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림, 끌어당김의 법칙, 시크릿, 트랜서핑, 명상, 마인드풀니스 등.
바야흐로 '정신적 가치'에 대한 주목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시대다. 우리는 이제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여기저기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때로는 머릿속 이성이 하는 생각보다 가슴속에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것을 따르는 게 좋을 때가 있다. 이것을 정확히 마케팅이나 기타 여러 외부 요인에 의해 생기는 '충동'과 칼로 무 베듯 구별할 수만 있다면 나는 늘 가슴속 메시지에 따라 삶을 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스탠드펌>의 저자 스벤 브링크만은 이러한 시류에 반기를 들고 '자아종교'라는 딱지를 붙여 비판하고, 대안으로 스토아 철학이라는 '검증된' 지혜에 주목하자는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나 역시 그의 관점에 일부 동의한다. 내면의 소리를 따른다는 말은 그럴싸 해 보이지만 많은 위험이 도사린다.
일단 내겐 아직 묘안이 없다. 그런 충동과 가슴속 직관을 구별해 낼 재간과 안목이 아직 내 안에서 꽃 피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에 충동은 일단 시선이 타인에게 가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본능과 관계된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그마저도 엄밀히 말하자면 본능과 관련된 것이라고 우리가 착각하고 있을 때가 더 많다.
가령, 우리 몸에 건강한 사과보다 피자를 볼 때 식욕이라는 충동을 쉽게 느낀다. 필요했던 것도 아닌데 그걸 구매한 나, 사용하는 나를 상상해 보면 스스로의 가치가 올라갈 것만 같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소비, 지출처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충동은 대부분 소비와 관련이 깊다. 미디어는 끊임없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법의 테두리 안에서 소비를 종용한다.
직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외부의 자극과 반드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주체할 수없이 조급한 느낌인 충동과는 달리 부드럽고 천천히 다가온다. 편안하다. 충동은 스스로를 설득하는 반면, 직관은 그렇지 않다. 충동에는 이유가 있지만 직관에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충동은 시선이 바깥에 있을 때 생기고, 직관은 내면에 둘 때 생긴다. 정확히는 원래부터 존재해 왔지만 그제야 비로소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긴 할 테지만.
수학공식처럼 직관과 충동을 구별해낼 방법은 없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일 것이다. 그렇기에 책이나 스승의 가르침이 방향은 제시해 줄 수 있어도 해결책 자체는 될 수 없다. 우리가 직접 두 발로 뛰며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다면 말이다. 부처도 말했다. 본인이 길은 알려줄 수 있어도 그것이 우리를 목적지로 도달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우리가 가고가 하는 곳이 어느 곳이든 직접 행동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삶 자체가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이리저리 얽히고 설켜있어도 결국 먼지를 털어내고 거품을 걷어내고 나면 알맹이는 동일할 지도 모른다. 100인 100색이라고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인간이듯, 그 안에 깃든 숨결도, 그 숨결이 향하고자 하는 곳도 하나일지 모른다.
답은 끝없이 고민하며 내면을 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자들의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