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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Nov 06. 2023

癸卯년 癸亥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11월 1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10.30 (월)


(..)

심리 상담의 목적은 내담자의 자립과 독립에 있다. 그렇기에 재방문율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재방문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담사의 상담 스타일이 인간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매력이 있었다는 방증이니 단기적으로는 긍정의 신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매력으로 인해 내담자가 장기적인 단골손님이 되어버린다면? 이것 참 난감하다. 상담자로 인해 내담자는 주체성을 상실해버린 것 아닐까. 그 역시 판단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 내담자의 방문 빈도가 어떠한지, 상담의 주제가 어떤지, 그 주제가 변해가는지, 혹은 일관된 주제여도 내용 상의 발전이 있는지, 그리고 다 떠나서 내담자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첫 방문 때에 비해서 더 생기가 넘치고 살아있음이 느껴져 보이는지 등을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나의 작은 언행 하나에도 타인의 삶에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올바름에 대한 기준을 세워두고 스스로를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한다.


(..)

더욱 넓게 이 논의의 범위를 확장하자면, 모든 개인은 자신의 언행에 늘 신중을 기해야 한다. 각자가 하는 생각과 행동, 거기에서 비롯되는 감정 등은 모두 이 세상에 어떠한 지를 결정짓는 개별적 요인이 된다. 긍정도 부정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전염성을 갖기 마련이다. 자신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제아무리 그 크기가 작고 미미할지라도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마인드 셋을 갖춘다면 세상은 훨씬 그 혼탁함을 씻어내리라. 사람들이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야 할 곳이 바로 교육기관, 종교기관, 그리고 가정과 사회 공동체다. 지금처럼 배때기 기름칠할 궁리, 훌륭한 일꾼, 복종하는 신도 등만 양산하려고 혈안이 되어 골몰하는 게 아니라 말이다.




23.10.31 (화)


(..)

아마 우린 알게 모르게 변해왔고, 또 변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

이미 가진 것을 보지 못하고 당연시 여기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지. 여전히 나아갈 지점이 많은 우리지만,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은 파도가 집어삼키듯 큰마음으로 수용토록 연습하자. 그런 감정을 성숙하고 차분하게 표현해 내는 사람이 되자. 


내가 바뀌어야 주변이 바뀐다. 갈등이 비슷하게 반복된다는 것은 내 안이 아직 덜 바뀌었다는 뜻이란 걸 명심하자.




23.11.01 (수)


(..)

다시 태어난 것 같이 머리가 맑다. 간밤에 아주 푹 잤나 보다.


(..)

어쩌다 인스타에서 본 한 심령 술사(?)가 '비방'을 돈 받고 행하는 것을 보았다. 보이지 않지만 곳곳에서 소위 '마법'의식을 통해 원하는 것을 현실화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정녕 옳은 길인지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영매'라면 자고로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신과 인간을 잇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을 해하거나 훼방을 놓기 위한 염원을 담는 욕망의 실현을 돕기 위해 돈을 받고 그런 마법적 의식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소위 말하는 그림자 정부가 치르는 흑마법 의식과 그것이 무엇이 다르지?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인 능력은 그런 세속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닐 테다. 그런 중재자들은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세계'의 존재를 몸소 증명하는 존재,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 살아갈 이유를 던지는 존재, 진리와 세속적 인간을 매개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마땅함에 대한 관점은 순전히 나의 가치관에 따른 주관적 견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단지 톨게이트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런 세계의 존재를 알고, 통행료만 있다면 구태여 입장에 그 어떤 제약도 없는 열린 세계. 그러다 보니 인간의 순수한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세계. 


어쩌면 문제는 도구 그 자체, 어떤 경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개개인의 의식 수준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돈 자체가 좋고 나쁜 게 아니라 그것을 손에 쥐었을 때 그 사람의 현재 지닌 본성이 더욱 극대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의식의 수준을 높여줄 역할을 할 사람들이 별도로 존재해야 하는 거겠지. 통로는 통로대로 자기 본분에 충실할 따름이고.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우리 각자는 모두 이 우주가 어떠한 성질을 갖는지, 좁게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국가, 사회, 이웃의 성질이 어떠한 종류가 되는지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것을 잊어선 안 된다.




23.11.02 (목)


(..)

밤새 어찌나 뒤척였는지 이부자리가 난장판이다.


(..)

