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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Nov 20. 2023

癸卯년 癸亥월 세 번째 기록

[주간단남] 11월 3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11.13 (월)


(..)

원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중요한 한 가지는 우선순위를 세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한 번에 하나씩 집중·몰입하는 능력이다. 멀티태스킹은 착각이다. 자신이 동시에 여러 일을 한다는 착각. 과거의 망상에 사로잡힌 채로 현재를 온전히 살 수 없듯이 인간은 멀티태스킹을 하는 의식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일이 많은 척, 바쁜 척 위장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고서야 구태여 나서서 동시에 여러 가지를 처리하려 하지 말자.

(..)

여러 책을 보다 보면 혼란과 깨달음 두 가지가 한 번에 온다. 하나는 그들이 공통된 이야기를 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각자만의 관점들이 서로 부딪히는 지점도 있다는 점. 이 모든 것은 달을 가리키는 여러 손가락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그것을 머리로만 그러할 것이라 아는 것과 실제 아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으리라. 모든 것은 하나의 길로 다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공부와 배움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방향성 아닐까.

(..)

상담사로서 아는 것을 너무 많이 알려주려 하는 것은 어떤 심리 작용의 작용일까. 상대를 위한 마음인 경우와 그저 자신이 아는 걸 하나라도 더 과시하고 싶거나 인정욕구가 발동했을 경우로 나뉠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그래야 한다고 남들이 말하니까 억지로 숙이는 게 아니다. 절로 숙여진다. 안에 든 게 많아지니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바로 여기서 차이점이 발생한다. 빈 수레는 요란하다. 마케팅을 요란하게 할수록 정작 알맹이는 부실한 경우가 허다한 것처럼. 

상담도 마찬가지다. 이건 경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과시욕, 인정욕은 무의식중에 여전히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 스스로가 주지 못하니 자꾸 밖에서 그걸 구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상담이 길어진다. 

또 하나의 관찰 요소는 말하는 비중에 있다. 내담자가 말을 하고 상담자는 주로 들으면서 중요한 지점에서만 입을 연다면, 그건 설령 길어졌다고 해도 좋은 상담일 수 있다. 내담자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상대를 위한 것이냐, 본인을 위한 것이냐가 여기서 갈리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쪽 업계의 상당수가, 아니 어쩌면 상담이니 코칭이니 컨설팅이니 하는 대다수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상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를 돈으로만 보는 1차원적인 수준만이 여기에 해당되는 게 아니다. 자기 효능감, 자존감을 위한 수단으로써 상대를 보고 있다는 것까지 포함하면 그물망의 너비가 확 넓어진다.

여기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기 효능감은 초점을 오로지 상대를 위하는 마음에 맞춰서 양질의 상담이 이뤄졌을 때 자연스레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올바른 목적과 태도가 전제될 때 얻어지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삼을 때 많은 문제가 생겨난다. 수단이나 과정은 아랑곳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다.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목적 전치 현상들의 배경이 이것이리.

(..)

A라는 신념이 있다. 그것의 이해당사자는 a라는 집단이다. 만일 A를 믿고 추구하며 주장하는 이유가 그게 옳은 가치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a 집단이고, 그게 a 집단에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면 그건 신념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다. 

그 여부를 아는 방법은 A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b 집단의 이해관계와 상충하는 지점이 생길 때의 태도를 보는 것이다. 자기 집단의 이익 추구를 위해 b 집단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며 짓밟고 무찔러야 하는 적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집단 이기주의인 것이다. 이럴 경우 a와 b 집단은 투쟁한다. 무엇이 선이고 옳은 가치인지를 두고 논쟁을 펼치는 게 아니라, 누가 더 큰 밥그릇을 차지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상대의 밥그릇까지 내가 가져올 수 있느냐에 대한 다툼이다. 그런 것에 '신념'이라는 칭호는 사치다.

(..)

자신이 b 집단인데 설령 어떤 것이 자기 집단에 이익이 되지 않고, 심지어 때로는 손해가 될지라도 a 집단에 이득이 A라는 길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옳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 경우에도 숨은 욕구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그것은 a 집단으로의 편입 혹은 비호를 받고자 하는 목적일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은 옳음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꾸미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착각에 가까운 향유가 가능한 것은 그가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a 집단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원래 남일은 왈가왈부하기 쉬운 법이다. b 집단에 속한 그에겐 사활을 걸 하등의 이유가 없다. 만일 이면에 숨은 욕구가 이처럼 옳음에 대한 지향이 아니라 스스로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함에 있다면, 그건 개인주의다. 만일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A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b 집단의 희생을 당연시 여긴다면 개인주의를 넘어선 이기주의다.

