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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pr 24. 2023

癸卯년 丙辰월 세 번째 기록

주간단남 4월 3주 차

癸卯년 丙辰월 두 번째 기록癸卯년 丙辰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4.18 (화) 


(..)

세상은 내게 전할 메시지가 있는 일들만을 일으킨다. 요즘 이런 잦은 늦은 취침의 습관은 시나브로로 생겨나 어느새 내 균형 잡힌 일상의 숨통을 조여온다.


(..)

이판적 영역의 공부의 최종 지향점은 자기 수양에 있다. 누군가는 이런 말에 대해 방어기제를 일으키며 사판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지성으로 만사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반박하겠지만 정작 그것만으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이판적 영역에 본인이 종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가당착의 모순을 범하게 되는 꼴이다.


(..)

어떤 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무신론자 개인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겠지만 다른 이들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신의 존재까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

고로, 개인의 정신과 영혼을 좀먹는 다양한 것들로부터 중심을 잃지 않고 균형 잡힌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굳은 마음이 이판의 도구를 활용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도구를 지나치게 우상화해서도 안되겠지만 그런 도구를 한낱 수단에 불과한 별것 아닌 존재로 보는 태도 역시도 문제가 있다.


(..)

그때의 난 당돌했고 이상주의자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상주의자인 것엔 변화가 없지만 그래도 독기가 다소 빠진 순한 맛 인간이 되었다.


(..)

그들을 통해 배운 게 있다면 사업에서의 진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동업자가 누구인지도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에 대한 것이다. 사업은 여럿이서 하는 것이지만 구성원 모두가 얼마나 일심동체가 되어 움직이는지가 관건이다. 그러려면 자신과 같은 이상과 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 그것이 롱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정성을 갖추고 전심을 다해야 한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처럼 그래야 할 것 같으니 억지로 선의를 쥐어 짜내는 것이 진정성이 아니다. 상대를 돈으로만, 수단으로만 보며 어떻게든 뽕을 뽑아먹으려는 심산이 아닌,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상대를 돕고, 개선하고, 행복하게 해주고자 하는 의지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아 상대에게 가닿아야 한다.


나는 과감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이 결여된 자들, 상대를 수단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존재로 보는 자들은 사업가가 아니라 장사치, 아니 사기꾼이나 협잡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들에게‘꾼’으로서의 재능은 있을지 몰라도 진심과 철학을 갖춘 사업가로서의 자질은 불충분하다.


(..)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그리고 사람 대 사람이라는 관계성을 통해서든 책과 같은 매개물을 통해서든 나를 더 성장시킨 분들이, 존재들이 많다. 마음만 잘 먹는다면 세상 만물이 부처라는 말씀처럼 배움은 어디에서든 가능하다. 내게 배움을 주고 성장과 성숙을 향해 진일보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이 누구든, 무엇이든 ‘스승’이 된다. 조강지처처럼 단 한 명의 스승만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승은 다다익선이다. 그래야 오만해지지 않고 편협해지지도 않는다. 


언제나 자신이 올려다 본 하늘이 하늘의 본질 그 자체라고 생각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그것은 우물 속에서 바라본 하늘이다. 이 사실에는 변화가 없다. 저마다 우물의 깊이나 모양, 너비와 폭, 지름 등이 천차만별일 뿐 우리는 모두 우물 안 개구리의 처지와 같다. 그것을 아는 자만이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런 생각의 전환이 출발점이다.




23.04.19 (수)


(..)

요 근래 들어서 가장 쾌청한 아침이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콧노래가 나온다. 맑은 하늘에 대한 이런 반응은 학습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재된 본능일까? 어느 쪽이든 좋다. 오늘 하루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온전히 만끽하자.


(..)