모르는 것을 보면 좌절감이나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저건 또 뭐야, 저런 것까지 알려면 내공이 얼마나 쌓여야 하지? 지금껏 얼마나 공부를 했는데 모르는 게 생겨? 


이런 불안에 뿌리를 둔 질문들이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물음들의 존재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그건 단지 내가 지닌 것의 일부요, 나의 상태를 드러내는 현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서 이러한 현상, 특성을 진실로 받아들여 버리는 경우는 문제가 된다.


(..)

책상 위에 놓여 날 바라보는 키퍼 카드는 언제 공부를 시작할까. 일단은 더 기다려보자. 수비학이 더 먼저다. 타로에 보다 깊이를 더하고 그다음이 다른 오라클이다. 


(..)

카드를 읽어줌에 있어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는 건 통/번역으로 말하자면 직역에 가깝다. 그것도 원문에 지나치게 충실한. 타깃 언어의 이용층, 그리고 원문 자체의 타깃 독자의 성향이나 페르소나적 특성에 대한 파악이 전혀 없는.


(..)

대화에 있어서는 아웃풋이 아니라 인풋이 먼저다. 잘 들어야 잘 말한다. 잘 듣는다는 건, 그냥 가만히 앉아 듣기만 하라는 게 아니다. 매우 의식적이고 집중하는, 각종 선입견으로 판단하고 분석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노력하는, 그런 세심한 관찰과 경청에서 오는 그런 올바른 듣기를 통해서만 제대로 된 인풋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보는 순간, 듣는 순간 판단하고 반응하지 않나. 그런 동물적인 감각은 생존과 같이 중요한 일일 경우에만, 혹은 단순 반복형 업무같이 '답이 정해진' 경우에만 쓰도록 하자. 그 외의 대부분의 일상 속, 특히 감정과 연관된 일에는 더더욱 보수적이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일시적 멈춤이 필요하다. 그게 나를, 당신을, 우리를 보다 높고 큰 정신적 경지로 다다를 수 있게 할 것이다. 자극에, 정확히는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감정에 휘둘리고 끌려다니지 말라. 그것의 고삐를 손에 움켜쥐는 자만이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으리니.



23.11.03 (금)


(..)

효율성의 추구와 즐거움의 추구가 상충한다면, 나는 다소 느려지더라도 즐거운 길을 택하련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도 결국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서 아닌가. 인간은 어차피 모두 종국에는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평소에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더 상위 가치인지를 되묻는다면 선택의 기로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

블로그에 엑스퍼트 링크를 올리는 일에 대해 생각을 좀 해볼 필요가 있다.  블로그에서 말하려는 나의 지향점이 엑스퍼트 상에도 잘 노출이 되어있는지도 검토해 볼 일이다. 일관되게 묻어 나오는 나만의 색채, 향기에 사람들은 이끌림을 느낄 테니까.


(..)

누구는 벌써 옛말이 되어버렸다고 하지만, 난 여전히 마케팅이든 브랜딩이든 본질은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에 있다고 본다. 유명세가 유명세를 낳는 건 한계가 명확하다. 반면, 어느 식품의 맛 그 자체가 너무나도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하다면 포장지 디자인이 최악이더라도 무슨 대수겠는가. 오히려 그것마저도 하나의 흥행 포인트가 되고 말 것이다. 


(..)

한 장만 쓰는 게 익숙해지니 뭔가 생각이 확장되려다가도 여기서 멈춰버리는 게 패턴화되는 것 같다. 이런 식이면 두 장의 문턱에서 자꾸 멈추고 마무리하려는 욕구가 나도 모르게 일게 될 것 같다. 오늘은 의식적으로 그 문턱을 넘어본다. 


넘어가 보는 경험을 한 번 해두면 패턴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균열이 한 번 생기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냥 이렇게 분량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의 물결이 계속 일렁이도록 두어야 그 흐름을 따라 자연스레 경계를 넘어간다. 경계를 한번 넘는 게 어렵지, 일단 넘으면 계속 넘실거리게 되는 게 자연의 이치 아닐까.


(..)

긍정이든 부정이든 조건화된 패턴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을 방금 두 번이나 실천했다. 부정을, 긍정을, 한 번씩 의식적으로 거부했다. 의식적인 선택이야말로 '진짜' 선택이고, 그런 진짜 선택들이 모여서 진짜 삶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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