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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Nov 13. 2023

癸卯년 癸亥월 두 번째 기록

[주간단남] 11월 2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11.06 (월)


(..)

다시 태어날 기회는 매일 아침 새롭게 주어진다. 일어날 때부터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된다. 마치 미래에 존재할 수 있는 여러 버전의 내 모습 중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그 모습의 나라면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지 상상하며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그게 이미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라는 말에 담긴 뜻이리라. 

미래는 만드는 게 아니다. 우린 그저 이미 창조되어 있는 무한대의 시나리오 중 하나를 택할 뿐이고, 그것을 향해 걸어나갈 뿐인 것이다. 실제 삶이 펼쳐지는 무대는 '지금'이라는 실재하는 지점뿐이다. 사실상 우리가 편의상 구분 짓기 위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말을 쓸 뿐.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지금이라는 매 순간 위에서 펼쳐진다.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하며 새로고침 되고 있다. 새롭게 리프레시 되며 지금 위에 또 새로이 그다음 지금이 겹쳐지고, 겹쳐지고 또 겹쳐진다. 미래란, 누적된 지금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미래를 예측하는 법은 간단하다. 현재 자신이 늘 머리와 가슴속에 그리는 모습대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언제까지? 그건 사람마다, 품은 생각마다 다를 것이다. 중요한 점은 지금의 내 모습은 우리가 과거라 부르는, 이미 저 아래에 깔린 이전 버전의 '지금'들이 누적되어 온 결과물이란 거다. 그걸 만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삶에서 어떤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

자신이 그리던 궤도 위에 올라섰는지는 자신이 상상하고 그리던, 그래서 닮고 싶은 미래의 자신의 모습과 똑닮은 행동을 어느샌가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고 있을 때라는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그전까지는 의식적인 훈련의 연속이다. 

그 보조 역할을 타로카드가 해줄 수 있다. 그리고 내게 패턴화된 작용의 변수가 되는 기운의 흐름은 명리학이 보조도구로써 파악에 도움을 준다. 두 도구는 궁극적으로 신변잡기가 아닌 영적 성장의 도구다. 

이제껏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이 갑자기 오늘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면서 시작된 저 첫 문장이라는 계시 같은 화두로써 나에게 다가왔다. 오늘 하루 나는 새롭게 다시 태어난 셈이다. 더 큰 버전의 '나'로.




23.11.07 (화)


(..)

어제 종일 날씨가 가을 태풍이라도 온 것마냥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오늘은 쾌청하다. 하지만 완연한 가을의 쾌청함과는 어딘가 다른, 코 끝이 시릴 정도의 상쾌함이 느껴지는 기운. 겨울인 것이다. 겨울의 기운이 하루 만에 물씬 풍겨온다. 입동이 코앞인데도 가을이 제 분수를 모르고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자연의 균형력이 어떻게든 작용한 것이다.

자연을 닮은, 우리 몸도 어떻게든 균형을 맞춘다. 그 균형의 작용과 그로 인한 결과가 당사자인 우리에게 반드시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길흉은 인간의 판단이고, 균형은 자연의 객관적인 작용이요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몸을 망가뜨리는 행위를 많이 해서 몸이 스스로 회복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면 자연법칙은 그 몸을 병들게 하여 몸 져 눕게 한다. 그래야 회복을 시작하여 균형을 다시 세울 수 있기에. 자신의 욕망을 지나치게 억누르다 보면 어느 시점엔 그 욕망이 화산처럼 마구 분출되어 스스로도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다. 

삶이 승승장구 일색이라 언제나 자만에 두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다가는 반드시 그 기세가 꺾이는 시기가 오기 마련이며, 삶이 계속해서 어둠과 곤경에 곤두박질치더라도 바닥을 찍고 나면 다시 위로 천천히 상승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무한대로 순환하고 변화하는 자연이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법칙이 발현된 결과다. 우리는 그것을 거스르려 해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가장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는 그것과 싸우지 않고 그것 위에 올라타는 것이다. 스스로의 운명과 싸우지 마라. 단지 그것을 품에 안아라. 그게 우리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Amor Fati 말의 전언일 것이다. 

뭔가 꿈틀꿈틀 내 안에서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나는 게 감지가 된다. 내가 어딘가로 끌려가는 기분, 정확히는 어떠한 미래가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듯한 기분. 플라시보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의지를 생성하는 도구는 감정인 게 주지의 사실이다.