이동은 내게 여전히 귀찮음을 유발한다. 변화를 싫어하는 인간 본능이라는 장막 뒤에 나의 개인적 성향을 숨겨본다. 그래도 나는 바삐 돌아다녀야 일이 더 잘 풀릴 팔자다. 그러는 게 달갑지도, 쉽지도 않겠지만 그만한 가치로 내게 되돌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편리함에 취하는 것은 기본 소양을 다 갖춘 뒤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전통을 고수할 것이냐, 현대적인 기술로 선보일 것이냐 하는 것은 내가 어떤 브랜드 정체성을 가져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제대로 정할 수 있는 문제다. 사주의 현대화란 다른 말로 사주의 서구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양의 것을 서구화하는 과정에서 동양의 가치가 현격히 떨어지기도 한다. 전통한복이 부담스러우니 개량화, 현대화하는 시도는 좋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첫 출발점인 전통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거나 혹은 현대화의 정도가 지나쳐 본질 자체가 흐려지거나 사라지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

어떤 한 유튜버의 제네럴 리딩 영상이 피드에 떴는데 왜 나는 문득 ‘이 길로 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까?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원조에 대한 표절에 가까운 모방들이 난무하는 그 모습에 실망을 해서였을까?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던져 봤어도 ‘이 길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든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어색하다. 뭐 지금껏 관심사가 바뀌는 것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일도 아니니 그 자체로 놀랄 일은 아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또 하나는 내가 천직이라는 정의를 지나치게 고매하고 숭고한 수준의 무엇으로 너무 올려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365일 내내 좋기만 하고 360도 어느 각도로 보나 사랑스럽기만 한 그런 직업이 어디 있겠는가.


어쩌면 답은 무엇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 무엇을 하는 주체에 대한 사랑에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무엇을 하는지는 둘째 문제다. 내가 무엇을 하든 스스로를 멋지게 바라봐 주고 사랑해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이 강력해야 실현될 수 있다. ‘뭐 때 되면 알아서 성공하겠지.’하는 안일한 마인드로는 성공의 문턱에도 갈 수가 없다. 그게 물질적 성공이든 영적인 성공이든 간에. 자신이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 하고자 하는 의지, 갖고자 하는 의지, 그런 의지가 머릿속 생각을 실체 있는 결과로 빚어낸다.


(..)

종이를 아끼겠다고(마치 그게 본 목적인 것처럼) 세 번째 장으로 안 넘어가고 꽉 채운 두 쪽에서 마무리를 짓고자 했으나 그건 엄연히 다른 것이다. 경계는 A와 B를 가르는 지점이다. 그것을 넘고 안 넘고는 경계 면에서 있을 땐 별 차이가 없다고 느낄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른 것이다. 경계가 바뀌어야 비로소 달라지는 것이 있다. 단 맛 일색인 것이 소금을 한 톨이라도 넣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엄연히 다른 존재가 되듯 개념적 경계를 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23.04.20 (목)


(..)

그것이 좋은 습관인지에 대한 객관적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의도치 않은 늦은 취침을 예방하려거든 밤 10시가 넘어서.. 아니 최소한 잠들기 30분에서 1시간 전에는 스마트폰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스스로가 알아서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어리석은 행위다. 1분이 3분이 되고 10분이 30분이 되는 마법을 경험할 것이다.


(..)

늘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하루에도 수차례 되뇌자. 주관을 갖춘 것과 오만함의 차이는 자신에 대한 확신의 유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존중의 유무에 있다. 나의 세계가 견고한 만큼 다른 누군가의 세계 역시 견고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견고함이 꼭 옳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것을 기억하자.





23.04.21 (금)


(..)

어제가 되어서야 ‘아호’ 짓는 것에 대해 대략적으로 찾아봤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단 기간에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고, 그래서 역시나 언젠간 배워야 할 영역이라고도 생각했다. 이쪽으로 진로를 잡으려면 성명학 정도는 배워두면 좋을 것이다.


(..)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는 말이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어떤 사주 명리/타로 상담가가 되고 싶은가?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가? 결국 활동명에 대한 고민은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귀결되게 된다.


(..)

이 활동명이 비단 타로리더로서로만 쓰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주 상담가뿐만 아니라 나중에 작가로서 책을 낸다거나 세상에 나의 얼굴을 드러낼 때가 온다면 그때까지도 사용될 수 있는 이름이면 좋겠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나의 마음에 쏙 드는 게 우선이다. 흔들림 없이 나만의 길을 굳세게 걸어 나가는 우직한 모습이 담기는 이름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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