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이 감정의 원인은 아니다. 외부 사람의 언행이나 일어난 사건은 자극이지 반드시 원인인 건 아니다. 원인은 나에게 있다. 나의 특정 욕구가 충족 되지 않을 때 드러나는 것이 소위 말하는 부정적 감정이다. 나는 어떤 욕구가 있었을까. 없어보이고 싶지 않다는 욕구. 나는 손님이 없이 파리만 날리는 상황에 애써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관심과 외면은 초연함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인정해주지 않고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생님의 그런, 어찌보면 배려라고도 할 수 있을 행동을 그런식으로 느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나 자신을 그렇게 연민과 동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그리고 그것을 단순한 감정 혹은 느낌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없어 보인다는 평가와 판단까지 내리고 있었다는 게 된다.
일체유심조라고 했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빚어내는 현상임을 되뇌고 또 되뇌도록 하자. 내가 할 일은 외부 현상과 맞서 싸우고 그것을 탓하는 게 아니라, 안으로 시선을 돌려 그것의 뿌리인 마음을 살피고 또 살피는 일이다.
우리의 의식은 밝고 따뜻한 빛과도 같아서 가만히 어떤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지속하면 정화의 작업이 절로 진행된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것은 이내 차분함을 자아내고 물처럼 흘러간다. 눅눅하던 곳에 온기가 드리워져 뽀송함을 되찾듯, 의식의 빛은 홀대받던 어두운 내면을 밝게 비춰 그것이 고여있지 않고 생동감을 가지고 흘러가도록 만든다.
악순환은 무의식의 작용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깨고 싶다면 의식의 개입이 필요하다. 무의식이 자율주행차라면 의식은 그것을 운용하며 여러 설정 값을 세팅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더 우월한가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우열은 인간의 좁은 시야로 자연에 당연히 존재하며 제 몫을 다 하는 존재들에 매긴 그들만의 수치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이유없이 존재를 얻게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늘이 맑다. 새들이 지저귄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몸의 긴장이 풀리고 이완됨을 느낀다. 호흡이 느려지고 깊어진다.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로 향하는 문은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비유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육체의 상태다. 격동과 흥분, 투쟁도피상태와 같은 육체의 상태은 내면으로 향하는 문과는 거리가 멀다. 위로 솟은 기운을 아래로 끌어내려 한 곳에 모으는 것이 내면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열쇠가 된다.
기대와 실망의 반복, 기대에 충족을 안겨주는 쪽만 찾게되는 것은 어쩌면 음식으로 치면 편식과 같을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것도, 하기 싫은 것도 해야한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 모두 반쪽 자리 삶이다.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의 분별을 내려놓는 것이 진짜배기 아닐까. 다만 가고자 하는 길이 있고, 그 길 위에 펼쳐진 삶이라는 파노라마가 존재할 따름이다. 그저 멀리 바라보며 방향을 정하고, 정했다면 이제 매 걸음에 온전히 충실하자. 오늘도 주어진 하루에 감사함을 표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