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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y 15. 2023

癸卯년 丁巳월 두 번째 기록

주간단남 5월 2주차

癸卯년 丙辰월 두 번째 기록癸卯년 丙辰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5.07 (일) 



(..)

고민을 동반하는 건 습관의 미완을 뜻한다.



(..)

광의에서 습관은 지속성만으로도 해당이 될 수는 있겠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습관은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입력이 되어 있어 할지 말지 매번 고민하지 않고 그냥 하는 것이다. 습관 중 일부를 리추얼이나 루틴으로 인식할 수는 있으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루틴도 역시 때로 고민과 선택이라는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

질투심은 조바심이다. 질투심은 이기심이다. 나만 주목받고 싶은데 다른 누가 같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주목을 받을 때 질투심이 일어난다.



(..)

반가이 여기는 게 아니라 내가 받고 있는, 혹은 받게 될 잠재적 관심의 양까지를 모두 지키려는, 아니, 빼앗기지 않으려는 심리적 몸짓이 안에서 이는 게 느껴진다. 그것은 모두 내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데서 기인한 것이며, 그런 여유의 부족은 내공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결국 나는 내가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늘 잘난 모습만, 완성된 모습만, 최소한도는 갖춘, 평타 이상은 치는 모습만을 남에게 보이고 싶은 사람인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몸부림이 오히려 몸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지 못하게 막는 것은 아닐까?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은 모두를 환영하고 열린 마음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다. 내 마음의 여유가 있든 없든.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실력의 높고 낮음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의 여유에는 어떤 부차적인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 허상이다. 조건은 늘 변한다. 그렇다는 건 조건이란 결국 현재 자신이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영원한 변명거리를 댈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마음의 평화를 얻는 단 하나의 유일하고도 변하지 않는, 실재하는 조건은 그렇게 하겠다는, 지금 그것을 얻겠다는 결심, 진심 어린 결심. 그것 하나면 된다. 그 결심으로부터 마음과 물질세계의 연결이 조건 지어진 허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적어도 머리로는 말이다. 그게 출발점이다.





23.05.08 (월)



(..)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고 또 표현해 보는 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낳아주신'도, '길러주신'도 아닌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무엇이 부모인지에 대한 통상적인 합의를 찾기보다 중요한 것은 대상이 누구든 내게 그에 준하는 은혜를 준 대상에게 감사함을 가져보는 날인 셈이다.



혹자는 다 같이 어린이날이며 어버이날이며 없애자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지나치게 모든 것을 '소비'와 연결 짓는 물질만능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객이 전도된 기념일 문화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일 것이라 생각한다. 



자라나는 미래의 새싹들이 자유와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먼저 앞서가는 사람들로서 어떤 고민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그런 나를 이 땅 위에 있게 해준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 그마저도, 그런 마음을 1년에 단 하루라도 가져보는 그런 시간마저도 없애자는 그런 심산은 아닐 거라고, (부디) 믿어 본다.



(..)

우리는 때로 감사의 대상이 될 사람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부처나 테레사 수녀라도 되어야 자신의 감사를 얻을 자격이라도 있다는 듯. 그러나 감사는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일 뿐이다. 언제나 감사할 일은 존재한다. 다만 본인이 그것을 감사의 자격이라 생각하지 않을 뿐. 



감사는 주관의 영역임과 동시에 객관을 지향해야 할 영역이다. 모두가 그날 매 끼니를 먹는 시간과 메뉴나 여러 환경은 다를지 몰라도 그것이 주어지는 사실 자체에 대해선 감사를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다. 사는 게 아무리 힘겨울지라도 살아있음 그 자체가 감사함의 대상이 될 수도, 따스한 햇살을 온 피부로 느낄 감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 



언제나, 모든 곳에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으로 감사의 기준을 객관화한다면 그 안에서 각자의 개별적 시선과 삶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주관적인 감사의 기준과 대상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이 주관과 객관이 조화를 이루는 감사의 올바른 형태이리라.



(..)

개인의 자유만 존재해서도, 집단의 규율만 존재해서도 안 된다. 옳은 가치에 대한 집단적이고 암묵적, 명시적인 대전제 속에서만 인간의 자유의지는 올바르게 피어날 수 있다. 그게 없는 자유는 방종으로 이어지는 운명에 놓일 뿐이다.



(..)

한때 나의 하늘이자, 지금은 나의 땅이 되어주시는 두 분께 언제나 깊은 감사와 사랑을 느낍니다. 동시에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두 분은 내게 조바심을 일으킵니다. 하루라도 빨리 자리 잡고 당신들께서 그러했듯, 나와 사랑하는 이를 닮은, 작은 우주를 창조하고 그 속에 뜨거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생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지 않나 하는 그런 조바심.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드려야 할 텐데 하면서도 그 가늠할 수 없는 방대함에 상환의  가능성에 의문이 들어 경외심과 좌절감도 동시에 자아냅니다. 빛바랜 머리칼과 왜소해진 몸을 볼 때면 때때로 코 끝이 찡해지게 하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고 따뜻해지는, 그런 존재가 있어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옵소서.





23.05.09 (수)



(..)

현미 요거트가 다 되었다는 알림 소리가 울린다. 저게 되는 날은 늦잠은 없게 된다. 책임감이 결국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고여서 썩지 않으려면 사람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필요하다.



이상적으로는 스스로가 부여한 자발적인 강제성, 자발적인 책임감이면 좋겠지만 인간의 속성상 그건 지속하기가 어렵다. 인간은 필시 직간접적으로 조직, 단체, 공동체 등의 힘을 빌려야 한다. 인간은 결코 세상을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다만 그 책임감의 근간은 역시 스스로에 대한 책임으로 귀결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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