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Jun 26. 2023

癸卯년 戊午월 네 번째 기록

주간단남 6월 4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6.20 (화)


(..)

어떤 시기가 바쁘게 흘러갔다고 생각될 때 '바쁘게'의 자리에 '어영부영'을 갖다 넣어서 말이 되는지도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 바빠 보이는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바쁘게 보냈는지가 중요하다. 


목적 없는 행동에는 의식이 서리지 않는다.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것은 의식이 마치 희붐한 새벽안개처럼 탁하고 총기를 잃은 상태로 사는 것과 같다. 의식이 잠들어 있을 때 우리는 쉬이 시간이, 세월이 빠르고 무상하다고 이따금씩 느끼곤 한다.


(..)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를 생각해 보면 지난주에 모닝 페이지를 쓰면서 합곡에 꾸준히 침을 놓자고 해놓고선 그 주에 추가로 딱 한 번만 그것을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 외엔 일상에 치여 까맣게 잊고 기억 저편에 묻어놓고 말았다. 


모닝페이지와 침 놓기가 어느 정도 연결이 된 나에게 이는 그만큼 모닝페이지를 적게 썼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다. 모닝페이지 쓰기를 소홀히 했다는 건 그만큼 내 일상의 리듬과 균형이 무너진 상태임을 반증한다. 내가 보내는 일상의 모습이 내 마음을 비추는 경험임을 잊지 말자.


(..)

NVC에서 말하듯이 자극이 감정의 원인은 아니다. 원인은 나에게 있다. 나의 특정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드러나는 것이 소위 말하는 부정적 감정이다. 나는 어떤 욕구가 있었을까. 없어 보이고 싶지 않다는 욕구. 나는 손님이 없이 파리만 날리는 상황에 애써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관심과 외면은 초연함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인정해 주지 않고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생님의 그런, 어찌 보면 배려라고도 할 수 있을 행동을 그런 식으로 느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나 자신을 그렇게 연민과 동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그리고 그것을 단순한 감정 혹은 느낌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없어 보인다는 평가와 판단까지 내리고 있었다는 게 된다. 


일체유심조라고 했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빚어내는 현상임을 되뇌고 또 되뇌도록 하자. 내가 할 일은 외부 현상과 맞서 싸우고 그것을 탓하는 게 아니라, 안으로 시선을 돌려 그것의 뿌리인 마음을 살피고 또 살피는 일이다. 


우리의 의식은 밝고 따뜻한 빛과도 같아서 가만히 어떤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지속하면 정화의 작업이 절로 진행된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것은 이내 차분함을 자아내고 물처럼 흘러간다. 눅눅하던 곳에 온기가 드리워져 뽀송함을 되찾듯, 의식의 빛은 홀대받던 어두운 내면을 밝게 비춰 그것이 고여있지 않고 생동감을 가지고 흘러가도록 만든다.



23.06.22 (목)


(..)

악순환은 무의식의 작용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깨고 싶다면 의식의 개입이 필요하다. 무의식이 자율주행차라면 의식은 그것을 운용하며 여러 설정값을 세팅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더 우월한가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우열은 인간의 좁은 시야로 자연에 당연히 존재하며 제 몫을 다 하는 존재들에 매긴 그들만의 수치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이유 없이 존재를 얻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늘이 맑다. 새들이 지저귄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몸의 긴장이 풀리고 이완됨을 느낀다. 호흡이 느려지고 깊어진다.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로 향하는 문은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비유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육체의 상태다. 격동과 흥분, 투쟁도피상태와 같은 육체의 상태는 내면으로 향하는 문과는 거리가 멀다. 위로 솟은 기운을 아래로 끌어내려 한곳에 모으는 것이 내면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열쇠가 된다.

(..)

후회는 최상의 결과를 바라는 한 언제나 들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최상의 목표를 세우되, 현재 내가 이룬 것들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아직은 멀었어.' 가 아니라, 과거에 비해 한 발짝 목표에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

기대와 실망의 반복, 기대에 충족을 안겨주는 쪽만 찾게 되는 것은 어쩌면 음식으로 치면 편식과 같을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것도,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 모두 반쪽 자리 삶이다.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의 분별을 내려놓는 것이 진짜배기 아닐까. 다만 가고자 하는 길이 있고, 그 길 위에 펼쳐진 삶이라는 파노라마가 존재할 따름이다. 그저 멀리 바라보며 방향을 정하고, 정했다면 이제 매 걸음에 온전히 충실하자. 오늘도 주어진 하루에 감사함을 표하면서.



23.06.24 (토)


(..)

이쯤 되면 삶이 내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라고 봐야 마땅하겠다. 꼭 그런 관점을 갖지 않더라도 심리학에서도 노출이 단순히 증가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경계심 대신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내게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 어제 밍이 '아니, 지금이 바로 그때야.'라고 말했을 때 순간 방어기제가 도졌지만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다. 언제까지고 숨어만 있을 텐가. 중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선한 의도 그 자체임을, 어떻게 하면 상대의 삶이 보다 개선되는지에 대한 나의 관심임을. 머리로는 알면서 왜 실천하지 못하나. 

마케팅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그것을 활용하려는 각 개인의 숨은 의도와 각자의 성정 자체가 결과의 선악을 결정지을 뿐이다. 도구는 도구다. 제아무리 큰 힘을 지니고 있어도 말이다. 스스로가 군자의 삶의 지향하고, 소인배의 삶을 지양하며 도구를 도구로써만 바라볼 요량이 있다면 말이다.

(..)

컴포트 존에서 공부만 하면 안일해지고 감각도 둔해진다. 완벽은 이론상에나 존재한다. 음 없는 양, 양 없는 음은 각자의 존재가치를 알지 못하듯 이론과 실전은 늘 같이 따라붙어야 한다. 둘이서 넘실거리며 자아내는 한바탕의 춤 사위가 곧 살아있음의 증표다. 활용되지 못하는 지식은 허영이요, 죽은 지식이다. 모든 배움은 성장과 활용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한다.










[주간단남]

첫 번째 도약 보러가기



간단남 응원하기

작은 관심과 응원만으로도 지속해 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癸卯년 戊午월 세 번째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