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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y 22. 2023

癸卯년 丁巳월 세 번째 기록

주간단남 5월 3주차

 기록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5.14 (일) 



(..)

요 며칠 새 계획한 것들을 충분히, 마음이 흡족할 정도로 매듭짓지 못했다. 어쩌면 그 갈증으로 인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고 전심을 다하라는 메시지를 하늘이 피부 가려움증으로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루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건지 이렇게 차분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모닝 페이지를 쓰는 것이 얼마 만인가 모르겠다. 오늘은 3쪽을 가득 채워서 내 의식 속 고여있을지도 모를 정신적 찌꺼기들을 잔뜩 배출해 내겠다.


(..)

나의 길이라면 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자연스러운 욕구에 몸을 맡기자. 내 생각들은 이유 없이 마구잡이로 쏟아지지 않는다. 그 안에도 마치 우주의 흐름처럼 저마다의 리듬과 규칙이 있을 터. 그 심연의 바다를 헤엄칠 특권은 우리 각자만이 지닌 선물이자 재앙일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렷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자신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준비 없이 섣불리 그 깊은 바다로 뛰어드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다이빙에도 좋은 장비가 필요하듯 그런 작업에도 검증된 도구가 필요하다. 성현의 지혜가 깃든 여러 명상 기법이 그러하고 어쩌면 이 모닝 페이지도 후대에 길이 남을 훌륭한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


(..)

인간에겐 누구나 창작욕구가 있다. 꼭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만 갖다 붙일 수 있는 거창한 표현이 아니라 자신 안에 깃든 무언가를 내뱉고자 하는 그런 욕구. 그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에 가깝기에 욕구라고 불리는 것 아닐까. 


이렇게 모닝 페이지를 통해서든, 명상을 통해서든 그런 내면의 소리를 풀어내어 해갈을 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고상한 방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내 안의 모습을 풀어 헤친다. 욕설, 자위, 섹스, 음식에 대한 탐닉, 자연과의 교감 관계에서 느끼는 내적 친밀감 등. 다양한 경험에의 노출이 곧 욕구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

되는 대로, 느낌대로 즉흥연주를 하자. 내 직관과 지식을 모두 믿어라. 너는 그만한 자질과 재능을 갖춘 훌륭한 인재다. 이 바닥(?)에 새로운 파란을 불러일으킬 미래의 꿈나무다. 현장이라는 다양한 양분을 통해서 그 꿈나무가 무럭무럭 자랄 수 있도록 해주어라. 위대한 종착지의 양상을 미리 그려두고 그 과정 속에 몸을 맡겨라. 세상이 내게 점지해 주는 최적의 루트가 열릴 것이니.


(..)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롯데타워를 보면 그때 그것은 분명 실존한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은 '실재'하고 있을까? 어쩌면 실재라는 건 내면 의식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그것이 있다는 당연한 믿음이 그것을 만들어 내고 그 믿음의 소유자가 많을수록 그것은 더욱 견고해진다. 그것이 철근 구조일 때부터 건설 근로자들의 마음속에, 설계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완공 이후엔 서울시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자리  잡아 여러 시민의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실재는 각자가 경험하는 주관적 세계 안에서는 지극히 일시적일지도 모른다는 게 '관찰자 효과'를 고려한 나의 가설이다. 마치 과거 FPS 게임을 하다 보면 인터넷 속도에 따라 데이터 처리 과정을 최적화 하려는 PC의 작업 결과에 따라 게임 속 캐릭터가 가까이 다가가야 비로소 데이터의 형태로 존재하던, 그러니까 0과 1의 숫자로만 존재하던 그것이 내 캐릭터라는 세상의 필터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맵의 형태를 갖췄던 것과 유사하다. 


잠재의식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 여기서 얼마나 다르겠는가. 이것을 비단 머리로 뿐만 아니라 뼛속 깊숙하게 새겨진 기존 관념의 자리까지 탈바꿈 시킬 정도로 익숙한 디폴트 상태로 만든다면 아마 이 세계에는 대혁명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매트릭스의 작동원리를 일찌감치 깨달은 네오와 그 팀원들처럼 인류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기존의 규칙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많은 부당한 제도가 검은 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만행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 흐름에 더 이상 동참하지 않겠다는, 작지만 결코 작다고만은 할 수 없는 위대한 다짐들도 여기저기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순전히 내 직관이 그려낸 소설과도 같은 일련의 흐름들이 다가올 인류의 다음 모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AI 시대에 인류가 나아가야 할 다음 스텝은 단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영적인 성장이다. 이성 그 이전에 인류이기에 갖추고 있던 바로 그 존재를 몸소 증명해 내는 것이 기술과 인격을 구분 지을 유일하고도 영원한 지점이 될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끝내 무의미한 노동에서의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또 다른 분야에서의 지식 축적을 하는 건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다. 모든 영역에서 AI가 인간의 기존 역할을 대체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끝없는 질문 속에서 유영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더 깊어진 내면의 깊이와 맑아진 눈빛을 장착하는 것이다.




23.05.15 (월)


(..)

