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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pr 17. 2023

癸卯년 丙辰월 두 번째 기록

주간단남 4월 2주 차

癸卯년 丙辰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4.10 (월)


(..)

강한 반감은 어디까지나 개인이 그 반감과 관련된 입장에 속해있기 때문에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일 뿐, 어떤 정의 같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선 보다 큰 가치를 위하기 때문에 드는 감정이 아니다. 대부분의 소위 ‘정의 수호자’들의 이면에는 그것으로 인해 높아질 자신의 가치, 자신의 중요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특정 가치를 지지하는 것뿐이다.


그들 중 진정으로 단지 어떤 것이 자신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옳다고 믿기 때문에 좇는 자를 찾아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은 그게 자신에게 물질적 이득이든, 존재론적 이득이든 모종의 이득을 가져다줄 거라 믿기에 정의라고 포장한 이기심을 강하게 주창한다.


그래서 시야가 좁아진 상태에 머무르기 쉽다. 자신에게 별 소득이 없거나 혹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견해는 무조건적으로 반박하고 심지어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까지 여긴다. 상대가 틀려야, 사라져야 본인들이 추구하는 바의 가치가 더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식에 ‘조화’는 없다. 그들 기준에서의 ‘선악’만이 존재할 뿐.


언제나 유념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면 만물은 음양의 조화를 따른다는 것이다. 빛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하듯 상반된 것들은 그것이 상반된 형태를 갖춘 이유가 다 있다. 하나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짝을 이루고 있던 것 역시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23.04.11 (화)


(..)

어제 면접도 그렇고 유료 상담을 하면서도 그렇고 어딘가 찜찜한 이 기분은 내가 모든 것에 통달하여 만물을 내려다보는 차원의 상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완벽주의. 그러나 타로든 명리학이든 이판적 영역이 상담의 형태를 띨 때 중요한 것은 진리에 도통했느냐의 정도보다도 상담에 임하는 태도가 아닐까.


완벽한 실력으로 상대의 운명을 손에 쥐고 흔들고자 하는 자와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내담자의 평안과 삶의 주체성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자는 세상에 빚어내는 선한 에너지의 양부터가 다를 것이다.


문득 인스타툰 작가 이솜 님이 떠오른다. 그의 따스한 시선과 마음을 닮고 싶다. 세상의 고칠 점을 꼬집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따스한 이면도 충분히 존재함에 더 주목하고 싶다. 결국 사람을 숨 쉬게 하고 미소 짓게 하며 나아가게 하는 것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희망, 조금은 구식이고 촌스러울지라도 나는 그런 본질적인 가치에 해답이 있다고 믿는다. 차갑고 세련된 사람보다 촌스러워도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고 싶다. 그런 사람들이 어울려 살 수 있는 세상을 나는 꿈꾼다.




23.04.12 (수)


(..)

객관적 문제는 없다. 각자만의 세상에서나 문제인 주관적 이슈들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 자체를 멈추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색안경을 완전히 벗어버릴 순 없는, 주관적 필터로 걸러진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문제로 인식한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 당사자와 관계자들에게 전할 것인가이다. 문제가 갈등이 되는 순간은 내가 사는 세상과 상대가 사는 세상이 같을 것이라고 상정할 때이다. 나에게 문제인 것이 상대에게도 ‘당연히’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는 갈등으로 번지게 된다.


우리는 각자만의 주관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진 ‘원형 돔’ 안에서 살아간다. 상대를 우리의 ‘문제 상황’에 초대하기 위해서는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감정 서술이다. 어떤 객관적 상황이 나의 주관적 세계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어떻게 문제로 인식이 되었고, 그 결과 내 세상에 어떠한 균열을 남겼는지.  그 영향, 여파라는 것이 다름 아닌 감정이다. 그것이 타인을 자신의 세계로 초대하는 열쇠이며 초대장이다.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상황에 근접하게 관점의 동기화를 가능케 하는 초석을 다지고 나서야 원활한 대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상대에게 악의나 고의가 있지 않고서야 그는 자신이 우리의 세계에 어떠한 균열을 남겼는지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상황 공유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작 나에게 당연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의 행동을 지적하고 비난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행동이다. 상대가 성인군자가 아니라면 십중팔구 방어기제라는 방패부터 급하게 찾아들 것이다.




23.04.13 (목)


(..)

같이 NVC를 배우고 실천해 본다면 한결 더 나은 서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쪽만 배우면 그렇지 않은 쪽에서는 자칫 상대가 자신을 가르치려 하고 교정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게 되기 십상이니 같이 배우는 게 좋다.


(..)

나중에는 이론과 임상을 겸비하여 커플들을 위한 워크숍을 같이 진행해 봐도 좋겠다. 거기에 타로/명리 상담을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는 환상의 조화가 될 테다. 이미 같이 커플 에세이를 낸 것과, 갈수록 더 길어질 일만 남은 연애 기간은 그 나름대로의 스펙이 된다. 조화로운 관계의 모습만 유지한다면 말이다.


(..)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 스스로가 추구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인해 변해야 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스스로가 설계한 방식으로 인해 걸출한(?) 결과물로 거듭난다면 하나둘씩 주변으로 그 기세를 확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


(..)

옆집 남자가 오늘도 문을 쾅 닫으며 출근한다.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각에 쾅쾅대는 통에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에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개인적으론 그 소리가 거슬리는 게 아닌데도 나는 왜 그 소리에 매번 주의를,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빼앗기는 걸까?


내가 신경이 쓰이고 의아해하는 지점은 이거다. 남들이 불편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해보는 것일지, 혹은 자신도 문을 세게 여닫는 것이 누군가에게 피해가 될 수 있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 사실도 알고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도 알지만 워낙 오랜 습관이 되어버린 통에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인지.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피드백의 중요성, 경험을 통한 깨달음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 인식의 사각지대에 놓인 영역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전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든,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든 주변에서 반복된 피드백을 듣거나 혹은 어떤 극적인 사건을 통해 깨달음이라는 각성의 과정을 겪는 것이 우리 삶에는 필요하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사는 것. 한 곳에만 머물며 고이고 썩어가는 물이 되지 않는 것. 쾅 소리 나는 출근 도장이 전하는 아침의 단상이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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