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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Sep 11. 2023

癸卯년 辛酉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9월 1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9.04 (월)


(..)

무언가를 꼭 해야만 할 필요가 없이, 대체재가 즐비한 세상이다. 이런 환경을 우리의 뇌는, 생존에 대한 집착이라는 옛 습성을 지닌 우리의 뇌는 더 달가워할까?

(..)

무엇인가가 거저 주어진 환경, 그 속에서는 절박함이나 뭔가를 해결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그렇지 않은 환경에 비해 현저히 적을 확률이 높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는 현대사회 역시 그런 맥락에서 혼란과 무기력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말이 세간에 도는 이유는 그것이 모두에게 가닿기 좋은 말이기 때문이다. 광역 스킬. 듣기 좋은 말.

뭐, 가능성의 관점에서는 그게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연성은 부족하다.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 자유롭게 꿈꾸라고 해도 한 개인이 생각할 수 있는 상상의 폭과 그 범위는 그의 경험이나 성향 등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 "무엇이든 가능" 한 게 맞나?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당신이 꿈꾸는 것, 원하는 것, 상상할 수 있는 것 중에서만 가능하다' 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 당연한 전제를 명백히 밝히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러는 쪽이 더 많은 대중성을 갖기 때문이 아닐까.

(..)

가을이다. 가을은 숙살의 기운이 있다. 정리와 결실의 계절. 정리한 만큼 결실도 커진다. 가지를 치고 쭉정이를 가려내야 수확의 양과 질이 모두 높아질 수 있다.




23.09.05 (화)


(..)

단 10분이라도 좋으니 지금 떠올리는 상념들을 그저 이곳에 쏟아내자. 단 몇 분의 쏟아냄 만으로도 다른 영역은 차단되고 내 안의 공간들을 떠도는 낱말과 생각 등에 초점이 온전히 맞춰질 수 있다. 그것은 끊김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끈처럼, 아니면 실타래처럼 계속해서 나온다. 

근사한 글을 써내려 하지 말자. 결과를 바꾸려 들지 말자. 그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꾸밈없이, 진정성을 담아서 드러내는 것에만 집중하자. 꾸미려 하지 않을 때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글이 완성된다. 

집착과 고뇌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감정이 아니다. 영감은 기다림이고 비워둠이다. 마치 언제나 자식의 방을 비워두고 언제든지 고향에 내려오면 머물다 가라 말씀하시는 부모들의 마음으로, 그것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 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여유를 갖춰야, 조바심을 거둬야만 하나둘씩 무언가가 써지기 시작한다.

쓴다는 게, 내 안의 그것을 꺼내어 낸다는 게 이 지점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꺼내어지는지는 적어도 이 단계에서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 과정, 그 행위 자체에 깃든 숭고함을 발견할 줄 알아야 창작이라는 행위를 지속할 수 있다. 

창조는 모든 인간의 본능이다. 번식욕도 가장 근원적인 창조 욕구다. 

타인이 만들어 낸 결과물과 비교할 필요도 없다. 세간의 평가는 물론 당시의 시대상이나 대중의 취향 등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하는 운의 영역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라는 창구를 거쳐 이내 세상으로 나온 그것은 이미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게 그저 남의 것을 모방하고 베끼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적어도 우주적 관점에서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이든, 창조 행위 자체는 결코 멈춰선 안 된다. 

내 안의 그것을 세상 밖으로 끊임없이 내어놓는 산파가 되자.




23.09.07 (목)


(..)

뭔가를 진득하게 해 나가는, 자기만의 길을 닦아 나가는 사람에게는,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세간의 관심이나 인정은 절로 돌아오게 되는 것 같다. 그 구체적인 형태나 방식까지는 본인이 생각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 있을지 몰라도.

(..)

자식을 멀리 유학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러할까. 더 붙어 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보내줘야 하는, 누군가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해 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그런 마음.




23.09.09 (토)


(..)

나의 초점은, 언제나 그랬듯 내 입장과 생각, 가치관을 과시하기 바빴다. 나는 여전히 NVC와는 거리가 먼 방식의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

누군가를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책임감과 부담감을 갖는 것은 역의존적인 관계에 봉착하게 만든다.

(..)

그 어떤 것도 믿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오히려 '무엇이라도 좋으니 내게 믿음을 가질 대상을 줘!'라고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

내면의 소리란 무엇일까. 그것을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오랜, 깊은, 자기와의 대화를 시도해 봤을까. 소위 '내면 아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신이 받은 상처의 깊이만큼이나 깊숙한 곳에 숨어있다. 그 장벽을 넘어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개인마다 시간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나도 곧바로 떠오르는 말이 없다. 어쩌면 나도 지금껏 변죽만 울려왔으면서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자 내 안에서 '일체감'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대체로 하나가 된 듯한 느낌 또는 그런 상태. 내면의 소리를 듣고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소리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정서적, 존재론적 안정감을 주느냐가 관건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확신을 억지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행동하기만 하면 되는 것. 움직이기 시작하는 데까지 살짝 스스로를 떠밀어 줄 수 있게 하는 작은 용기만 갖추면 되는 그런 상태.

(..)

문득 모든 게, 내가 믿고 헌신하는 가치관들이 전부 허상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나를 맡겨본다.

부처의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말조차 허상이라면? LH 순살 아파트보다도 무서운 건 인간의 존재론적 붕괴다. 

유튜브나 SNS 상에서 보이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겐 언제나 조작과 거짓의 가능성이 존재하듯 그것은 시대를 훨씬 앞서 존재해서 그 진위를 실제로 파악하기 힘든 과거의, 역사 속 인물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종교적 위인들, 아니 그보다도 훨씬 이전에 존재하던 고대의 샤먼들까지. 인간사에 종교로 대표되는 '정신적 집결지'를 만들어 인간을 모으는 방식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만, 그리고 깊이만을 달리할 뿐 존재해 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인간은 허상을 믿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것이 허상인지 아닌지는 사실 구태여 따져볼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게 나를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 지가 더 중요하다. 

자신을 살아있게 만들고 움직이게 만들고 무언가에 몰입하고 정진하게 만들어 줄, 궁극적으로, 아니 근본적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그 '무언가'라는 대상을 찾고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취하기로 결정하고 선택하기만 하면 될 문제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갑자기 책장에 꼽혀만 있던 <믿는 인간에 대하여>라는 책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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