DRY. Do not Repeat Yourself. 예전에 프로그래밍 공부를 했을 때의 격언(?)이다. 이건 비단 개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 걸쳐 적용이 가능하다. 매너리즘에 갇히지 않고 언제나 더 개선할 여지는 없는지 살피는 것. 항상 더 나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삶이 팍팍하다 여겨질수록 놓치기 쉬운 삶의 중요한 기지다.



23.05.16 (화)


(..)

진짜 컨디션은 기상 직후에 알 수 있다. 활동 컨디션은 기상 후 세수와 양치를 해보면 알 수 있다. 전자는 간밤의 수면의 양과 질이 충분한지를 보여주고 최근의 수면 리듬이 고스란히 기상 직후의 개운함의 정도로 나타나는 것이다. 후자는 그런 것을 뒤로 한 채(?)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신체 에너지 자원을 끌어모을 것이 잔존하느냐 혹은 간밤의 수면으로 오늘 하루 혹은 반나절만이라도 버틸 여력이 생겼느냐를 의미한다. 마치 카드 돌려 막기처럼.

(..)

질문 없는 그의 일방적 가격 제시에 솔직한 마음은 언짢음이 느껴진 것이다. 그래도 거기에 동화되거나 넘어가지는 않았다. 내 생각을 해준 그 마음과 자식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친구로서 대단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기꺼운 마음으로 봐주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100% 전심을 다하지 않는 것 또한 잔존했던 것 같다. 부지불식간에 내가 '푸대접' 받았다고 생각하는 피해의식이 작용했으리라. 첫 술에 배부르려는 조급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를 찾는 사람이 있음에, 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위해 도움을 줄 역량을 갖추고 있음에 감사하자.

그리고 자부심을 갖자. 허영심이 아니라. 긍지와 자부심은 남들이 뭐라 하는 것에, 남들의 대우에 좌지우지되지 않을 만큼 뿌리가 깊다. 반면 허영심은 남들이 자신을 몰라주거나 되려 무시한다고 여기면 쉽게 흔들리는 기반이 약한 감정이다. 전자는 뿌리를 자신의 가슴에 내리고 후자는 타인의 평가에 내린다. 전자가 소나무라면 후자는 민들레 씨앗이다. 지금은 민들레 홑씨와 같은 마음의 크기이지만 점차 아름드리 소나무와 같이 크고도 깊어질 푸른 내 마음을 상상해 본다. 그 염원을 담아, 그러한 결과를 미리 상정해 두고선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어 본다.

(..)

두 사람을 겪으며 느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을 맡게 될 때 업무의 성격과 범위를 초장에 명확히 하라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보수도 포함된다. 그 이외에 발생 가능한 여러 사안에 대해서 일일이 예상하고 방지할 수는 없으니 서로의 협의의 태도나 자세에 대한 것이라도 사전에 합의를 해두어야 한다. 이 첫 단계를 귀찮아서 든, 지인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든 간에 확실히 해두지 않은 대가는 반드시 귀중한 자원(물질이든, 정신력이든, 시간이든)을 낭비하는 것으로 돌아옴을 명심하자. 물론 이에 대한 책임은 일을 똑바로 주지 않은 상대에게도 있으나 똑바로 확인하지 않은 내 탓이 더 크다. 프로는 상대를 탓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게 더 나은 길이었을지에 대한 생각만을 할 따름이다.

(..)

둘째, 첫째 이슈가 문제가 되든 되지 않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스스로의 격을 높이는 길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원치 않게 겪게 되는 불편함을 근거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상대를 탓하고 그 불만을, 맡은 일에 대한 책임 소홀로 전가배 버리는 것이 이 시대에 만연한 듯하다.

딱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는 심리가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런 사람 치고 정말 그 말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이 받은 만큼인가? 정시 출근과 정시 퇴근? 그건 지나가던 행인을 아무나 앉혀놔도 할 수 있다. 엄밀히 따져보면 상사든 부하든 사원이든 임원이든 정말 '받은 만큼' 일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렇기에 조금만 부당함을 겪거나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불만을 토해내거나 일의 퀄리티에 대한 책임감을 한껏 낮춰버리고 만다. 그건 사실 본인 얼굴에 침 뱉기다.  

그렇다면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의 기준은 무엇일까. 수치화할 순 없어도 얼마나 나를 다시 찾느냐로 가늠해 볼 수 있겠다. 자신이 사업자나 프리랜서라면 고객의 재방문율이나 신규 방문 경로 중 지인 추천의 비율 등이 되겠다. 직장인이라면 업무 관할, 책임도의 확대가 될 수 있겠다. 



23.05.19 (금)


(..)

꾼이든 진상이든 그는 나에게 인사이트를 주었다. 왜 Yes or No의 질문이 좋지 않은지. 가급적 '~를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하는 흐름이 왜 좋은 질문인지. 그리고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것을 막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때 당시를 떠올리면 새벽에 고생한 보람을 남겨진 액수를 보며 재확인했었다.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계속된 추가 결제를 환영하고 종용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떠올려 본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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