흑백논리로는 그 어떤 것도 답이 아니거나 답인 척하는 함정에 불과하다. 옳음을 지향하는 여정은 쉽지 않다. a와 b 모든 집단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전쟁 주인 두 세력 앞을 혈혈단신으로 가로막고는 무모하게도 두 팔 벌려 맨몸으로 평화와 중재를 외치는 무모한 모습에 가깝다. 집단이나 세력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코자 만들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는 것만 허용할 뿐이다. 

자연스러운 수순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삼지 아니하며, 흑백논리에 치우치지 아니하며, 그것이 나에게 이득인지를 따지지 아니하며, 오직 옳은 가치인지를, 후대에도 물려줄 가치가 있는 지혜가 담긴 관점인지를 묻는 것만이 개개인이 취해야 할 궁극적인 경지 아닐까.




23.11.14 (화)


(..)

의식적이고 표면적인 생각 밑에 늘 깔려있는, 숨겨진 마음과 생각들이 존재한다. 일상에서 의식하지 않아도 밟고 서있는 도로 아래에는 늘 하수도가 흐르고 있는 것처럼. 그 아래에 놓인 생각의 혼탁 여부가 표면적인 층위에서 우리가 겪는 일상의 양상을 결정짓는다.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곧장 무언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지금 내 돈도 그렇다. 매일을 풍요, 여유, 안정에 시선을 의식적으로 집중하지만, 마음 한편엔 여전히 의심, 두려움, 걱정이 남아있다. 단 한 톨의 소금이라도 섞여있다면 그건 정제수가 아니다. 무의식과 경험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리라. 

비우고 덜어내고 동시에 깨끗한 물로 채우기를 반복하는 수밖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냥 하는 거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시지프스처럼. 구시렁대지 않고 그저 매일 양치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실천이 뒤따라야만 한다.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 건 오직 실천과 행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

작은 상가라도 합리적인 곳이 있다면, 아니면 사무실이라도, 알아나 보자. 말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하자. 단 서두르지만 말자. 이럴 때야말로 심상화의 효과를 증명해 볼 절호의 기회가 아니던가. 



23.11.17 (금)


(..)

안 될 이유를 찾고서 합리화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안 된다.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되어야 한다. 어느 것이든 길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기다리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니, 기다리는 것인지 외면하는 것인지 생각을 더 해보긴 해야겠다. 

어제 그 말은 내게 잔소리나 닦달이 아니라 화두로써 다가왔다. 우선 주변 상가나 사무실 임대 시세조차 모르고 있다. 어떤 인테리어로, 어떤 상품을 구상해서 내놓을 것인지, 등등 대략적인 스케치조차 없다.  지금이 특정한 때를 기다리는 중이라면, 그동안 구상이나 정보 수집 정도는 해둘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

언제나 감사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결코 이것을 당연시 여겨선 안 된다. 그럼 난 물을 너무 많이 받은 나머지 뿌리가 썩어버리는 화초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23.11.19 (일)


(..)

그래, 어제 말했던 것 중 하나는 통변 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유려한 첫마디가 아닐까 하던 거였다. 시작부터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것의 중요성. 그것도 물론 지나치면 독이 되겠지만, 분야를 막론하고 첫인상은 늘 평균 이상의 중요도를 갖는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지식과 지혜는 물론이거니와, 자극과 반응 사이의 그 의식적인 '숨'이 필요하다. 그 호흡이 만들어내는 빈 공간이 듣는 이로 하여금 한 호흡을 따라 숨 쉬게 만들기 때문이다.

(..)

아직까지는 내 의도와 의식의 방향에 맞춰 현실의 경험들이 재구성될 만큼 에너지 레벨이 높은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어딘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이 되는 과제들에 살짝 압도되는 듯한 느낌이다.

(..)

올해 마무리는 스스로 만든 템플릿으로 해볼까? 나는 어떤 사색으로 한 해를 돌아볼 것인가? 어떤 영역에 집중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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