인생의 나침반은 곧 감정과 느낌이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감지되는 변화는 순풍이 일으키는 느낌과 닮았다. 미소와 궁금증을 유발하는 설레는 감정, 신비한 느낌, 뭔가가 되기는 되는구나 하는 그런, 막연하지만 알 것도 같은 그런 애매모호한 상태. 희뿌연 안갯속에서도 한 줄기 빛은 보이는 법이다.



23.11.08 (수)


(..)

때로는 사소한 갈등이 사람을 더 힘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건 패턴화된 감정의 결과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본 격이다. 4년간 올림픽 선수급으로 훈련시키더니 마을 운동회에 출전시키는 꼴 같달까.

(..)

감정적 중독은 계속해서 비슷한 패턴대로 반응하는 조건 반사적 경험만을 양산한다. 이게 참,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 패턴의 덫에 걸리면 빠져나오기가 쉽지가 않다. 잠깐. 빠져나올 생각은 있고? 어떤 관점에서는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홀린 듯 뛰어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중독이란 표현이 딱 맞다.

(..)

나는 대체 왜 매번 같은 패턴으로 '내로남불'에 발작 버튼이 눌릴까. 내 안에 어떤 억눌린 감정과 욕구가 있는 걸까. 왜지? 왜 나는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사람,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 사안에 대해 남을 지적하는 것을 견디질 못하는가. 나는 왜 부당함, 부조리함, 정의롭지 못함에 분노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선을, 옳음을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믿어왔지만 그게 내 삶을 더 나은 쪽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바라보아야 할 내 속을 보지 못하고 주변이 부당하고, 부조리하고, 모순 투성이라고만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피해자 마인드와 뭐가 다를까 싶다.

그렇구나. 내로남불은 피해의식이다. 옳음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여도 거기에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에 속기 딱 좋은 있어 보이는 피해의식. 이게 더 무섭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자기 잇속만을 주장하는 1차원적인 피해자 마인드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고상한 척 위장한 피해자 마인드는 주변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좀먹고 말 것이다. 주변에서 내로남불을 하든, 부조리함을 일삼든, 어느 정도는 인간이 나약함, 유치함, 모순 등을 지닌 불완전한 존재라는 연민 어린 대전제 위에서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야 내 안의 분노가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내로남불에 눌려." 

그게 자랑인가? 솔직히 자랑처럼 말했었다. 스스로가 추구하는 옳음에 대한 방향성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향성은 스스로 추구할 인생길의 항로가 되어야지, 타인을 재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에게로 그 잣대가 향하는 순간 그건 방향성이 아니라 억눌린 욕구의 왜곡된 발현에 지나지 않게 된다.

명심하라. 자동차 경적을 울리지 않으면, 애초에 그것을 울릴 일이 사라진다는 것을. 스스로를 억누르면서 옳음을 지향할 게 아니라 너그러움과 포용, 불완전하고 부족한 게 문제가 아니라 원래 존재 자체의 본질임을 깨닫고 수용해야 한다. 고정된 완전함은 없다. 균형은 불안정의 연속됨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결점 없는 이는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다. 더 넓어지자. 더 받아들이자. 일단 스스로의 부족함부터 말이다. 부족함이 아니라, 하나의 특징 그 자체로 말이다. 옳고 그름이라는 구분선을 내려놓자. 그냥 이런저런 일들이 생겨나고, 이런저런 감정들이 일어난 것뿐이다. 그게 전부다. 정말로.

그러니 오버하지 말고, 생쇼 하지도 마라. 피해자 마인드에서 벗어나라. 오늘도 하늘은 맑지 않으냐. 새롭게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자. 모든 것은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 아름답다의 본래 뜻은 '나답다'라는 의미이다.



23.11.09 (목)


(..)

요새 잠이 좀 부족해서 다시 자고 싶은 마음이 들어 20분 정도 더 자야지, 했다. 그러다 이내 침대 앞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낮에 졸리면 낮잠이나 한숨 자야지 뭐.' 

자야겠단 생각을 왜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지 그냥 더 자고 싶어서, 졸려서,라고 하는 것은 피상적인 욕구만 본 것이다. 그 이면에는 하루가 막막해서 잠으로 회피하고 싶을 때도, 6시간 이하로 자면 뭔가 건강에 해로울 것 같기도 해서일 때도 있다. 

진짜 몸에 피로가 지나치게 쌓여 휴식을 원한다면 그런 욕구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이내 곯아떨어질 테다. 오늘 같은 경우는 그냥 머리로 '더 자야 하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뭔가 건강에 안 좋을 것 같아서. 

