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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n 05. 2023

癸卯년 戊午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6월 1주차

 기록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5.22 (월)


(..)

일어나니 배고프다 못해 속이 쓰리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완에 침을 놓고 10여 분이 지나니 잠잠해진다. 5장 6부 중 6부를 관장하는 부회혈답다. 경락 공부는 느리지만 아주 천천히, 수불석권의 자세로만 임하고 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단 일념만으로. 

놓지만 않으면 결실은 반드시 맺게 되어있다. 다만 그 시점까지는 우리의 통제 영역 밖이다. 이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해야 한다. 사람들은 수단 뒤에 진짜 목적을 숨긴다. 그러나 인간의 무의식은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목적을 외면한 채 수단이 목적인 양하는 사람은 끝내 그 수단조차 얻어내지 못하거나 수단을 얻어내도 그게 본 목적이 아니었으니 여전히 목이 마르다. 갈증의 연속.

예를 들어 순수하게 의사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의사가 되는 건 수단일 뿐 실제로는 부모의 인정을 바랐기 때문인 사람과 다른 경험이 펼쳐진다. 만약 전자인 사람이 의사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치유하는 게 목적이라면 설령 의사가 못 되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다른 길로 빠지게 된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의사가 되더라도 그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채감에 계속 시달릴 뿐이다.

목적과 수단을 달리 구분하여야 한다. 그리고 목적을 갈증이 아닌, 방향으로서만 인식해야 한다. 조급하고 집착하면 목적은 뒤틀린 욕망이 되고 만다. 그것은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와 다를 바가 없다.




23.05.30 (화)


(..)

어제 턱걸이를 좀 무리하게 해서인지 목에 담이 왔다. 귀찮다고 워밍업을 패스한 자, 정확한 자세보다 세트당 목표 개수 달성에만 치중한 자의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의당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닌 샛길로 가려는 심산에는 늘 이렇듯 크고 작은 위험이 도사리게 마련이다. 어쨌거나 그래서 근육을 담당하는 데 효과적인 족소양 담경 양릉천에 침을 놓고 모닝 페이지를 쓰는 중이다.

(..)

나는 부드러워 보일지 모르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은 은근 뚝심이 있는, 뚝심과 우직함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길 따라 풍경 따라 이리저리 나부끼는 게 아니라 내가 가고자 하는 길 위에서 철저히 풍경으로써만 주위를 관망할 따름이다. 내 길에만 골몰하지 않으면서도 주변에 시선을 빼앗겨 자꾸만 방향 설정에 잦은 변동을 일으키는 것을 지양한다. 답답해 보이더라도 이게 내 스타일인 걸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

나에겐 그날이 사(死) 궁에 해당하여 사색과 철학적 풍모가 더 짙어지고 역시 천라가 겹쳐서 하늘의 문이 열리는 천문이 술(戌) 시에 완성되니 그때 나타난 인연이라 뜻이 깊다. 게다가 나에겐 귀한 화(火) 기가 투출된 날인 정해(丁亥) 일에 만난 인연인지라 뭔가 앞으로 내게 많은 인사이트와 도움을 주실 것만 같았다. 두고 보면 알겠지.

인연이란, 참으로 신비하구나. 그래서 인생은 재밌다. 예측 불가능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고정 불변한 것은 죽음과 동의어이다. 게다가 그것도 비유적 죽음이지 실제 죽음 또한 어떤 것을 완전히 멈추고 고정시켜버리지는 않는다. 죽음은 또 다른 국면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

'타로카드를 믿어라.' 

그 말이 자꾸 뇌리를 스치고 가슴에서 일렁인다. 마음 한구석에 그것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나의 정곡을 찌르던 그 말. 하지만 나는 전혀 날카로운 자상의 통증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정신을 차리게 하는 듯한, 각성의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내가 내 도구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면 그런 불신의 에너지는 카드를 매개로 내담자에게까지 전달될 수밖에 없다. 사실 정확히는 카드는 매개체다. 그 자체에 뭔가 깃들었다기보다는 그것을 매개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일어나는 에너지의 교류. 그것에 대한 믿음. 의식에 대한 믿음과 경건한 마음. 나의 좋은 의도와 마음이 상대에게 고스란히 가닿아 그 사람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

시선을 그런 방향으로 서서히 틀어갈수록 진짜 역학자가 된다. 맞고 틀리고에 집중하면 이완이 아니라 긴장이 되며 매 순간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할 것이다. 틀려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결과는 말 그대로 결과일 뿐. 올바른 마음과 선한 기운을 전하려는 그러한 본질적인 마음에 우선적으로 집중한다면 모든 건,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결과물로써 줄줄이 따라올 것이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맞히려고 집착하기에 혀가 길어지는 거란 말도 인상적이었다. 상대가 가려워하는 지점을 단번에 파악하고 긁어줘야 명의인 것이지, 여러 곳을 헤집듯 하다가 그 부위를 얻어걸린 듯 공략하고는 생색내는 건 명의가 아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목을 돌려본다. 침 한 방에 모든 게 해결되진 않겠지만 (이거 봐, 이게 나의 특징이다. 겸양을 빙자한 불신. 겸양은 불신을 가리는 거짓 수단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래도 뭐랄까, 약간은 부드러워졌다는 기분이 든다.



23.06.02 (금)


(..)

솔직한 마음으로는 자동차를 지금 내가 타는 건 사치라 여겨지지만 이미 가진 자의 마음처럼 덤덤하고 당연한 반응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이것이 나를 또 어떤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 줄지, 그리고 이것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내게 돈도 절로 들어와줄 것이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게, 현재 필요한 게 뭔지 명확하게 알고 행동하는 사람일수록 원하는 것을 얻는다. 간절해지라는 뜻은 아니다. 조급함과 간절함은 나를 원하는 것으로부터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

미래도 좋지만 그것의 뿌리는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현재에 있다는 걸 늘 명심하라. 미래가 불투명하다면 지금 현재도 불투명할 확률이 높다. 반면, 지금 현재에 오롯이 머물 줄 안다면 미래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에 걸맞게 펼쳐질 것이다. 그 단순한 진리를 놓치지 않도록 언제나 의식의 초점을 현재로 가져오는 것이 습관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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