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의 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그랬다. 어릴 적부터 당연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그냥 따르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반골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뻔히 문제점이 보이는데 전통이라는 이유로, 문화라는 이유로 따르는 것이 싫었다. 반골 기질이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최초의 사건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일어났다.
나는 남자 중학교에 다녔었는데, 당시 학년 주임 선생님은 두발 단속을 심하게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기한 내에 두발 길이 규정에 맞춰오지 않을 경우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이 거행됐다. 학주 선생님은 한 손에는 사무용 가위를, 다른 한 손에는 플라스틱 쓰레받기를 들고 다니며 규정을 어긴 학생들의 구레나룻과 뒷머리를(그 당시엔 그 두 가지가 남학생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았다)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잘라버리셨다. 반기를 들고일어나는 학생은 곧바로 교무실에 대기 중이던 체육 선생님에게 보내졌다. 화사한 미소로 환영해 주시던 체육 선생님이 마대자루로 손수 해주시는 ‘엉덩이 찜질’ 서비스를 받고 나면 불보다 뜨겁던 사춘기 청소년들의 분노는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혈기 왕성하던 사춘기 시절의 나에게 두발 단속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당한 일이었다. 학업 성적과 두발 길이에 대체 어떤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한 번은 끝까지 반항해 볼 생각으로 방학 동안 길었던 머리를 개학 하루 전까지 자르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아주 난리가 났다. 머리 정돈이 되어있지 않은 나를 보고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신 것이었다. 당신께서도 교직에 몸을 담고 있어 두발 단속에 찬성하는 입장이셨다. 더군다나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다른 선생님들도 뻔히 알았기 때문에 아들놈이 껄렁껄렁하게 하고 다니는 걸 용납하실 수 없었으리라.
당시 꼴랑 15년 남짓 산 나였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건 처음 봤다. 아버지는 당장 나가서 단정하게 이발을 하고 오지 않으면 나를 호적에서 파버릴 테니 집에서 나가라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하셨다. 머리 좀 길렀다고 아들을 호적에서 파신다니요. 지금 생각해도 살짝 억울하다. 조상님들은 머리카락도 부모가 주신 신체의 일부라고 함부로 자르지 않으셨다는데. 그 말에 빈정이 단단히 상한 나는 집에서 나가버릴 생각을 했다. 따로 챙기는 옷가지 하나도 없이 지갑에 있던 전 재산 10만 원만 가지고 말이다.
충동적인 결정이었기에 티 나지 않게 실행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미용실에 다녀오는 척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굴리시던 어머니가 아들이 걱정되셨는지 미용실까지 같이 가자고 하신 것이다.
어머니를 어떻게 따돌릴지 머리를 굴리던 나는 미용실에서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요 앞 마트에서 음료수 좀 마시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동한 후 곧장 택시를 잡아 올라탔다. 휴대폰 배터리도 빼버렸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가출이었다.
당시 내 분노의 화살은 오직 학생 주임 선생님과 아버지에게로 향해 있었다. 화 내시는 아버지를 말리시기에만 급급하시던 어머니에게 무슨 앙금이 있었겠나. 택시 창 너머로 미용실 안에 앉아 계신 어머니가 보였다. 음료수 사러 나간 아들이 언제 오나 바깥만 두리번거리시던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의 치기 어린 마음으로는 집을 아예 떠나버릴 생각이었다. 아들이 떠난 줄도 모르고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죄송스러워 가슴이 미어졌다. 내가 만약 배우가 되어 눈물 연기를 한다면, 택시 안에서 숨죽여 끅끅 눈물을 흘리던 그날 밤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부모님 가슴에 큰 못을 박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한다.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도 적잖이 충격을 받으셨고, 내색은 안 하셨지만 큰 상처도 받으셨을 것이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더 좋았으련만, 이놈의 자식은 다 커서도 부모가 바라는 대로 살지 않고 있다. 남들 하듯이 대학 졸업하자마자 서둘러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고 장가도 가서 손주를 안겨드리지 않고, 나이 서른이 넘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겠다고 한다.
왜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오호통재라! 나도 만족스럽고 부모님도 만족스러운 모두가 행복한 엔딩을 만들고 싶다.
혹시 가출해서 어떻게 됐나 궁금하실 분을 위해 뒷얘기를 말씀드리자면, 몇 시간 안 되어 돌아왔다. 어린 맘에 뛰쳐나오긴 했지만 정말 집을 영영 떠나버릴 만큼 배포가 큰 위인(?)은 되지 못 되었던 것이다. 우습게도 가출한 나는 당시 학급 반장을 맡아서 담임 선생님과 친했다. 담임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재워달라고 연락을 드렸다. 선생님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신 채 부모님께 연락하진 않을 테니 일단 밖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순진했던 성호는 선생님 담당 과목이 도덕이라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주시며 도덕 담당의 역량을 십분 활용하여 나를 설득하셨고, 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또다시 떠올라 회한의 눈물을 펑펑 흘리며 선생님과 같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이 일 이후로 나는 매년 스승의 날이면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는 애제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