(..)

몸이 중요한 건 맞지만 주인은 마음이요, 몸은 종이라는 활 스승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몸은 마음이 올바른 상태를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하는 터전이요, 그릇이 되면 그뿐이다. 몸은 마음이 품은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행동할 에너지가 가득 찬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게 몸과 마음이 이루어야 할 바른 주종 관계다.

(..)

내가 예전에 하나 사둔 책이 우연히 내가 인스타에서 팔로우하는 분이 계시는 출판사 것이란 걸 알고 놀랐다. 이게 동시성일까. 이런 사실에 대한 인지가 내 삶에 어떠한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걸 또 보여주게 될까.

(..)

어떻게든 돈은 생긴다. 중요한 건 내 의도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생길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이 돈이 필요하다 외치는 건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퍼져 나가버릴 것이다. 

(..)

옆집 남자가 문을 쾅 하고 닫고 나간다. 7시 전후가 되었단 뜻이다. 저렇게 7시에 나가서 7시에 돌아오는 것이 그의 일과다. 몇 년째 한결같이 문을 쾅쾅 여닫을 만큼 그는 무심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신기하게도 처음과 달리 거의 사라졌다. 반응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포용하고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에 대한 필터는 서서히 녹아 사라져가는 것의 명백한 사례가 아닐까.

(..)

운전을 할 땐 늘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는 걸 평생의 습관으로 삼도록 하라. 내가 운이 좋아 사소한 것 하나도 다 사고의 형태가 아니라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만 다가오고 있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감사하며, 행동의 변화, 아니 태도의 변화로 이끌어 내라. 이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자신의 책임은 부정하고 외부의 탓만 한다거나, 알아차리지조차 못한다면 그러한 운의 보호가 사라지는 순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깨어있으란 거다 무의식적으로 잠든 정신 상태로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다. 나나 동승자, 다른 운전자나 보행자,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생명체들까지, 그 누구든 나의 부주의로 인해 다칠 수 있는 게 운전 아닌가. 안일한 마음은 독이다.

비단 운전뿐만이 아니라 삶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고스란히 우주에 풀어지고 어떠한 형태로든 내가 다시 돌려받는다. 그리고 내 주변 역시 반드시 그에 영향을 일정 부분 받는다. 그게 퍼지고 퍼지면 결국 온 세상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니 말 다 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언행에 막중한 책임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설령 그것이 혼잣말이나 혼자만의 생각이라 할지라도. 

'신독'. 

혼자 있어도 늘 자기 자신만큼은 보고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선현의 가르침을 명심토록 하자. 



23.11.12 (일)


(..)

요란한 꿈 여행을 하고 왔다. 내가 어떤 큰 비밀 단체의 실체를 알게 됐으나 내 주변인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함부로 행동할 수 없어 고뇌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실상 생각나는 감정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과 소중한 주변인들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

속이 어쩐지 더부룩하다. 합곡에 침을 한 방 놓는다. 쉽게 쑥 들어갈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혈자리란 게 컴퓨터로 찍은 좌표처럼 정확한 지점이 아니라는 증거다. 

(..)

사랑과 감사. 이보다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감정이 또 있을까. 감사하고 사랑을 베풀며 살면 세상은 더 따스해지리. 겨울철 나르는 연탄 봉사의 진짜 의의는 연탄이라는 그 물질적 가치보다도, 밖에 가만히 서있기도 추운 날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는 그 따스한 마음에 담겨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물질은 돌고 돈다. 새로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면서 계속 순환한다. 작용과 반작용처럼 우리가 내놓는 사랑과 감사의 에너지는 어딘가에서 우리가 받았던 것이며, 그것을 다시 밖으로 풀어내면 어딘가에서 또 피어오르게 마련이다. 우리가 사랑과 감사를 받은 만큼 베풂의 시야도 트이는 것처럼.

(..)

상상만 한다고 이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다. 정확히는 육신뿐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신성까지 포함한 게 인간이란 존재일 테다. 이 삶은 그가 육신이라는 옷을 입기 전 이미 설계해둔 큰 그림이다. 그런 측면에서 삶의 사건이 내게 일어난다는 수동적, 피동적 자세를 견지하기 쉽지만, 실은 다 짜여진 것이고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짰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그게 나의, 보다 큰 나의 계획이란 걸 깨달을 때 비로소 큰 나와 작은 나의 일심동체가 완성이 될 터다. 삶은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모든 게 짜여 있었고 그걸 기획한 것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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