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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n 19. 2023

癸卯년 戊午월 세 번째 기록

주간단남 6월 3주차

 기록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6.12 (월)


(..)

당분간은 귀찮더라도 백회에 더해 합곡에까지 침을 놓아보려 한다. 합곡은 4총혈 중 얼굴 쪽을 관장한다. 여드름 같은 피부 트러블에도 효과가 좋단다. 그러면 얼굴이 아닌 다른 피부 전반에도 작용을 하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합곡은 수양명 대장경이고, 수태음 폐경과 표리관계, 즉 음양 관계에 놓인다. 대장과 폐는 모두 오행상 금(金)에 속한다. 피부와 코도 모두 금에 배속된다. 그러니 합곡혈이 피부에도 작용하리라는 논리가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

감사함에 익숙해지지 말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지자. 감사는 곧 온전히 누릴 줄 아는 태도이다. 그것은 곧 그 순간에 오롯이 머무는 게 된다. 감사를 느끼고 표현하는 순간만큼은 의식은 과거와 미래를 표류하지 않고 현재에 닻을 내린다. 인간의 정신에 배터리가 있다면, 감사함을 느끼며 입가에 미소를 띠는 행위야말로 그 배터리를 충전시키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

걱정이 되는 걸 애써 외면하고 모른 척, 아닌 척하는 게 초연한 게 아니다. 초연함은 오히려 걱정이 나를 지나가는 것을 그저 내버려 두는 것이다. 붙잡는 대신에 말이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을 일일이 붙잡고 그것들의 안부를 묻는 것은 초연하지 못한 것이며, 모든 감정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다. 그것들이 지나치지 못하게 철조망을 치는 것 역시 다른 의미에서 초연하지 못한 것이다.

(..)

내 안에 여전히 심적인, 내적인 장애물이 느껴진다. 거침없이 앞으로 돌격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 그것은 다름 아닌 옳음에 대한 지향이다. 이것이 타당한가? 정당한가? 유익한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무엇을 하든 간에 나는 이러한 자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좋게 표현하면 양심과 뚝심이요, 안 좋게 말하면 장애물이자 족쇄다.

어느 쪽에 방점을 둘 것인가. 그 역시 오로지 내 영혼의 기준에 달렸다. 아직까지는 전자 쪽에 무게를 싣지만, 과연 언제까지고 우직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중 이것은 어디에 속한 것일지. 궁금해지네.




23.06.13 (화)


(..)

때로는 머릿속 이성이 하는 생각보다 가슴속에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것을 따르는 게 좋을 때가 있다. 이것을 정확히 마케팅이나 기타 여러 외부 요인에 의해 생기는 '충동'과 칼로 무 베듯 구별할 수만 있다면 나는 늘 가슴속 메시지에 따라 삶을 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내겐 아직 묘안이 없다. 그런 충동과 가슴속 직관을 구별해 낼 재간과 안목이 아직 내 안에서 꽃 피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에 충동은 일단 시선이 타인에게 가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본능과 관계된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그마저도 엄밀히 말하자면 본능과 관련된 것이라고 우리가 착각하고 있을 때가 더 많다.

가령, 우리 몸에 건강한 사과보다 피자를 볼 때 식욕이라는 충동을 쉽게 느낀다. 필요했던 것도 아닌데 그걸 구매한 나, 사용하는 나를 상상해 보면 스스로의 가치가 올라갈 것만 같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소비, 지출처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충동은 대부분 소비와 관련이 깊다. 미디어는 끊임없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법의 테두리 안에서 소비를 종용한다. 

직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외부의 자극과 반드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주체할 수없이 조급한 느낌인 충동과는 달리 부드럽고 천천히 다가온다. 편안하다. 충동은 스스로를 설득하는 반면, 직관은 그렇지 않다. 충동에는 이유가 있지만 직관에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충동은 시선이 바깥에 있을 때 생기고, 직관은 내면에 둘 때 생긴다. 정확히는 원래부터 존재해 왔지만 그제야 비로소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긴 할 테지만.




23.06.16 (금)


(..)

사람의 본 모습은 잘해줄 때, 그리고 돌발 상황이나 위기 상황에 닥쳤을 때, 그리고 혼자 있을 때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도 나를 보는 이가 없는 안전지대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비로소 나오게 되는 모습들. 그것이 진짜 본성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평생 자기 자신만 아는 모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결코 무덤까지 가져갈 수 없다. 일단 나 자신이 그 사실, 혹은 그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내 컨트롤 영역 밖의 존재다. 무의식에 내 참모습이 각인되어 있다면 그것은 은연중에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며, 누군가 무의식에 접근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관점과 전제를 확 넓혀서 결국 우리 모두는 연결된 하나의 의식에서 파생된 존재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와 같은 '자신만의 비밀'은 역시 타인에게 논리적이진 않지만 육감적인 방식으로 감지될 공산이 크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오죽하면 CCTV도, 도청 장치도 없던 시절에 낮말 밤말 모두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 생겨났겠는가. 

(..)

맹자...였던가... 거기에는 '신독'이라는 말이 나온다. 혼자 있을 때도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마저도 남이 있을 때 하듯 바르게 조율을 하라는 것이다. 남들이 보나 안 보나 늘 일관된 상태로, 그 자체가 하나의 올바른 버전의 나다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군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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