법. 그 사이에 있는 연속적인 스펙트럼 위에서 양극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존재한다.

(..)

세상의 존재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내 삶의 화두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어떻게 우리네의 삶에 적용하느냐가 내 직업적 소명이 되겠다.

(..)

하는 것이 여러 개여서 불안한가? 이래도 되나 싶고? 괜찮다. 내가 여러 개를 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목표로 하는 바가 무엇이냐가 더 중요하다.

(..)

지루할 정도로 기초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자. 내겐 익숙함을 넘어 도통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 최소 지점은 툭 하고 치면 마치 주크박스처럼 관련 내용을 술술 읊는 정도가 되는 것. 그래야 막힘이 없다. 막힘이 없어야 더 큰 것, 더 농축된 것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

나의 등용문은 갑진년에 찾아올 것이다. 그걸 믿고 지금은 흔들림 없이 우직하게 나만의 플랜에 집중하자

(..)

소위 '중립 기어'와 중용은 다르다. 중립 기어는 판단을 유보하고 대세를 따르려는 비겁한 마인드인 반면 중용은 양쪽 모두를 아우른다. 동시에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다. 무엇이든 양극이 만나면 척력과 인력이 두루 작용한다. 중용은 그 힘이 작용하는 파장 위에서 발생한다. 

중립 기어는 무지함이요, 중용은 현명함이다. 중용의 결과로서 중립이 나타날 땐 현명함이겠지만, 중립을 위한 중립은 무지와 어리석음 그리고 이기심에 다름 아니다.

(..)

사주/타로와 진로 적성을 결합해 사람들이 자신에게 내려진 삶의 소명을 깨닫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고 뭔가 뜨거운 기운이 심장을 가득 감싸는 것이 느껴진다. 이건 에고의 반응이 아니다. 내 영혼이 반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영혼이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다. 나는 아무래도 이쪽으로 걸어나가는 게 맞는 사람이다.

내 사주를 자주 쳐다보자. 그러다 보면 답이 보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통찰에는 반드시 삶에로의 적용이라는 구체적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23.04.28 (금)


(..)

약자니까 무조건 약자의 편을 들어줘야 한다는 식의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당연하거나 일반적이라고 여겨지는 다수의 논리 위주로 돌아가는 냉엄한 세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고 무관심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관점의 확장. 이는 달리 표현하면 일종의 문제점을 찾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다. 

먹거리를 예로 들면 처음엔 단순히 채식을 하며 동물성 식재료의 유무에만 골몰했다면 점차적으로 식물성 재료라고 하더라도 Non-GMO, 유기농, 로컬 푸드 등의 보다 지속 가능한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늘 고민하게 되는 식이다.

이는 몸과 마음의 건강, 나아가서 정의롭고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서, 후손들에게까지 물려줄 수 있는 환경이 존속될 수 있는 그런 지속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과 감수성을 갖추는 길이다.



23.04.29 (토)


(..)

현상이 먼저 있고 그것을 사주라는 도구로 비춰봤을 때에도 그럴듯하게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지 사주에서 그렇다고 하니 어떻게든 끼워 맞추는 것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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